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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 앞 잣나무와 간시궐- 43
<주간컬럼/2005-02-06>
Q :
어떤 납자가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조주에게 물었더니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서쪽에서 왔다는 달마조사의 행간을 물었는데 ‘뜰 앞에 잣나무’라고 대답한 조주스님의 말은 일반적인 상식과 논리를 벗어난 코미디이고 우문답 같은데 이 말이 무엇 때문에 조계문중의 핵심공부인 화두가 되고 세간에 회자되는지 궁금합니다.
A :
여하시조사서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를 물었을 그때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를 보고 있지 않고 젓가락으로 콩나물을 집고 있었다면 아마도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라고 말하지 않고 ‘콩나물이다’라고 말하였을 것입니다. 서쪽에서 왔다는 조사는 주지하다시피 보리달마를 뜻합니다. 질문자의 의도는 인도의 중이 낙양에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가였지만 조주는 ‘뜰 앞에 잣나무’라고 하여 질문자의 알음알이를 차단하였던 것입니다. 선(禪)은 과거 미래 현재는 물론 언어마저 끊어진 오로지 찰라 뿐이거늘 무심도리를 터득한 조주가 죽은 과거영상을 좇는 흐릿한 중생과 뜻을 같이 하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각자(覺者)는 사바중생과 시대는 공유하나 결코 뜻은 같이하지 않습니다.
“개[狗子]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무(無)”라고 말한 조주는 유무상대를 뛰어넘은 경지를 ‘무’라고 표현한듯한데 난 조주의 객기로 봅니다. 중국 남송의 무문관 공안48칙 중에 제1총칙인 조주의 무(無)를 종문의 일관이라 부르고 이 일관을 뚫으면 역대 조사와 나란히 한다고 기술한데서 조주의 무(無)를 분별망상을 퇴치하는 몽둥이로 세웠지만 교학으로는 실책입니다. 왜냐면 처처가 불(佛)이듯 불성(佛性)을 인연법으로 보지 않는다면 불법(佛法)에 대한 모독입니다. 조주록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 후반부에 ‘화상이시여 저는 특정한 대상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조주 왈 ‘나도 특정한 대상을 일러준 것이 아닐세.’ 그래도 다시 묻기를 “대체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하자 역시 “뜰 앞에 잣나무”라고 함으로서 이 잣나무(栢樹子)가 무자(無字)와 함께 조계의 대표적인 화두로 존속하지만 마음에 새기는 화두문자로는 결코 상대분별상을 여의지 못합니다. 살불살조(殺佛殺祖)가 아닌 무념무상은 없습니다.
해오(解悟)로 본래면목이 확연하면 분별중생일 때는 일상적이었던 언어가 얼마나 빈약한 구조였던가를 알고 활용하되 말과 글에 묶이지 않습니다. 사물을 표현하는 도구로 발달된 언어가 근본마음을 구사하는데 있어 불완전한 도구라는 것을 체감함으로서 화두에 속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언어는 인간사회에서 습득한 지식의 표현방법으로서 의사소통에 일정한 규약을 공유할 것을 묵시적으로 요청하고 개념화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존재의 본질과 하나 된, 즉 선(禪)의 이치를 체득한 사람은 상징적인 말과 글 이전인 본성을 사유하고 관(觀)합니다.
석가세존께서도 문자로서 해탈법의 본체를 삼지 않았던 것은 말과 문자는 해탈진리를 일러주는 적절한 도구가 못 된다는 것을 통감한 바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화미소로 이심전심법의 이치를 터득한 가섭이 불조의 정법안장 열반묘심(正法眼藏 涅般妙心)을 이어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심도리를 깨닫는 것은 시절인연이며 해오자는 스스로 호법신장이 됩니다. 해탈에 이르는 길은 여하한 수단과 방법이 아니라 지극한 신심과 처절한 절박함입니다. 만일 불교수행관이 이와 같지 않다면 아직 업보중생임을 자인하고 진참회로 재 발심함이 정도입니다. 조주의 ‘뜰 앞의 잣나무’는 찰나에 즉(卽)하는 것이 바로 구경묘각이며 처처가 佛임을 일러주는 선각자의 사자후입니다.
Q :
한 납자가 운문선사에게 “부처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운문선사는 "간시궐"이라고 대답하였다는 이 말이 왜 화두이고 우곡선원도 화두를 잡습니까?
A :
간시궐은 우리말로 똥 막대기입니다. 옛날 중국의 해우소에는 긴 팽이처럼 나무를 깎아 만든 막대기를 사용하여 뒤처리를 하였던 모양입니다. 운문선사가 이런 똥 막대기를 들고 화장실을 나서는 그때 어떤 중이 “부처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응 그래 부처는 이거 똥 막대기야”라고 처처가 불(佛)임을 일러주었던 선문답입니다. 만약 이때 부처가 무엇이냐고 물은 납자가 지저분한 똥 막대기라는 선입견을 버리고 즉심(卽心)이 진불(眞佛)임을 일러준 운문선사의 선법(禪法)과 계합하였다면 크게 한 소식하였을 것입니다.
부처는 상대분별상이 없는 무상한 마음입니다. 불교는 마음공부법이고 마음은 더럽고 깨끗함이 없습니다. 운문선사는 손에 들고 있던 이 “똥 막대기가 바로 부처다”라고 부처를 묻는 질문자에게 부처의 진실상을 일러준 것은 삼라만상이 모두 마음작용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문명이 번창하는 21세기 인간들이 왜 죽은 화두문자를 염염하며 인생을 낭비하는지가 오히려 화두입니다. 똥 막대기에 걸리지 않는 무아(無我)가 되려면 알음알이 여우꾀가 아닌 이심전심이 필연이듯 불도수행은 곧 무심인연을 맞이하기 위한 가상한 노력입니다. 나는 이 사바세상 모두 화두 아닌 것이 없어 따로 앞세울 화두가 없습니다. 따라서 본 우곡선원은 문자화두를 공부로 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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