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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악의
소와 수레- 6
“선문답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요?”
중생의 편견-아집
끊는 깨우침의 묘약
<법보신문 컬럼/2004-05-05/754호>
Q :
꽃과 나비, 물,
태양 등 지구상의 모든 것들에 대하여 그 존재의
의미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다가 살생과 파괴,
오염을 일삼는 인간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에서 미궁에 빠졌습니다. 어리석은 질문
같지만 저에게는 매우 절실한 문제입니다.
A : 인간 역시 동, 식물처럼 생성소멸하는
우주자연의 연기(緣起)의
산물로 이 지구에 존재하며, 절대 진리인 무위자연을
올바로 이해하면 순리를 그르치지 않게 됩니다. 모든
인간은 전생 업(業)을 다 멸하지 못한 원인[根]이
있어 부모인연 지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축생이나 미물이 아닌 만물의 영장인 인간
몸 받은 것은 그나마 전생 공덕이 있어 해탈열반에
들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부여받은 것이기에
탄생 그 자체는 분명 축복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특화된 소행성이기에
역동적이며 투쟁과 파괴적 소양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여러 법칙을 만들어 서로의
생존을 보장받으려고 하지만 규제와 훈육만으로는
약육강식의 생존질서에 노출되었던 전생 습을
모두 내려놓지 못합니다. 진리를 믿고, 진리의
삶을 살겠다는 다짐과 노력을 통해서 다 함께
이로운 자비관을 갖게 되고 그러므로 탐욕과
파괴로부터 자유스러워 질 것입니다.
우리가 의지하는 이 세상을
상이 아닌 이치로 보게 되면 모두가 긍정입니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자연의 질서를 존중하고
내 몸처럼 아낍니다. 더구나 불교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진실하고 소박한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우는데 있지 않습니까. 지고지순한 삶은
그 무엇보다 순리를 그르치지 않고, 속박당하지
않는데 있다고 봅니다. 부처의 삶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요.
Q :
남악선사가 마조에게
"수레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수레를 쳐야
하겠느냐, 소를 쳐야 하겠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조사의 선문답을 읽을 때면 공식
없는 수학문제에 직면한듯하여 생각이 더욱
복잡해집니다. 어떤 선지식은 ‘소를 쳐야지
무슨 소린가’라고 법문하였는데, 선문답은
과연 무엇을 얻기 위함이며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A : 꽃피고 종달새 높이 우는
이 좋은 시절에 봄나들이나 한번 하시지요.
그럼 소와 수레는 물론 소에 달라붙은 선지식도
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보너스로 맨땅에 그어놓은
금보다 더 보잘 것 없는 1700공안도 새벽안개처럼
사라져 본래면목이 확연할 것입니다.
만일 어떤 선지식이 '수레가
가지 않을 때는 당연히 소를 쳐야지’라고
법문하였다면 그는 아직 시주의 밥값은커녕
된장국에 소금 값도 못하는 자입니다. 조주의
無字화두를
들고 있다가 無無를 되뇌며 죽는 모습을
보고 그것이 오매일여라고 믿는 딱한 무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조주의 無는 대상이
없는 깨달음의 절대경지를 표현한
것이며, 無字를 화두로 삼는 중생의
無는 有의 저편일
뿐입니다.
불교는 중도사상을 겸비하는
교설이며, 중도를 원만히 증득한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 우리가 간절이 염원하는 해탈지견은 치우침이
없는 가치관 즉, 중도의 완성을 말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조사의 선문답은 중생의 편견과
아집을 끊어 즉시 중도정관을 정립시키는 상근기의
방편이자 깨우침의 묘약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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