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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와 보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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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은
보살도와 상반되지 않나요?”
깨치면 모든
행이 ‘보살도-바라밀행
<법보신문 컬럼/2004-05-26/757호>
Q :
처음에는 불교가
신비롭고 쉬워 보였는데 지금은 진퇴양난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만 깨달으면 일체가 성불한
것으로 여기는 참선과 현실참여를 하면서 포교
및 보시에 매진하는 보살도가 서로 상반되는
것은 아닌지요. 내면에 침잠하는 참선수행과
보시, 포교, 재보시를 중시하는 대승불교와의
차이에서 갈등을 갖게 되었습니다.
A : 불법은 태초로부터 끊어진바
없는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지는 심법이자 인연법입니다.
말과 글 시공을 초월하여 삼라만상과 통해지는
마음이 곧 깨달음이기에 불교수행은 시절인연을
만나기 위한 각고의 노력과 같습니다. 중국이나
고대 인도 언어로 된 불서와 해괴한 종교행위를
불교의 전부로 보기 때문에 뒤틀리고 어려워진
것입니다. 선(禪)과 교(敎)가 다르지 않듯이
참선수행과 대승불교 실천 또한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선과 교라는 이름에 속고 지킬 내면과
외경을 달리 보게 됨으로서 원래 없는 고민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상구보리 하화중생
원이 그렇듯 일체중생구제 원을 가진 보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불법에 귀의한 모든
사람이 바로 보살이며, 승(僧)입니다.
불교는 실체가 아니라 방편설로서
강을 건너면 당연히 버려야 할 나룻배와 같은
것입니다. 나룻배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한 것은
아직 덜 깨쳤거나 깨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에게는 제도할 중생도
닦을 보살도도 없습니다. 깨닫기 위해서 일체중생의
안위를 염려한다는 것은 짝사랑입니다.
포교와 보시를 잘해서 성불하는
것이 아니라 불법을 귀의처로 삼은 그 마음이면
이미 깨달은 것입니다. 깨친 사람은 당연히
자비헌신적인 바라밀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더 큰 지혜를 얻는 길이며 영원한 삶인
줄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살도와 육바라밀을 앞세우면
그냥 보살이며 바라밀행을 하려는 사람일 뿐입니다.
부처는 보살도에 의지하지 않거니와 바라밀행을
내세우지도 않습니다. 보살행을 하는 사람이
바로 부처이므로 그에게는 앉거나 누워도 바라밀행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각자(覺者)는 6바라밀이
아니라 8만4천 바라밀행에 능(能)합니다.
Q :
윤회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인지요. 학습과 사유로서 인과의
증폭과 소멸이 가능한 것이며, 현재 별로 선하지
않는 사람이 잘사는 경우가 많은 것은 인과법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좋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지요.
A : 1+1=2 이지만 2는 진리가
아니듯 업과가 통째로 윤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의 힘으로 윤회의 요소, 즉 무명업식을
감하거나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선업은 무명을
밝히는 지혜의 밑거름입니다. 이타행과 정진으로
더 좋은 미래를 개척하는 것도 인간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면면 중에는 하열한 근기가
부귀권세를 누리는 경우도 왕왕 있습니다.
전생 공력이 그 방향으로 발복한 것이지만
대다수 영화에 취하고 더 탐하느라 선업이
몽땅 소멸되어 내생은 미물이나 축생의 뱃속에
들기 딱 알맞습니다. 지금은 업력의 순환이
빨라 당대에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를
받습니다. 나날이 발전하는 이 첨단 문명시대에
자유와 풍요를 향유하되 착(着)이 없으면 중생의
인과법칙과는 무관합니다. 무소유심을 위하여
정사유(正思惟)합니다. 나에게 가장 잘 사는
비법을 묻는다면 오로지 무심(無心)이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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