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와 돌지 않는 풍차 - 46

 


<주간컬럼/2005-04-03>

Q : 삼매가 무엇입니까? 삼매에 들면 어떤 느낌입니까. 삼매경지에 들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이나 방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불교수행에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염불과 경전강의 화두로 삼매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며, 불교진리를 가르치는 강백은 모두 무심삼매에 들어 설법을 하는 것입니까? 특히 해인삼매가 삼매의 핵심처럼 불리는데 궁금합니다.

A : 삼매(三昧)는 진리(眞理)의 맛이며 무심지혜의 원천입니다. 무명(無明)을 헤쳐 제법연기실상과 하나 된 성성적적(惺惺寂寂)한 마음을 삼매라 할 것입니다. 탐욕과 분별, 의심이 마음바탕에 꼼지락거린다면 팔만사천경전을 모두 익히고 백년을 가부좌해도 삼매에 들지 못합니다. 현실을 등지고 가만히 앉은 삼매는 없듯 생사가 겹치는 사바세상을 뒹굴어도 마음의 고요가 흩뜨려지지 않는 경지가 삼매입니다. 신구의 삼업을 다스린 힘이 삼매의 맛을 일깨워줄 것입니다. 선정삼매(禪定三昧) 일행삼매(一行三昧) 일상삼매(一相三昧) 진여삼매(眞如三昧) 등 마음의 고요와 맑음을 수많은 이름의 삼매로 부르지만 뜻은 동일합니다. 몰록 밝아 탐착에 사로잡힌 소아에서 벗어나면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삼매경지입니다. 참회와 헌신, 성찰로 불타의 삶에 자신을 비추지 않으면 빛, 소리, 호흡을 통한 마음 찾기는 물론 그 어떤 수행방법으로도 삼매경지에 들지 못합니다. 삼매는 무심지혜의 초석이기에 해탈인연이 닿지 않으면 아무리 닦아도 오리무중입니다. 삼매는 문자와 소리, 감각에 주하지 않습니다. 색(色)과 공(空)에도 걸림 없는 대문처럼 생사유전 하는 일체만유의 들고남에도 무심한 마음이 삼매입니다.

해탈지혜는 삼매의 텃밭에서 피어나는 우담바라입니다. 청정심의 회복이 바로 삼매이기에 모든 불자들은 삼매를 염원하지만 촌음도 놓치지 않는 기민한 정신력이 참 삼매임을 잘 알지 못합니다. 불교는 지극한 현실이고 인과가 분명한 과학적 기반 위에 존립합니다. 오늘날 정(定)과 혜(慧)를 나눈 남방의 사마타(samatha)와 위빠싸나(vipassana)를 석가부처님의 수행법과 삼매로 연결 짓는 것은 말법시대의 비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요한 즐거움을 위하여 조금씩 천천히 감각에 의지하고 환각적인 정(靜)을 지키려는 불교수행은 벽지불은커녕 성문 연각에도 이르지 못합니다. 참선수행의 나침반과 같은 육조단경에서 정(定)과 혜(慧)는 법의 근본으로 정은 혜의 몸이요, 혜는 곧 정의 씀이니 정과 혜가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미혹의 소치라고 강조한 것을 볼 때 지금 같은 말법시에 삼매경지는 아득합니다. 마음에 상을 지니고 설법하지 말라는 불조사의 엄중한 지침에 입각한 법사가 아니라면 불교학을 가르치는 강사라고 봐야합니다.

삼매의 원명은 산스크리트어로 사마디(Samadh)로 부르지만 선(禪)의 다른 이름으로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는 정신력 즉 일심경성(一心境性)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음을 한곳에 모아 움직이지 않고 마음을 평정하게 유지하기 때문에 등지(等持) 정심행처(正心行處)등으로 삼매를 의역하지만 삼매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고 동사섭(同事攝)하되 흐트러지지 않는 정(定)차원이어야 마땅합니다. 불교학에서는 자아나 사물이 공(空)임을 깨닫는 공삼매, 공이기 때문에 차별의 특징이 없음을 관찰하는 무상삼매(無相三昧), 무상이기 때문에 원해서 구할 것이 없음을 관찰하는 무원삼매(無願三昧)등으로 나누며 대승불교에서는 108삼매를 말하기도 합니다. 또 삼매를 설명하는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과 관불삼매(觀佛三昧)라 하여 불타를 마음에 떠올리면 불타가 현전하는 것을 수행으로 삼는 무지몽매한 삼매도 있습니다. 해인삼매(海印三昧)를 모든 삼매의 근본이라 말하는 것은 파도같이 밀려오는 번뇌망상이 그치면 삼라만상의 진면목이 맑은 거울을 보듯 뚜렷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만 아차하면 해인삼매가 고요와 맑음의 결정이 아니라 전생업장을 보는 점쟁이 경지로 해석되기 딱 알맞습니다.

삼매는 별스런 방법이 아니라 세상만유가 성스럽고 지극히 감사한 마음이 그 초석입니다. 또한 삼매는 탐욕중생을 극기한 마음의 터전에 소생시킨 오묘한 경지로서 지옥과 극락을 들락거려도 맑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옆 사람 꿈이 영상처럼 마음거울에 비추어지기도 합니다. 나와 연기유전 하는 제법실상과의 일체성이 삼매의 본래면목이듯 삼법인을 뛰어넘지 못하였다면 삼세를 비추는 삼매경은 그림의 떡입니다. 왜냐하면 참 삼매는 알음알이 수증으로 다가갈 영역이 아니라 먼저 깨닫고 증득하는 무한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청산옥수도 고이면 썩듯 해인삼매라는 이름을 껴안고 때를 묻히지 않으려 아무리 애써도 스스로 기(氣)를 운행하는 의식의 해방이 아니라면 그냥 이끼삼매이고 돌지 않은 풍차일 뿐입니다.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