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창

 

96. 정신세계 웰빙라이프 (2006년 6월호)
 

 

우곡선사가 살아온 과정과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 대한 대화가 먼저 있었습니다.(편집자)

* 답을 얻게 되신 것은 언제입니까?

94~95년경 창녕 화왕산, 청룡사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그 곳의 납승 한 분과 많은 얘기 중에 그분이 “내가 보는 책인데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데 거사님이 한번 보시면 알지 않겠냐.” 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 책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이었고 제가 처음으로 읽게 된 불교 경전이었지요. 보니까 “그래 맞아, 이거지! 이게 불교지! 날 설득시키려 하는 그건 ‘중교’지!” 이렇듯 육조단경 첫 장을 보니 바로 알겠는 거예요. 그때 그분이 그 책을 주신 겁니다.


창원에 가서 다시 육조단경을 보니까 내가 해결하지 못했던 것, 내면의 뭉클했던 것들이 터져 나오는 듯, 육조단경을 통해서 알겠는 거예요.

‘안 밖이 밝은 그 자체가 자성불인데 뭐 밖에서 구할게 어디 있는가. 달리 보아서 구하려고 했던 것이 문제였고 몸에 걸렸던 습이 내적 갈등의 원인이었구나.’

그 후에 육신도 나아지고 할 일이 없는 거예요. 그러나 더 근본적 문제는 해결이 안 되었지요.


* 그런 것들이 쉽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정신력입니다. 이유 없이 결과만 도출되고 일반적인 논리나 상식을 뛰어넘다 보니 세속적 관행이 따라오지 못하고 너무 거리가 머니까 일반적으론 실행을 못시키는 거죠. 이런 세계가 정신세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행시키기에는 시대적 제약이 아직은 있습니다. 이건 종교도 아니고 종교일 수 도 없고 종교란 카테고리에 묶여서는 이런 힘이 나올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힘의 원천은 불교정신이고 그것도 근본불교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의식행위나 종교의례라든지 막연한 신비에 사로잡히거나 기대가 있다거나 의문에 있는 상태에서는 이런 원론적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교에서 무심이란 말로 설명됩니다. 무심은 생각을 않는 것이 아닙니다. 능수능란하되 한 곳에 묶여있지 않고 그것에 저촉 받지 않는 마음의 힘, 자세, 능력을 저는 무심이라고 정의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오늘날 나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 그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계획되어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자율의지로 통한 것으로 보십니까?


자율의지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런 과정에 접어들게 된 어쩔 수 없는 프로그램이 있었다고 봅니다. 내가 사전에 불교와 관련되었던 것도 아니고 관심 있었던 것도 아니며 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어요.

내가 무역을 통해 5년간 세계를 다니면서 만행을 하게 된 동기가 세상을 보면서 그 땅과 환경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가치, 에너지의 모습이랄까, 에너지의 질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이 어떻게 발달해 갈 것 인가였죠. 이러한 환경 속에 사는 사람의 관습과 의식세계를 꿰뚫게 된 것이지요.

 

그것을 극명하게 느낀 곳이 소말리아와 근접한 케냐의 바링고 호수인데 지름이 300km정도 되는 곳입니다. 여기서 생활을 해보니 아무런 생각이 없더군요. 그 지역 사람들 눈을 보면 멍하니 어떤 의욕을 느낄 수 없어요. 흔히 말하는 무심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사실은 무기에 빠진 거지요.  이곳에서 땅과 하늘이 가진 기운의 영향을 받으면 인간이 이렇게도 되는구나하고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 역사적 시대적 사명이 있는데 그것에 대한 분명한 답을 못 찾았지만 현재는 지금하고 있는 것이 최선이니까 이 불교철학을 세상에 많이 보급하면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들어 지겠구나, 자기 갈등의 지옥 속에서 헤매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이 편안해 질 수 있겠구나! 그래서 제 경험을 토대로 교육이란 이름의 제도권 안에 들어오게 된 겁니다. 우리 불교철학을 보면 상당히 독창적이고 현실적입니다. 이런 것이 뒷받침되지 않는 수행은 무의미합니다. 수행만 하고 있을 때는 편안하게 느낄지 모르겠지만 다른 곳으로 눈만 돌리면 헛방이라는 것이죠.


불교 종교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집단이냐 하면, 물론 모두는 아니지만 부처님이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에 머리 깍은 사람들이 있고, 그 밑에 일반 불자들이 있다는 이상한 논리를 가지고 있어요. 이게 불교를 왜곡시키는 폐단이죠. 그런 관습을 받아들이면 수행은 끝난 겁니다. 아무리 닦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관습을 어떻게 타파할 것이냐, 누군가는 봉화를 올려야겠다, 그렇게 해서 지금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 기존 불교종단의 깨달음의 시각으로 보면 육신통은 어느 경지며 또는 누진통에 다달았는지로 우곡선사는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부분에 대해서 어느 경지에까지 도달했는지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육신통이라는 경계를 나누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보는데 억지로 인간의 정신영역의 한계를 나누다 보니까 그렇게 했다고 봅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공부하고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첫째 머리가 안 아프더라는 거죠. 두통, 편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어요.


저는 머리가 아프다는 개념 자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아요. 하지만 과거에는 안 그랬죠. 자기로부터, 육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과정에는 다달았죠. 육신에서 해방되는 과정을 얘기하자면 5가지로 말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어떤 번뇌도 나지 않는, 삿된 생각이 끓지 않는 마음의 힘이 겸비된 사람을 누진통에 이른 사람이라 정의 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봅니다.


우리는 테크닉을 전혀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숨 잘 쉬고 바른 눈으로 밝은 귀를 가지고 세상을 보고 듣고 바르게 표현하고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게 다가 아니겠습니까.

 

* 일반인이 우곡사이트를 보면 이런 질문이 생길 것 같습니다. 윤회輪廻가 있느냐 전생이 있느냐에 대해서 우곡선사께서는 없다고 표현하셨는데요.


해탈解脫하기 전에는 윤회의 굴레에 예속되어 있죠. 윤회라고 하는 것은 과거 경험의 의식에 묶여 있는 것이 윤회죠. 해탈이라는 것은 과거 경험했던 의식으로 부터의 초월이거든요. 그래서 윤회란 없는 것이죠.

 

* 그럼 이런 질문을 다시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세계의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육신이 있고 육신이 없어지더라도 자연으로 되돌아가고 영혼도 에너지의 집합체로 보는데 해탈했다고 해서 이 에너지의 집합체가 섞이지는 않을지언정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해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네 낱낱이 분해되어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거지요.


* 소위 말하는 해탈이라는 것은 의식이 있어서 한 것 아닙니까? 습에 엮이지 않아서 해탈한 것 아닙니까?


그렇죠.


* 그럼 해탈한 존재는 따로 모여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죠. 나는 이렇게 봅니다. 육신의 주인이라 보았을 때 정신이 동적 작용을 하는 것이 의식이고 그 역량에 맞추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 정의하면 해탈은 그 의식이 낱낱이 경험한 것에 바탕을 두고 밖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정확히 봄으로 의심이 남지 않아 그로 말미암아 주장할 이유가 없어져 버린 거지요. 해탈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경전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더군요. 유위의 해탈과 무위의 해탈이 있습니다. 몸이 있을 때의 해탈은 한계를 가지고 있으나 몸이 있을 때 집착하지 않는 의식에 구속당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몸이 없어져도 그것이 연속적으로 가서 무위의 해탈이 된다는 거죠.

그럼 무위의 열반, 해탈을 무엇이라 할 수 있느냐 하면, 우리의 의식이 어디로 갔나요, 따로 가는 세계가 있나요, 나는 아니라고 봐요. 의식이 있을 때 경험한 모든 것들의 대상이 무엇인가요, 변모하는 삼라만상의 이 세계다 이거죠. 지금도 그렇고 과거도 그랬고 이것으로 통해 의식이라는 정신체계를 갖추었는데 초월하게 되면 초월하는 대상,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 의식이 경험했던 곳으로 낱낱이 돌려줘 버린다는 겁니다. 회귀하는 것이지요. 이 돌아가는 세계를 나는 무위의 열반이라 합니다.


* 그럼 기존 불교경전에서 석가모니 부처가 전생에 부처였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몸을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해탈, 깨달아지기 위해서는 전생의 7가지의 삶의 공덕이 있어야만 깨달아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그럼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의 부처님은 깨친 부처가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이전의 부처는 깨친 부처가 아니라는 거죠. 바로 의인화시킨 부처의 행적을 통해서 그런 공덕이 쌓여야만 부처가 된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 과학적 사고로는 아래부터 중생으로 구성된 피라미드 구조에서 부처라는 꼭짓점의 아주 높은 단계를 향해서 올라가 부처가 되고 나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생이라는 아래의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도 가능할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등식만 바꾸면 정답 같은데요. ‘꼭짓점이 부처가 아니라 부처는 거꾸로 가장 낮은 지위와 가장 낮은 존재다.’로 바꾸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지닌 바가 없고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아야만 부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중생인데 달리 부처라는 등식을 만드는 데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 많은 수행자의 한계라고 봅니다.


* 그럼 현생에서 쌓은 복덕과 선업이 내생에 해탈하는데 과연 어떠한 보탬이 됩니까.


음. 선업에 대해서 문기자께서는 어떻게 정의를 내리십니까?


* 솔직히 정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선사께서 말씀하신 실상관법實像觀法에 시절인연에서 쌓은 악업을 결자해지結者解之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셨는데 인연이라는 관점에서 연결해보면 쌓는 선업도 인연의 결자해지의 요소가 아니라 인연의 끈을 늘려가는 원인으로 작용해서 결국은 해탈에 방해적 요소로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해탈의 기본적 원인은 선업이고 해탈까지 다다르기까지는 한 가지 매개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흑과 백을 분명히 관찰해서 속거나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객관적인 능력인 정신, 마음의 힘. 이것을 나는 ‘지혜’라 정의합니다. 이것을 미사여구로 표현하자면 맑다, 고요하다, 성스럽다, 아름답다, 위대하다고 표현하죠. 그 자체가 불성이라고도 표현합니다. 그렇지만 선업과 해탈의 과정에는 지혜가 있습니다. ‘선업을 쌓음으로 말미암아 지혜가 증득되고 지혜가 증득되어야 진정 집착에서 초월되는 해탈이 된다.’ 이런 등식을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 죽으면 지혜라는 것도 흩어지지 않습니까?


지혜 자체는 어떤 형상이 될 수가 없죠. 죽고 나서 지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윤회할 요소들이 줄어드는 거죠. 지혜가 완전히 밝아버리면 윤회 그 자체가 멸해 버린다는 거죠. 만약 지혜가 완전하지 못해 일부 윤회할 요소가 남았다면 다음에 또 윤회합니다. 완전히 지혜가 밝아서 어떤 것에도 현혹되지 않고 속지 않고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 마음의 평정이 된다면 윤회는 없습니다.


* 전생에 선업을 쌓고 지혜에 의해서 흩어지고 나서 내생의 어떤 존재로 태어난다고 했을 때 그러면 그 사람의 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결국 이 세상에 뿌려지는 것이군요.


그럼요.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가 그것을 내포합니다.

선업 그것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는 거죠. 개인적인 삶이 보다 큰 전체적인 삶과 일체동근임을 이해하고 동업중생을 위해서 마음을 내고 몸을 쓰는 이런 에너지의 비중이 많을 때 이것이 ‘선업善業’이라는 것입니다.


* 세계일화世界一花가 머리로는 이해되는 듯하지만 ‘나’라는 존재가 있고 나의 생각과 무관하게 움직이는 앞에 있는 ‘너’라는 존재에 대해서 ‘나’와 하나임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겠습니다.


원래 ‘너’라는 상대가 없는 거죠. 없어야죠. 단지 인연이고 필요에 의해서 방편들이 모인 것이지 만일 ‘나와 너’가 있다면 두 개가 존재하기 때문에 해탈은 멉니다. 단지 선과 악을 논하고 대소 명암을 논하는 이유는 제도의 측면에서 방편을 세우는 것이지 전체적인 것은 하나다는 것입니다.


* 많은 경전이나 제가 만난 선지식인 이란 분들의 말씀 중에 ‘나 이외는 허상이다.’라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내 의지와는 따로 행동하는 저 사람, 아! 그러면 저 사람도 나와 다른 독립된 존재구나, 그런데 어째서 나만 우주고 상대방은 우주가 아니라고 할까, 나와 저 사람이 밥을 먹는 걸로 봐도 똑같은 우주라는 것을 알겠는데 내 앞에 있는 너는 누군지 잘 모르겠습니다.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그것이 왜 그런가하면 업의 질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사람으로 보지 말고 인간 자체가 전생 업보의 결과로 보았을 때 업의 질이 달라서 그런 겁니다. 동쪽으로 가려는 성향의 업이 있지만, 서쪽으로 가려는 업도 있고, 가지 않으려는 업도 있습니다. 업의 결과를 개체로 보았을 때 그 개체에 따라서 각자가 가진 소양대로 뜻대로 하려는 의지가 있는데 그것이 유기적인 생물체입니다. 그렇게 보면 되는 것입니다.  “all 중생이고 all 부처다.” 각각의 다른 모습은 업이 그래서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볼 것인가. 불쌍하게 보아야 합니다. 이런 눈들이 자꾸 열려야 이타심이 확대되고 그런 쪽으로 마음을 씀으로써 성인이 되고 그런 결과가 지혜로서 드러나고 그 지혜가 팽창되는 만큼 윤회해야 할 요인이 줄어드는 겁니다.


*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경전과 진리대로 현실에서 믿고 따르며 그 진리에 꼭 맞게 행동하는 사람을 단 한명도 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진리가 있는 것일까요?


진리는 있지요.


* 그럼 그 진리라는 것은 인간이 행할 수 없는 것입니까?


천만에요! 인간도 진리 자체에 귀속되어 있고 진리의 구성원중 하나입니다. 단지 인간은 숫자나 상대를 세워서 또는 경전이 진리라는 스스로 만든 믿음에 의해서 틀에 끼워 맞추려니까 비 진리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경전은 단지 마음의 표현이고 숫자는 마음이 빚어내는 약속의 산물이라고 보면 그런 것에 속지 않습니다. 곧 진리적인 마음이 진리적인 삶입니다.


진리의 실상을 나는 이렇게 봅니다. 흔히 도가에서 이런 말을 합디다.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진리를 본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진리의 스승은 무엇이냐? 그것에 대한 답은 안 해 놓았더군요. 나는 진리의 스승을 이렇게 봅니다. 영위한 존재의 실상이다.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 자체가 진리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고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왜 뭐든지 못 깨닫겠습니까. 다만, 욕망을 따르고 과거 습의 노예가 되어서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고 희구하느라 그런 것입니다.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이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것에 순수가치를 새기지 못하고 나와의 이해관계에 비중을 두기 때문에 나와는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우리가 그 토대로써 세상을 봄으로 말미암아 직시되고 즉각 통찰하게 된다는 것인데 그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진리가 그런 것이라면 진리가 있고 실제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상식이 있는데 진리와 상식은 실제 삶 속에서 구분되고 상반되지 않습니까?


상식은 인간이 의지로 빚어내는 약속의 산물이고 경험이지 그것을 진리라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 진리를 마음이라고 정의하시는 겁니까?


나는 진리를 마음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일반사람들은 이 마음 저 마음을 논하지만 삼라만상이 우주 대자연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너졌다가 보이다 보이지 않았다는 하는 것 그 자체가 진리인데, 단지 경전이나 성인들의 말씀만을 진리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이러한 진리의 실상을 먼저 경험하고 경험한 바를 보편적 논리로서 표현했을 뿐인 것입니다.


* 다른 얘기를 하면 우곡선사께서는 우리나라 불교종단을 상대로 해서 살아남은 유일한 개인이라고 평가합니다. 선사께서 주장하셨던 많은 부분이 지금은 대다수 불교 종단에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정법은 종단이나 무리와는 무관합니다. 우곡선원의 실상관법에 대해 대표적인 불교종단의 관심과 그 효과에 지금은 실상관법이 공식적으로 불교수행의 한 축으로 자리잡아 소개되고 있습니다. 기성 불교종단들도 지금은 많이 변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에 도와 깨달음에 대해 또 논할 기회가 된다면 그때 참석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네, 기꺼이 참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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