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오리와 장항아리 셋- 24

 


<주간컬럼/2004-09-19>

Q : 마조스님이 백장과 길을 걷다 들오리 떼를 보고 백장에게 물었다. “저게 무엇인가?”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갈까?” -날아갔습니다. 그러자 마조스님은 갑자기 백장의 코를 비틀며 “어디 다시 한 번 날아갔다고 말해보라.” 백장은 그 말끝에 느낀 바가 있어 거처로 돌아와 대성통곡을 하니 어떤 시자가 물었다. “부모 생각 때문인가?” -아니. “누구에게 욕이라도 들었는가?” -아니 “그렇다면 왜 우는가?” -마조스님께 코를 비틀렸으나 철저하게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깨닫지 못하였는가?” -마조스님께 직접 물어보게. 그 시자가 마조스님께 묻기를 “백장이 왜 깨닫지 못했습니까? 거처에서 통곡을 하면서 스님께 물어보라 합니다.” 마조스님은 “그가 알 테니 그에게 묻도록 하라.” 그 시자가 요사채로 되돌아와서 말하기를, “마조스님께서는 그대가 알 것이라 하시며 나더러 그대에게 물어라 하셨네.” 여기서 백장이 깔깔 웃자 그 시자가 말하기를, “조금 전에 대성통곡을 하더니 무엇 때문에 금방 웃는가?” -조금 전에 울었지만 지금은 웃네. 그 시자는 그저 멍할 뿐이었다. 라는 일화가 있는데 도대체 이런 선문답이 백장의 깨달음하고 무슨 상관입니까?

A : 깨달음은 찰나, 즉 살며 마주치는 유·무위 일체법과 벌어지지 않는 기민함을 말합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순간을 놓치면 삶의 틈새가 벌어지고 멈추면 퇴보하는 것이 정신입니다. 말과 문자로 익힌 식견과 기억의 창고에서 불러오기 화면인 알음알이로는 찰나와 계합하는 무아(無我)를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마조가 백장을 대동한 것입니다. 해탈진리의 보고인 대자연에서 표면의식인 제7 말뢰야식에 저장된 업장을 순수의식으로 정화해야만 심층의식인 제8 아뢰야식이 맑아집니다. 제 8식은 저승으로 가져갈 삶의 결과물이자 내생을 결정할 단서입니다. 더 넓고 순수한 인간성을 위한 만행수행과 즐거움을 찾는 산천경개 유희는 그 의미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입니다. 전생숙업이 소멸된 무아는 최상의 인격체로서 자비헌신과 대승적인 사고가 체화되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들판의 오리가 날아가든 말든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들오리에 마음을 빼앗긴 백장을 마조가 코를 비틀며 일깨워 주었지만 각성의 기회를 놓쳤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던 것입니다.

이생에 할 일을 다 마치려는 발심이 뜻을 성취하기 전까지는 한 번의 들숨과 날숨간격이 천리만리처럼 느껴집니다. 과거 미래는 물론 현재심마저도 끊어진 순간이 곧 영원임을 자각하기 위하여 불도를 닦는데 줄탁의 개오찬스를 놓쳤으니 피눈물이 날만도 하였을 것입니다. 백장의 처지를 알 수없는 도반이 강아지처럼 왔다 갔다 하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반면교사가 되어 들오리에 빼앗겼던 자아를 재발견한 겁니다. 스승인 마조를 통하여 동기부여가 주어졌지만 그 순간 학철대오 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와중에 도반이 미진한 끄트머리를 일깨워 주었으니 한바탕 춤이라도 추고 싶었을 겁니다. 순간순간을 또렷이 자각하는 일상이 위없는 돈오경계이며 삼신사지 육신통의 무진보배를 갖추는 것입니다. 왕대밭에 왕대가 나듯 하루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라는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을 몸소 실천한 백장회해선사의 평범한 개오경계를 통하여 깨우침이 결코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Q : 마조스님이 사람을 시켜 백장의 산문에 편지와 간장 세항아리를 보내오자 백장선사는 법당 앞에 쭉 늘여놓으라 하고는 상당하여 대중에게 장항아리를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말을 바로 한다면 부수지 않겠지만 못하면 부수겠다." 아무도 대꾸가 없자 백장스님은 그 자리에서 장항아리 셋을 모두 깨트려버리고 방장실로 들어갔다는데 이게 무슨 도리입니까?

A : 간장항아리를 박살내는 것뿐만 아니라 식충이들이 우글거리는 방구들을 파 뒤집어 버리지 않았던 것은 백장선사의 실책입니다. 지금을 보면 과정을 알 수 있듯 촌각을 다투며 정진하지 않는 숨 쉬는 시체들에게 시주 밥 거두어 먹이는 것은 불전에 누를 끼치는 행위입니다. 대중들이 법당 앞에 늘어트려 놓은 간장항아리 앞에서 우물쭈물한다는 것은 호기심과 의심 등 분별중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반증입니다. 품성이 잘 갖추어진 사람은 아무데서나 밥을 먹지 않듯 비록 스승 마조가 보내준 귀중한 간장일지라도 장항아리는 마땅히 장독대에 있어야 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백장선사가 한마디 일러라 하면 법당 앞에 세워놓은 장항아리로 뭘 어쩔 겁니까. 대중가운데 조금이라도 의식이 깨어있는 중이 있었다면 스승의 말뜻을 헤아릴 것이 아니라 장항아리를 달랑 들어 장독대에 옮겨놓았을 겁니다. 행동하는 참선 해탈진리를 실천하는 실사구시는 보편적인 일상에서 벗어난 특별한 언행이 아닙니다. 당면문제에 능수능란하고 이치에 밝은 즉사즉리(卽事卽理)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활구법입니다. 중들이 사리에 맞는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자갈밭에 빈 수레 굴러가듯 머리만 굴리고 있었다는 것은 껍데기만 중일뿐 속물중생 그대로라는 증거입니다. 백장선사가 애꿎은 간장항아리만 박살낼게 아니라 모조리,,그때 누가 죽은 화두문자로 말대꾸를 하였다면 아마 사지가 성치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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