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제 아제 바라아제- 32

 


<주간컬럼/2004-11-21>

Q : 깨우침을 위한 욕망을 놓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불자라야만 깨닫는 것입니까. 깨달음이 평상심의 회복이라면 보편적인 생활 속에서도 깨칠 수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할 것 같은데 왜 깨닫기 위해서 선지식인연이 있어야 하고 출가와 경계체험을 말합니까. 어떻게 하면 선지식을 만날 수 있고 피안의 언덕에 오를 수 있습니까?

A : 불자만이 깨달을 수 있고 불교수행을 깨달음의 필수코스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깨달음은 불교가 태동하기 이전이고 시절인연이 닿으면 누구나 깨닫지만 참 사람답지 않은 깨우침은 없기에 불도를 닦습니다. 돈오는 신통스런 재주가 아니라 전생공덕이 지혜로 태동하는 출출세이지만 그로부터 중생습기를 소멸하는 보임과 궁극의 열반적정은 피 말리는 인고의 세월을 요구합니다. 업보중생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영원한 자유는 지식이나 재능으로 불가하기에 해탈지혜를 갖춘 선지식인연은 필수입니다. 독각(獨覺)이 아니라면 스스로는 무념무상에 이르지 못하듯 선지식에 의한 무심 맛을 모르는 깨우침은 없습니다.

불교는 우리보다 먼저 깨우침을 얻고 해탈열반에 이른 불타의 인생철학을 집대성한 정명경입니다. 무명업장에서 놓여나는 각성(覺性)은 불교를 잘 이해하는 지적능력이 아닌 신구의 삼업을 다스린 문사수가 바탕입니다. 제법실상을 내 몸처럼 알고 느끼는 즉 오온(五蘊)이 상대법과 부대끼지 않는 성성하고 오묘한 경지로의 첫 입문이 돈오(頓悟)입니다. 독야청청한 깨달음이 우후죽순처럼 불쑥 돋아나면 좋으련만 닦지 않은 부처 달마가 없듯 일체중생은 전생업보로 생사가 겹치는 이 사바세계에 몸을 받았기에 불연이 아니면 생사윤회에서 놓여나지 못합니다. 중생숙업을 제도한 원력만큼이 반야이며 반야지혜의 힘으로 생사를 벗어나는 묘법이 바로 불도입니다.

저 피안의 세계에 이르는 출발점은 개오(開悟)이지만 한 번의 깨우침만으로 열반의 언덕에 도달되는 법은 없습니다. 등각지에 이르기까지는 전생습기가 소멸되는 수없이 많은 고비가 있습니다. 해탈법의 정수인 반야부가 석가세존의 성도17년 이후 설법인 것을 헤아려보면 반야지혜가 완연한 열반은 온갖 풍파를 겪은 가을의 결실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속진에 살면서 그 어떤 명리에도 가치부여가 되지 않는 삭막한 단절의 벽을 넘어야만 비로소 드러나는 가느다란 피안의 세계가 너무나 야박하여 피눈물을 쏟기도 합니다. 유. 무위의 경계지점은 등잔불이 꺼질듯 말듯 아슬아슬한 틈새로 간간이 번뜩이는 반야가 아니라면 불연의 끈을 놓고 외도사마의 자손이 됩니다. 지금시대는 성실한 주경야독이 옛사람의 두타행과 다름없기에 온갖 난관이 닥쳐도 신심을 잃지 않는 것이 전생업장을 녹이고 반야지혜를 키우는 밑거름입니다.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나 모르는 것이 없으며 보지 못하나 못 보는 것이 없는 것이 무심반야이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사람 같지만 허공에 불꽃처럼 건립하는 법력의 진면목은 상상 그 이상입니다.

부처공부는 문자나 소리 느낌을 따르고 안락한 당처를 찾는 영악한 셈법이 아닙니다. 생사이해가 상충하는 삼계를 뒹굴어도 일체 마음의 동요가 없는 무아경지에 이르기 위한 것이 부처공부입니다. 임제선사는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않는 사람은 신령을 보고 귀신소리를 듣는 것을 공부로 삼는데 이런 무리들은 시주의 밥값을 청산하느라 반드시 염라대왕 앞에서 뜨거운 쇳물을 삼킬 날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의로움을 불도의 첫 번째로 두었습니다. 참 사람다움을 겸비한 불제자가 마주치는 지금 이 순간 이 찰나가 바로 불(佛)이며 달리 구하여 얻을 그 어디에도 법은 없습니다. 색(色)과 공(空)에 즉(卽)하고 범부(凡夫)와 성인(聖人)에 즉(卽)하는 것이 반야이고 정도입니다.

매서운 추위가 매화를 향기롭게 하듯 해탈지혜가 고통보다 더 고통스러움을 요구하는 것은 심식(心識)에 깃든 다생간의 전생업장이 낱낱이 뜯기는 경계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해탈진리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는 불도는 천생을 내리 닦아도 생사경계가 없는 피안에 이르지 못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지식은 등잔에 불을 밝히듯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제법실상을 요해하는 반야지혜의 눈을 뜨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세상만사를 꿰뚫은 진리의 맛을 처음 접하는 개오(開悟)의 환희지는 자기 자신의 힘이 아니기에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일체법이 무상하고 무아이며 덧없는 것임을 영혼에 새기는 보임과정에 믿음과 확신이 부족하면 색공(色空)의 중간지대에 머물거나 처방전이 없는 중생으로 되돌아갑니다. 십지보살도 한순간에 속물중생으로 떨어지는 것이 해탈세계입니다. 사바중생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해탈세계는 그 무엇과도 짝하지 않는 적멸(寂滅)의 길이며 절대고독의 삶입니다.

우리는 부처가 되려고 야심찬 중생노름을 접고 절대고독의 길인 불도를 닦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불(佛)씨를 지닌 선지식인연을 찾아 반야지혜를 가리는 마장을 조복 받는데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불(佛)은 삼계에 물들지 않는 마음의 힘이며 선지식은 업보중생의 심연에 불(佛)을 밝히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로부터 차츰 반야지혜가 드러나면 지금 여기 삼라만상이 성스러운 불(佛)임을 체득하는 참 사람의 덕목이 갖추어집니다. 코로나 역병으로 인한 지구촌의 대 환란은 지식정보화시대를 넘어 차원이 다른 심체면역체계와 영성을 갖춘 참 사람이 선도하는 새로운 세상이 될 것이기에 다함께 가자는 자비서원이 아제 아제 바라아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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