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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과 법 그리고 불교- 36
<주간컬럼/2004-12-19>
Q :
부처님과 법에 있어서 부처님이 앞입니까, 법이 앞입니까? 만약 법이 앞이라고 하면 법은 어떻게 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이며, 만약 부처님이 법보다 앞이라고 하면 어떤 가르침을 이어 받아서 불도를 이루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에 대주혜해선사는 "부처님은 법보다 앞에 있기도 하고 법의 뒤에 있기도 하느니라." "어찌하여 부처와 법에 앞뒤가 있습니까?" 만약 寂滅法에 의하면 법이 앞이요 부처님이 뒤이며, 文字法에 의거하면 부처님이 앞이요 법은 뒤이니라. 왜냐하면 일체 모든 부처님이 모두 적멸법에 의해서 성불을 했으므로 곧 법이 앞이요 부처님은 뒤이니, 경에서 이르기를 '모든 부처님의 스승됨은 이른바 법이다'고 하였느니라. 성도하고 나서 비로소 십이부경을 널리 설하여 중생을 인도하여 교화하시니 중생이 부처님 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수행하여 성불하므로 곧 부처님이 앞이요 법은 뒤인 것이니라. 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A :
부처님과 법을 전후로 나누려는 것은
佛과 法을 유위상으로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나 음성으로는 부처의
진면목을 보거나 眞法을 깨닫지 못합니다. 생명체에서 공기를 따로 떼어 낼 수 없듯이 부처님과 법은 동체대비입니다. 無相은 시시비비를 논하고 뒤집거나 구겨져도 그대로 부처님의 눈이고 마음입니다. 心眼으로서만이 전후를 나누거나 어느 한편에 의지하는 속물이 아닌 그냥 “할 뿐”인 참 진리세계에 들 수 있습니다. 진실 그자체가 법이라면 진실한 법을 중생에게 들어 보인 사람을 부처님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성주괴공 생주이멸 하는 자연의 섭리가 변치 않는 진실이지만 탐욕중생은 자신이 자연의 순리에 소속된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임의로 앞세우고 탐하기 때문에 집착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아직도 진실한 부처가 안 되는 것입니다. 문자는 일시적인 방편일 뿐 자신이 직접 부닥쳐 전율하듯 진실과 사실,
순수의 위대함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낄 때 부처님과 법이 둘 아님을 직접 깨달아 분별이 없는 절대 평등성지에 들 수 있을 것입니다.
Q :
불교는 차등이 있을 수 없는 평등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공부를 하는 모든 사람은 마땅히 평등법에 입각하여 불교를 이해하고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만큼 인간적인 차별이 심한 종교도 없을 듯합니다. 무엇이 큰지도 알 수 없는 온통 큰스님 판에 스님과 일반 불자들과의 차별상은 물론 절이 그들만의 아방궁 같아 누구나 쉽게 다가가 마음을 쉴 수 있는 불교
본래의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높고 낮은 승려들이 마치
주주회사 사장, 사원같은 형세를 하고 그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어리석은
신도들로 구성된 신종 인간차별종교가
불교로 보이는데 이게 불교 맞습니까?
A :
천제(闡提)는 천생을 닦아도 부처가 못됩니다. 왜냐하면 自性이
佛임을 믿어 깨닫지 못하고
밖으로 의지하여 빌어 구하려는 하열한
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교는
속세의 평등논리마저 초월한
無相, 無住, 無心의 부처님 가르침이 불멸의
中心인 것입니다. 시대적 역할과 인간행세가 여법할 수 없는 가출자의 표리부동한
身·口·意가 결코
불교의 중심일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불교는 추종자
무리인 신도라는 말이 있을 수
없거니와 높고 낮음의 계급종교도
아닙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이 우바새, 사부대중은
공히 평등한 불자로서 교단을 이루며 그 어떤 사회적
신분과 직위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교단을 이루는 데 있어 단지 성과 처소가 다르고 행색이 다르며 맡은 바 소임이 다를 뿐입니다. 우리 절, 우리 스님으로 나누고 그들을 미화 포장하여 옹립하는 작태는 말세불교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지적부자와
호의호식에 젖어있는 사람은 부처님의
정법을 깨칠 수 없습니다. 출세간의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이 높고 낮은 계급사회를 형성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한 결과로서 절집을 사업장으로 제가불자를
봉으로 여긴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출가자가
교단의 지위를 누리려는 것과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는 십만팔천리로 벌어진 어리석음 입니다.
장아함경 유행경에 석가부처님은
"아난다여, 만약 내가 비구승가의 지도자라든가 비구승가가 내게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최후를 당해 비구승가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아난다여, 나는 비구승가의 지도자도 아니며, 또한 비구승가가 내게 의지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난다야, 나는 최후를 당해서도 비구승가에 대해 할 말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정의 하였습니다.
제 좋아서 삭발하고 비단가사로 목탁반주에 의지하는 업을 탓할 바는 아니지만 그것이 정통이고 정법이라는 생각과 행동은 자가당착이고 애처로운 짝사랑입니다. 無明이 짙은 중생은 상(相)과 음성, 환(幻)을 의지처로
삼지만 정도를 걷는 보살은 또렷한 안목으로 佛道를 어지럽히는 外道, 邪道를 제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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