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과 고목한암 - 48

 


<주간컬럼/2005-04-24>

Q : 마음을 찾는 것이 불교공부라고 말합니다. 늘거나 줄지 않는 것이 마음이라면 그런 마음을 알든 모르든 무슨 상관이며, 각박한 세상살이도 벅찬데 색깔도 맛도 무게도 없다는 마음을 굳이 찾아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A : 불교가 심법(心法)인 것은 속진에 물들기 이전의 근본마음을 찾는 것과 비례하여 생사해탈에 이르는 무심지혜를 증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지만물 일월성신이 제각각이 아닌 한 마음 작용임을 깨닫지 못하면 생사윤회를 면할 수 없는 업보중생이기 때문에 근본마음인 자성을 회복하여 대우주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려는 것입니다. 광대무변하고 어디서나 소소영영(昭昭靈靈)한 물건이 마음이지만 중생은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참 마음의 맛과 작용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참선공부로 내면의 힘을 갖춘다면 쓰고 거두어도 줄거나 손상되지 않는 마음을 자재로 운용하는 대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근본마음은 유·무위법계에 걸림이 없어 사바세상 명리를 다 갖추어도 대자대비보살도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연기유전 하는 일체만법이 하나의 마음작용임을 깨우치면 해탈지혜를 가로막는 분별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애써 마음공부인 불도를 닦는 것입니다.

마음공부법을 경책한 조사어록 한 구절을 인용하면 어떤 중이 절 대문에도 ‘마음’이라 써 붙이고 창문과 벽은 물론 여기저기 온통 ‘마음’이라는 글씨를 붙여놓고 마음 찾는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본 법안선사께서 “문에는 ‘문’이라 쓰고, 창에는 ‘창’ 벽에는 ‘벽’이라고 쓰면 될 것을"이라고 하며 탄식한바 있습니다. 산속에 빠지면 산을 보지 못하듯 마음을 지니고 마음을 찾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지만 깨우침의 동기가 없는 마음공부는 미로를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8만4천 교설은 미로탈출을 위한 깨우침을 얻는 방편설입니다.

Q : 30년 동안 암자에서 수행하는 노승을 정성껏 시봉하던 공양주보살이 하루는 절에서 함께 사는 그의 딸로 하여금 "오늘은 저녁공양을 마친 뒤 주지스님의 무릎 위에 앉아 얼굴을 부비면서 `이럴 때 스님의 마음이 어떠십니까?`라고 여쭈어 보라고 하자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노승의 무릎 위에 앉아 스님의 마음을 묻자,
枯木倚寒巖 고목의한암
三冬無暖氣 삼동무난기
“마른 나무가 찬 바위에 기대니 삼동에 따뜻한 기운이 없도다.”
라는 송(頌)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 뜻은 '지난 30년 동안 나를 위해 시봉해 왔지만 너에게 특별한 생각이 따로 없다.'라는 마치 속세상을 초월한 높은 경지로 들리게 됩니다. 딸의 말을 전해들은 공양주보살은 "저런 속한을 30년 동안이나 시봉한 것이 참으로 분한 일이다"라고 탄식하고는 그 스님을 절에서 쫓아내고 절을 불살라 버렸다고 합니다. 보살의 딸이 스님에게 마음을 물었을 그때 어떻게 대답을 했어야 그 주지스님이 쫓겨나지도 않고 토굴도 불태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선문답에 고봉선사는 ‘용이 물을 얻은 듯, 호랑이가 산에 기댄 듯하다’라고 하였으며 혜월선사는 ‘너의 어미가 본래로 여인의 몸을 지었다고 딸에게 대답 하겠다’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근세 한국의 고승대덕들이 이런 장면에 외면하고 비꼬는 듯한 말을 하는 것이 그 어렵다는 공안타파이고 선지식의 진면목인지 궁금합니다.

A : 주지 무릎에 올라앉은 보살의 딸 이야기는 오랜 수도로 중생의 분별상이 떨어졌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근기를 알 수 있는 선문답이자 수행자의 안심을 가늠하는 경계점검입니다. 불세계인 삼법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다면 토굴의 노승과 그를 30년 동안 시봉하던 보살과 무릎에 올라앉은 그의 딸과 얽힐 수밖에 없는 분별중생의 감정에서 자유스럽지 못합니다. 해오(解悟)는 상대가 무엇이든 그것으로부터 일체 저촉 받지 않는 지극히 객관화된 사유체계를 말합니다. 고봉의 “용이 물을 얻은 듯 호랑이가 산에 기댄 듯하다”는 해제법문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감정적인 외면이기에 당연히 중생심의 발로이고 혜월의 “너의 어미가 원래 여인의 몸을 지었다고 무릎위의 딸에게 말 하겠다”라는 공안해제는 공양주보살이 감히 주지스님을 달아본 것에 저주가 깃든 독설에 불과합니다. 마음에 상(相)을 지니고 법(法)을 설하는 것은 뒷사람을 어지럽게 하는 것이라고 옛 선각자들이 누누이 강조하였지만 하룻강아지 부뚜막에 올라앉듯 삭발무늬만 갖추면 아무나 법상에 올라 먹물을 토하는 폐습이 해탈세계를 흐렸다고 봅니다.

만약 어느 누가 나에게 고목한암(枯木寒巖)에 대해서 굳이 묻는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절 주지가 30년을 시봉하던 공양주보살로부터 시험대에 올라야 할 정도라면 불문곡직하고 그간의 중노릇이 헛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목한암(枯木寒巖) 공안은 30년을 장좌불와해도 분별상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간의 시주 밥이 사약보다 더 무섭다는 것을 일러주는 경책이고 해탈인연이 없으면 내리 삼생을 닦아도 분별망상을 놓고 비우고 버릴 수 없는 사바중생의 숙명을 담고 있습니다. 거두절미하고 암주(庵主)의 일화에 정·부정하거나 감정이입하는 고불(古佛)이라면 그를 다시 한 번 장사 지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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