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하기와 용맹정진- 35

 


<주간컬럼/2004-12-12>

Q : 불자들은 불상은 물론 일주문에서부터 불탑과 멀리 법당지붕만 봐도 합장하여 절을 합니다. 불상이나 여러 보살상 등에 절하는 모습 때문에 이교도로부터 무정물에 절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절하는 것은 꼭 부처님에 대한 공경뿐만이 아닐 것 같지만 뜻을 확실히 알면 신심을 북돋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용맹정진은 왜 하는 것입니까? 靜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참선에서 용맹정진이라는 말은 어색하게 들리고 특히 우곡선원에서 용맹정진과 만행수행을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A : 至誠이면 感天이라는 옛 말씀처럼 세상에 공들이지 않고 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더구나 절[拜]은 부처님에 대한 공경뿐만 아니라 윗사람이나 상대방에게 몸과 마음으로 존중을 표시하는 것이지만 절을 잘함으로써 下心과 참회를 이끌어 내고 신뢰의 토대를 쌓게 됩니다. 불자들이 법당지붕만 보아도 절을 하는 것은 불도량에 대한 공경심의 발로이기도 하지만 진심으로 머리숙여 절을 하게 되면 아만이 줄고 인내심과 건강을 북돋고 겸손이 몸에 배는 등, 부차적으로 많은 이로움이 따릅니다. 더구나 지속적인 108배는 희비애락에 휘청거리는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는 아주 간편하고 효과적인 수행이기도 합니다.

마음그릇이 낮고 깨끗이 비워져야만 지혜와 복력이 담기는 이치는 변함이 없습니다. 평소 절을 잘 안 하는 사람은 아만심이 강하고 겸손함이 모자라 신뢰를 얻기 어렵습니다. 또한 교만이 떨어지지 않아 일을 도모하는데 장애가 많으며 생각이 혼탁하고 건강상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반대로 절을 잘 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자기를 낮추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뜻하는 바가 잘 성취됩니다. 그리고 불자들이 무턱대고 무정물에 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부처 즉, 自性佛에 절하는 것이며, 절은 무명업식에 가려진 自我를 구출하기 위한 진실한 몸짓이기도 합니다.

禪定과 智慧가 해탈열반의 조건이듯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닦는 것이 참선수행이고 부처공부입니다. 牛谷禪院은 현실을 등지지 않는 보편적인 일상에서 주경야독으로 진리를 깨닫는 그야말로 참선수행력을 날마다 점검하고 실사구시 하는 진정한 불도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사다난한 현실생활 속에서 여법한 부처공부를 한다는 것은 남다른 용기와 믿음을 요구합니다. 정법수행으로 체득한 정진력으로 현실과 마주하며 그 속에서 깨닫고 희망적인 인생을 설계하는 牛谷의 참선공부야 말로 역대 불조사가 서원하던 불국정토의 시발점이라 할 것입니다. 법에는 이곳과 저곳이 따로 없습니다. 현실을 등진 寂滅은 無記이며, 팔만사천 제불보살이 등장하는 현란한 설법은 다함께 손잡고 몽환경속을 헤매자는 먹물중생의 넋두리일 뿐입니다. 극락은 별스런 모습이나 염원으로는 닿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에 집착하고 욕망에 집착하여 근심걱정을 만드는 것이 중생입니다. 용맹정진은 탐욕을 끊고 운명의 창조를 도모하는 것이며, 고정관념을 뛰어넘으려는 그야말로 용맹심의 결정판인 것입니다. 중생은 관습의 노예와 같아 일정한 테두리속의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숙세의 죄업과 현생에 길들여진 잘못된 생각과 그릇된 행동을 바로세우지 못합니다. 正直과 헌신이 覺性의 근본입니다. 본받음과 자극이 없으면 일상이 방만하고 행동이 나태해지기 때문에 참회와 발원, 맹세가 쉬 깨어져 원이 성취되기 어렵습니다. 도반과 함께하는 용맹정진은 육신의 고통과 마음의 유혹을 이기는 특별한 수행이며, 인고의 힘으로 각오와 맹세를 굳건히 하여 원을 성취시키려는 각별한 노력의 일환이기도 합니다. 수미산 淸淨水도 고이면 썩습니다. 牛谷禪院의 용맹정진과 만행수행은 속진을 초월한 대자연을 무대로 때와 장소, 시운을 읽고 靜과 動을 숙지하는 참선공부의 백미이자, 가시를 쓸어안는 바람으로 그물에 걸리지 않는 물처럼 살려는 성스러운 한마당 축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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