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不二門- 38
<주간컬럼/2005-01-02>
Q :
不二門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유마경의 入不二法門품에 32보살이 등장하여 불이법에 대한 제각각의 견해를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특히 보인수 보살은 "涅槃을 바라는 것과 世間을 바라지 않는 것과는 둘이지만, 만약 깨달음을 바라지 않고 세간을 싫어하지 않으면 곧바로 두 대립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속박[煩惱]이 있으므로 깨달음이 있는 것이며, 본래부터 속박이 없으면 해방을 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속박도 없고 해방도 없으면 바라는 일도 싫어하는 일도 없는 것이 절대 평등한 경지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유마경에서 말하는 不二法門과 대립을 벗어난 절대평등경지는 무엇입니까?
A :
不二門이란 不二法門의 준말로써 상대와 차별이 끊어진 절대적 진리세계인 佛國土로 들어서는 門을 말하며 諸法이 不二인 이치를 일러주는 것이 佛道이므로 法이라 하는 것입니다. 역대 모든 제불보살이 이 不二法에 의하여 진리세계로 들어갔지만 미혹중생은 무심을 맛본 바가 없기 때문에 제법실상이 둘 아니라는 말은 알아듣지만 한 번에 툭 트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8만4천 교설 모두가 둘 아닌 법을 깨닫는 즉, 不二法에 들어가는 門이며 바라밀공덕으로 상구보리를 증득하는 가르침입니다. 특히 유마거사를 통하여 불교진리를 실사구시 하는 유마경은 한 편의 아름다운 대서사시로써 佛法의 진면목을 가감 없이 엿볼 수 있게 하는 참으로 귀중한 경전이지만 지금처럼
상을 쫓는 말법시대는 뜻을 제대로 아는 者가 희소합니다. 후반부에 불이문에 들어선 32보살이 제각각 말하는 不二法門편은 공과 색, 삶과 죽음, 부처와 중생, 번뇌와 지혜가 둘 아닌 이치를 열어 보이는 유마경의 압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둘로 나누어진 상태를 생사윤회라 하고 삶과 죽음이 둘 아님을 깨달은 경지를 해탈열반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분별식이 떨어져 삶과 죽음이 하나인 이치에 닿게 되면 생사와 열반, 번뇌와 지혜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출렁이는 바다의 파도를 번뇌라 하고 괴로운 번뇌를 내쫓기 위해서 파도를 없애려한다면 그것은 不二法이 아니라 중생계의 상대법에 걸려있는 것입니다. 번뇌라는 파도가 그대로 바닷물임을 터득할 때 번뇌와 지혜가 둘이 아닌 근본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절대평등경지인 것입니다. 이렇듯 佛法은 애써 번뇌를 여의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번뇌가 곧 지혜임을 발견하고 지혜가 바로 번뇌의 활용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특히 보인수 보살이 말하는 절대평등경지는 산을 깎아 골을 메우는 유위적인 수평개념이 아니라 쌍으로 존재하는 어느 한편을 탐착하거나 부정하여 배척하지 않을 때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번뇌가 그치고 업장에 휘둘리지 않는 해탈열반세계를 일컫습니다. 四相이 六境을 뒤덮으면 비추임과 작용이 어긋나 생각 생각이 부자연스럽고 의심과
번민으로 식견마저 줄어들어 갈수록 몸과 마음이 수고로워집니다. 신심명에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있으면 하늘과 땅 만큼 벌어진다.”라고 하였듯이 상대적 이원론으로는 불이문을 넘어 불국토인 절대평등경지에 이르지 못합니다.
空과 色에도 구애받지 않는 물과 같은 성품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不二法이며 진정한 평등경지를 이루었다 할 것입니다. 물은 비와 구름이 되고, 차가운 얼음으로, 달빛 머금은 맑고 고요한 호수로, 드넓은 바다로 세상
온갖 찌꺼기를 쓸어 담으며, 때론 큰배를 집어삼키는 파도로 그 작용과 역할이 변화무쌍하지만 물이라는 본성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불이법문과 절대평등경지에 대한 논리적 이해의 접근보다는 참 사람됨에 입각한 삶을 실천하는 입전수수(入纏垂手)가 진정한 不二法이며 위없는 절대평등경지일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