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왜 이러나 - 49

 


<주간컬럼/2005-05-22>

Q : 인류사에 불교만큼 차원 높은 종교는 없다고 합니다. 불교진리는 정신을 기르고 인생을 올바로 경영할 수 있는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데도 불구하고 요즘은 절집이 푸닥거리하는 무당집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고요하고 정갈함이 생명인 절집에서는 목탁소리도 소음인데 북과 징을 곁들인 합주로 염불하고 천도하는 모습을 보면 좁쌀만큼 남아있던 신심마저 떨어지려고 합니다. 진리를 깨달아 마음의 힘을 기르는 불교다운 수행상은 오간데 없고 북과 징, 목탁소리에 신기 오른 중들 꽁무니에서 연신 절하며 복비는 아줌마들이 주류를 이루는 불교가 과연 이 첨단과학시대와 함께할 수 있을지 심히 염려스럽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승려들의 골프와 스키, 도박, 외화도피 등의 비리를 저지르는 꼴도 그렇고 말 같지도 않는 법문으로 불교진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수행풍토에서 어떻게 부처공부를 해야 합니까?

A : 석가부처님은 ‘깨달음에 의지할 뿐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구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법력은 듣기 좋은 말과 미려한 글, 높고 낮은 무늬가 아닙니다. 법을 표현하는데 있어 8만4천경전도 불완전한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존상과 언어, 감각에 의지하고 속세를 탐하는 말세 중들에게서 법의 향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에 불교진리를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중은 중노릇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일 뿐이지 불교진리를 증득하고 실천하는 부처님의 적자라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사마외도는 삭발한 중 같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 생각과 행동이 불법도리(佛法道理)에서 어긋난 인간을 말합니다. 팔풍이 분분한 세간을 벗어난 깨달음도 없거니와 해탈열반도 없습니다. 가출수행을 출세나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하는 정신결핍아들이 대세를 이루는 불교는 시대의 걸림돌이고 혹세무민의 온상이 되기 마련입니다. 깨달음은 해박한 불교지식이나 선(善)하고 즐거운 사유(思惟)가 아니라 놓고 비우고 버릴 수밖에 없는 경계를 넘어 그 어디에도 주할 수 없는 절대고독의 경지에서 벼가 익듯 인고의 보살행을 통하여 정각(正覺)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백년도 못 지닐 하찮은 몸뚱어리를 불도량에 의탁한 것을 출세로 여기는 부류는 부처를 팔아먹는 장사꾼이며, 영원한 빚쟁이에 불과합니다.

현실과 괴리된 수행은 6겁을 고행하여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실패로 끝난 석가부처님의 6년 가출수행은 일상(日常)이 도(道)라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몸소 시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상을 짓는 것은 불교진리를 올바로 알아듣고 실천할 수 없는 근기이기 때문입니다. 출가는 잠시 병원에 입원하여 허약한 심신을 북돋는 것과 다르지 않아야 하며, 천륜을 배반하고 장기입원이 천직인 무리들에게 부처되는 것은 그림의 떡입니다. 더구나 논밭 팔아 중노릇 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방궁을 꾸미고 주색잡기와 도박, 사치와 향락 등을 일삼는 것은 분명 부처님 재산을 횡령한 도적입니다. 불자들의 정성어린 시주를 쌈짓돈으로 여기는 고질병도 문제이지만 중 위에 부처님인 것으로 생각하는 무지몽매한 재가불자들도 불교위상을 추락시키는데 단단히 한 몫 하는 것입니다. 부처공부는 무늬를 숭배하고 불의를 묵인하는 바보노름이 아니라 생사(生死) 없는 불교진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의롭고 절제된 삶 속에 부처님의 지혜가 깃드는 이치를 깨닫고 실천하는데 있습니다. 사바중생은 덧없는 속세의 욕망을 쫓지만 자성(自性)을 본 사람은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허망한 중생놀음을 미련 없이 떨쳐버립니다. 무늬로 위장한 마왕의 자손들이 곳곳에 은처(隱妻) 둔처(屯妻)를 두고 절집을 사기업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묵인하는 어리석은 불자들이 대세를 이루는한 불교중흥은 물론 부처공부는 요원합니다.

재가불자들이 산사를 찾는 것은 고요 속에서 소욕지족 하는 단순한 생활방식과 절제된 행복을 배우고 느끼려는 욕구가 무엇보다 크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탐대실을 자초하는 사찰 입장료는 절집을 원숭이 우리로 연상하게 하고, 법당에서 쿵쾅거리는 북소리 징소리는 무당집과 다르지 않는 판국에 실다운 부처공부는 사막에서 바늘찾기입니다. 불교는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숭고한 종교이며 절집은 불법에 의지하여 심신을 기르고 무상을 깨닫는 그야말로 도량이며 고요가 생명입니다. 정(淨)은 망상의 원수이듯 부처 맛인 무심을 체험한바가 없으면 환상의 집을 짓고 요란스럽고 어지러운 상에 기대는 것을 불교수행으로 삼기 마련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 바로 위에 부처가 존재하는 것처럼 중들을 받들어 모시라고 말하는 몰상식한 중들이 절집 주인행세를 하는 불교문중에 부처공부는 소멸된지 오래입니다. 부처되는 공덕을 굳이 모습으로 논하자면 삭발염의는 단 3분이면 되지만 석가부처님같이 머리를 기르려면 최소 6개월은 온갖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무상(無相)이 본분인 불조의 가르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지만 척박한 토양으로 말미암아 불(佛)씨를 뿌릴 수 없는 것이 말법시대입니다. 불벼락을 맞듯 불종자(佛種子)를 얻고 이타행으로 중생습기를 없애는 구도(求道)와 정각(正覺)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는 불도는 연륜에 상관없이 공염불이고 절집은 해탈법의 본가가 아니라 마구니 소굴과 다르지 않습니다.

중국의 신행선사는 "일체의 마음자리가 없음을 성스러운 길이라 이름하고, 무심한 존재세계(法) 가운데서 망령되이 분별을 일으킴을 번뇌(煩惱)라 한다. 도(道)를 향하는 마음(道心)은 분별하는 생각(念)이 없으므로 도를 향하는 마음이라 하고, 마음자리에 형상이 없기 때문에 도심이라 한다. 보리심을 일으킨 사람은 공(空)하여 상(相) 없는 마음을 바르게 일으켜 상 없음을 갈고 닦으니 도를 닦는다고 하는 것이지 예불하고 독송하는 종교의식을 도 닦는다고 하지 않는다. 선악(善惡)은 이름도 형상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치면 도 닦는다고 하며, 욕심내고(貪) 성내고(瞋) 어리석음(痴)에 형상이 없음을 깨달으면 보리[菩提]다."라고 반듯한 불교공부를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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