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과 死- 3

 

“부처님은 왜 윤회를 강조했나요?”

윤회의 이해는 무여열반 준비 과정

<법보신문 컬럼/2004-04-14/751호>

Q : 얼마 전 라즈니쉬의 강의록을 읽었습니다. 그 후 죽음의 공포 때문에 잠자리에 드는 것이 두렵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우주에는 영원의 법칙이 있으며, 죽은 이후 인간은 결국 나를 있게 한 우주로 돌아갈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주로 되돌아갈 뿐이라면 붓다는 왜 윤회를 말했을까요?

A : 생자(生者)는 필멸(必滅)합니다.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어야하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오쇼 라즈니쉬의 우주관이 나오기 수천 년 전에 이미 불교에서는 인간의 인식여부에 상관없이 죽음 그 자체는 멸(滅)이 아니고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우주섭리의 한 과정일 뿐이라는 초과학적 우주관을 정립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낮은 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 진의(眞意)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태어난 자가 반드시 거쳐야 될 관문인 죽음은 인류가 이 지구상에 출현한 이후로 줄곧 공포의 대상으로 각색되어져 왔습니다. 필연적 죽음을 예감한 영악한 인간들은 허구인 절대신(絶對神)을 앞세운 후 그 허상에 매달려 구원을 받으려는 기복신앙을 만들어 내는가 하면 또, 어떤 부류들은 작위로 갖가지의 대상을 설정하여 거기에 의지하려는 허구적인 이면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본래성품을 보지 못하여, 다겁생간의 윤회과정에서 숙지된 ‘업(業)에너지’가 그들의 이성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 있을 때 성주괴공하는 존재의 실상을 올바로 수용하지 못한 무명(無明)의 정신인자인 업(業)은 주착(駐着)을 한 만큼 훈습을 키우고 그 훈습의 인(因)은 과보만큼의 연(緣)을 따라 유·무위법계를 윤회합니다. 이렇게 ‘업 에너지’가 그 성향에 상응하는 각양각색의 생명체로 변모하는 것을 윤회 또는 태어남(生)이라 합니다.

이러한 업은 삶을 “총체적인 인식의 장(場)”으로 보지 못하고 한 변에 치우친 집착에너지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또다시 윤회를 해야 될 습인(習因)을 남기게 됩니다. 즉 ‘업 에너지’는 ‘나’라는 생명체로 이 세상에 나타난 후 수많은 궤적들을 그리면서 다양한 양태로 변화하다가 삶을 지탱하는 조건들이 다하게 되면(생명 에너지의 소멸) ‘나’라고 주장하고 있던 ‘업 에너지’는 생명력과 이별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 앞에는 일생을 살면서 스스로 지어온 업종(業種)에 따라 여러 가지의 말기 현상들이 나타납니다. 즉 살아서 업을 완전히 정화시킨 사람은 업이 남아있지 않는 “무생(無生)의 경지”를 깨달아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로 향할 준비를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생명력 있을 때 집착(無明)에 사로잡혀 지내면서 남긴 착업으로 말미암아 그에 상응하는 윤회 길로 들어서야 하는 운명 앞에 놓여지게 됩니다. 이처럼 ‘업 에너지’가 각기 다른 모습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을 생사윤회 또는 업의 전이, 죽음이라고 합니다.

불교철학이 그렇듯 석가부처님의 윤회관은 존재의 생성소멸 법칙인 인연 연기현상을 있는 그대로 설한 것 뿐입니다. 엄연한 생사윤회(生死輪廻)의 우주섭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소중하고 위대한 나의 삶이 결국 구우일모(九牛一毛)가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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