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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인천강과 안수정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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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의
갈등 어떻게 풀까요?”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常樂我淨'
<법보신문 컬럼/2004-06-23/760호>
Q :
불교의 자비가르침을 마음속에 담고 생활하려고 노력하지만 일상에서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수용하려고 마음먹지만 오래 가지 못하고 다시 부닥치곤 합니다. 깨달은 사람도 번민이 있습니까. 불교의 자비와 포용이 참는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나와 남이 편하다는 중생제도에 관한 좋은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A : 천강에 두루 비추이는 달빛은 선택과 포용이 아니듯 불제자의 자비실천은 무주상 보시로서 인연취산을 바라지 않습니다. 생불도 사바세상을 벗어난 것이 아니기에 삶의 곡절이 있기 마련입니다. 인간불사 중생구제 서원도 내려놓을 수없는 멍에이고 병고와 늙음이 괴롭지만 휘둘림이 없습니다. 속세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산속으로 피신하면 그치지 않는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와 싸워야 합니다. 나[我]라는 아상이 일체중생의 속성을 이해하는 측은지심보다 앞서면 반목과 시비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교의 조복은 누구와 견주는 것이 아니라 상대법에 휘둘리는 자기 자신을 극기한 진리의 힘이 본질입니다. 염왕도 자기를 이긴 무심도인을 어쩌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생육도를 떠도는 사바중생으로부터 상처받을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닭은 닭소리하고 개는 개소리하는 것이 당연한데 나와 맞지 않다고 시비분별을 일삼는 그 마음이 더 문제입니다.
세상을 내안의 네가 아닌 너라는 상대법으로 보면 귀천과 의심이 겹겹이기 때문에 번뇌가 그치지 않습니다. 반하여 이치로 세상을 바라보면 마음에 상이 맺히지 않기 때문에 상대가 무엇이든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보고 듣고 맛본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분별근성 때문에 희비가 엇갈리고 고뇌가 생겨나는 겁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 심행처멸의 이치를 터득하는 참선공부로 숙세의 훈습을 녹이면 사바세상 일체만유가 있는 그대로 투영되기 때문에 상처받을 일이 없습니다. 세상과 부대끼는 아상이 사라진 근본마음은 좋고 싫은 것들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어디서나 무엇을 하든 마음에 잔재가 남지 않습니다. 속물중생의 늪에서 벗어난 무아(無我) 역시 흑백이 뚜렷한 가운데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면서 시대의 소임을 다하지만 무심이라는 선약을 지녔기에 세상으로 부터 상처받지 않습니다. 속진을 살면서 언제나 여여한 상락아정(常樂我淨)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여법한 천강에 두루 비추이는 만월 같은 무심(無心)입니다.
Q :
옛날 용성스님이 전강스님에게 묻기를, "그대들이 안수정등에 나오는 나무뿌리에 매달린 그 남자라 하고 어디 한번 일러보라" 하자 전강스님이 이르기를 "달다" 그러자 용성스님이 깜짝 놀라며 다시 일러보라 하니 전강스님은 "달다, 아주 달다"라고 이르시니 용성스님이 무릎을 치며 "과연 남방의 제일 도인이로다"하였다는데 여기서 말하는 "달다, 아주 달다"는 무슨 도리이며 이런 시험을 통과하여야만 인가되는 것입니까.
A : 만일 내 앞에서 전강이 ‘달다 아주 달다’하니 용성이 ‘남방제일 도인이구나’하고 구린입을 놀렸다면 두 중을 호랑이 굴에 내던졌을 겁니다. ‘달다’라고 질문자의 의도에 부합되는 기연을 깨우침으로 여기는 눈물겨운 근기를 탓할 수는 없지만 언어유희를 부처공부로 삼았던 중국선가의 해학적인 수행풍토가 불도를 어지럽혔다고 봅니다. 반야지혜는 고매한 학문이나 잽싼 눈치로 상대방 의도에 맞추는 언어의 기술이 아닙니다. 안수정등은 천 길 낭떠러지 위에 간당간당한 나무뿌리에 매달린 처지인줄도 모르고 단맛에 취한 탐욕중생의 속성을 비유한 것이 본뜻이지만 이를 인용한 용성의 죽은 말에 반색하며 맞장구치는 전강이 같지 않아야만 일없고 일없는 도인입니다.
무심지혜는 박학다식이 아니듯 선문답 또한 상대방의 지식과 상식을 간파하는 척도가 아니라 불도수행자의 안심을 점검하고 줄탁과 같은 동기유발을 기대하는 선지식의 오도(悟道)방편설입니다. 분별망상과 구구한 사유체계를 한방에 뛰어넘는 기발한 선문답이 맞고 틀린 것을 가름하는 잣대로 변질된 것은 선가역시 말법세상을 넘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시절이 수상하니 언어에 기대지 않는 선문에 가당치도 않는 인가라는 풍조가 만연하고 종문의 계통적자로 삼는 것은 측은한 말세법현상입니다. 석가부처님은 누구로부터 인가를 받아 성도하였다는 소식을 접한바 없습니다. 만약 알에서 갓 부화하는 기러기가 처음 본 것이 산골 중이었다면 중 같은 짓을 하려는 기러기가 될 것이기에 물들기 이전의 본래면목을 회복하려는 불도에 인가라는 각인은 어불성설입니다. 육문(六門)이 청정하고 육경(六鏡) 육식(六識)이 밝고 또렷하다면 굳이 교법이니 선법이니 할 것도 없이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문수, 보현이고 관세음보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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