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창

 

94. 정신세계 웰빙 라이프(2006년 05월호)

 

 

도담도론 道談道論

 

[기사예고]

정신세계원에서는 매월 "선지식인과의 대화"를 통해 깨달음에 대한 보편적 또는 날카로운 질문들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자 하여 우곡 장명화 선사를 첫 인물로 다음호에 그와의 깨달음에 대한 대담을 개제할 예정이다.

-편집자-

 

 

정도(正道)로 가는 길

글/牛谷선사

우곡 장명화 선사는 삼대 째 카톨릭 신자로 1991년 가을 밀양 사자평에서 우연히 불교와 인연을 맺고 간경화 말기의 육신을 이끌고 1992년 3월 동해안 한 콘도에서 환상과 빛을 겪으며 깨달음을 얻고 그 후 3년 동안 각지의 고승과 각 종교의 선지식인을 만나며, 또 자연을 통해 만행하며 자신을 검증한 선지식인이다.

 

정도(正道)는 결국 바다와 같은 것이고, 수행이란 유연한 물과 같은 성품을 다듬기 위한 과정이다. 구름과 수증기처럼 하늘에 떠다니는 미세한 물방울 모습의 물도 있고 땅 밑을 흐르는 수맥과 같은 물도 있다. 그리고 깊은 산골에서 발원하여 맑게 흐르는 옥계수도 있으며 시내를 이루고 강의 모습으로 흐르는 대하도 있다. 모든 물은 바다로 향하는 과정에 머물고 있는 모습이다.

 

바다는 뭇 수중 생명을 포용하며 삶의 보금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강제로 그 물을 먹게 하거나 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렇게 순리에 맡겨 둘 수 있는 성품이 곧 대도(大道)이며 대자비(大慈悲)다.

약수다, 생수다, 감로수다 하는 수식어를 사용하여 주의주장하고 나 또는 우리만이 특별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교만이며 아집이기 때문에 군자가 취할 바가 아니다. 이런 것들은 바다와 같은 무주상의 보시 공덕을 베푸는 자비하고는 거리가 먼 기복에서 나온 사술에 불과하다.

 

도(道)는 구해서 얻을 수가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 집 저 집, 이 산 저 계곡 헤매고 다니면서 용천하고 신통 부릴 수 있는 기법 수련한다고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하여 얻어질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바른 도리를 벗어나서는 아무것도 이룰 것이 없다. 특별한 무엇을 찾다보면 결국은 이 물도 저 물도 부정하고 또는 긍정하다가 결국에는 둘다 맞다라는 희미한 사고방식을 갖추어 이것이 사랑이고 자비라는 희극을 그려내게 된다.

도(道)의 성품은 바다와 같기에 약수다, 감로수다 하는 미사여구를 붙혀 구분하여 찍어 먹고, 떠서 먹고, 정수기로 걸러서 먹을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굳이 이것이 최고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술과 잡술을 부리려는 자들의 설두이기 때문에 바다와 같은 삶의 보금자리가 될 수 없다. ‘무엇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착각에서 온 환상일 뿐이다. 온몸과 정신이 현실에 몰입된 것이 정도(正道)이며 여여한 모습이다.

 

바다 속에도 뭇 생명이 안위를 얻어 살아가고 있듯이 집착을 놓고 번뇌를 끊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위에서도 대자유인이 되어 올바른 삶을 구가할 수 있다. 중도(中道)를 성립시킨다는 것은 자연현상과 일치한다. 대자연 법칙에서 한 치만 벗어나도 외도며 사술이다. 화려한 문자로 포장된 허상의 겉껍질을 붙잡아서는 결실을 거둘 수 없다. 봄에 씨종자 심었으면 김매고 노력하는 공덕을 쌓아 가을을 기다려야 한다.

 

타력에 의한 에너지를 붙잡고 이것이 무념무상이며 해탈이라고 한다면 그 인생은 거미줄에 걸린 연과 같고 만상으로 화한 마(魔)에 걸린 것이며 무기(無記)에 빠져 있는 모습과 같다. 정도(正道)는 선정삼매에 묶이지도 않고 생각을 끊는 것도 없으며 주의 주장할 것도 없다. 바다 속에 사는 생물은 그의 터전에서 일각이라도 멈출 수 없듯이 사람들이 바른 도를 구하려면 바다 속의 생물과 같이 일념으로 살아야 관념의 벽을 뛰어넘어 대자유에 이를 수 있다. 도(道)는 대자대비이다. 그 형상은 바다와 같기에 온몸으로 투신하여 취하지 않으면 물 밖을 그리워하는 어리석은 물고기 신세가 된다. 이것저것 구분하고 옳다, 그르다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겪은 이런 저런 과정들은 결국 바다를 향하는 강물이고 길을 걷는 나그네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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