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의 삶- 41

 


<주간컬럼/2005-01-23>

Q : 불교수행은 깨우침을 통한 해탈열반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방에는 깨달음을 위한 여러 가지 수행방법이 있고 제각각 최선의 방편을 가지고 공부를 하지만 그 효과에서는 의문이 많습니다. 해탈의 참뜻과 어떻게 하면 크게 깨달아 해탈열반에 들 수 있습니까?

A : 해탈(解脫)은 열반(涅槃)과 같은 말로써 적멸(寂滅) 또는 멸도(滅度), 결박에서 벗어난 경지인 원적(圓寂), 깨달음의 완성이라고도 말하지만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는 門을 통과한 사람을 뜻하는 것입니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에서 오는 감정적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심해탈(心解脫)이라하고 편견과 독단으로부터 벗어나는 지혜해탈(慧解脫)로 세분하기도 합니다. 깨우침과 해탈이 중생의 마지막 꿈이지만 수행방법에 연연하거나 이해득실을 따지는 지식적인 불교공부는 아니함만 못합니다. 변명과 의심, 자기합리화를 도모하는 근성이 마음바탕에 남아 있다면 불교공부를 할 것이 아니라, 뼈가 녹고 살이 터지는 고행으로 교만스런 아(我)를 먼저 죽여야 할 것입니다. 해탈지혜는 잡식을 동원하여 상대방에 끼워 맞추려는 잔꾀가 아니라 연기유전하는 제법실상과 나란히 하는 불세계(佛世界)에서 바라보는 지극히 객관적인 통찰력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이지만 각자(覺者)를 통하여 영생의 삶을 배우고 사회도덕이 실천되는 인류공동의 가치가 더 크기 때문에 참사람답지 않는 깨달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해탈문(解脫門)에 들어서는 것은 보고 듣고 느껴 세밀히 아는 관(觀)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믿음과 확신으로 그냥 통(通)할 수 있는 마음이여야 합니다. 능히 알고 많이 안다는 생각은 과거에 안주하는 것으로써 돈오에 크나큰 장애입니다. 근본으로 회귀하는 깨우침에 있어 앞세우는 것이 있다면 정각(正覺)이 아닌 식견(識見)입니다. 무념무상(無念無想)은 삼계(三界)에 머물지 않는 마음이듯 보고 듣고 느껴 알았던 것을 모두 내려놓는 힘이 있어야만 마주치는 세상이 바로 극락임을 통감하는 해탈의 삶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머리에 새긴 먹물과 구원, 이적을 앞세우면 시작과 동시에 막히고 쓸수록 앎이 줄어든 갈애로 말미암아 현실과 멀어지는 것은 엉터리 부처공부가 원죄입니다. 牛谷禪院은 매주 천지이치를 들어 보이는 참선법회를 마치면「오늘 공부한 것을 모두 이 자리에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부처마저 버린 무욕으로 물 흐르듯 순리를 따르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보다 소중하게 다가온다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큰 기쁨이며 그것이 실다운 해탈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진해탈의 비법은 무엇보다 먼저 인간다워야 하며, 부지불식간에 불연(佛緣)으로부터 찰나와 어긋나지 않는 무심씨앗을 전수받는 것뿐이기에 정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근본성품을 보아도 기르고 덕을 쌓아 구경각을 이루는 것은 인고를 동반한 자신의 몫이며, 일념정진 만행(萬行)으로 유 · 무위법계를 회통하여 이생에 일을 다 마치려면 바깥경계에 마음이 빼앗길 여유가 없습니다. 분별과 집착이 얼마나 무익하고 불합리한 것인가를 절실히 깨닫는 것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자의 미덕에서 나오며 그로부터 차츰 무한역량인 무심으로 회귀합니다. 중생은 복잡한 생각이 곧 반연의 끈 인줄 잘 모르기 때문에 다람쥐 쳇바퀴 돌듯 윤회전생하며 좁쌀 같은 앎마저 쌓고 잃느라 내 앞을 가로막는 상을 무너뜨릴 온전한 힘을 지니지 못하는 것입니다.

해탈지혜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무심에서 나옵니다. 부처마음인 무심은 학습효과가 아니라 뼈에 사무치는 인고로 덧없는 속세의 욕망을 녹여버림으로써 터득한 밝은 안목이며, 심법을 운용하는 창조적인 역량입니다. 이해타산과 시비분별이 능한 지적부자와 탐욕스런 졸부에게 부처의 깨달음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시절인연으로 분별과 탐착이 떨어지면 대낮처럼 환하면서도 마치 캄캄한 밤중을 걷는 사람처럼 벌어짐이 없어 상이 남지 않고 그러므로 업에 걸리지 않는 해탈의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이생에 유여해탈에 이르지 못하면 무위법계의 해탈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불교진리를 깨닫는 것은 속 세상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것이기에 유 · 무정은 물론 그 어디에도 의지처가 없습니다. 몸은 사바세상과 함께하면서도 뜻은 함께 하지 않는 절대고독의 삶이 참다운 깨달음이고 해탈열반세계로의 입성이라 할 것입니다.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