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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와 계율 그리고 직업- 23
<주간컬럼/2004-09-12>
Q :
시골에서 축산농장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생활여건상 우곡선원에 나가서 법문 듣고 마음공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불교는 육식을 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축산업을 하고 있어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불자로서 살생을 하지 말라는 계율을 생각하면 내 직업이 마치 죄를 짓는 것 같은 생각이 떠나질 않습니다. 이런 업은 무엇인지요?
A :
열린 눈으로 보면 처처가 불상이고 삶의 현장 모두가 도량이기에 부처공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밖에 부처 없듯 현실과 이격되지 않는 그 마음이 바로 불(佛)이며 진실상입니다. 건전한 생업을 특정 종교교리에 대입하는 것은 모순이며 특히 출가자의 계율과 결부시키는 것은 자가당착입니다. 낚시같이 취미로 살생을 즐기는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라면 하루 수천의 가축을 도살하여도 생업에 의한 정당한 행위는 결코 죄업이 될 수 없습니다. 불교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반토막짜리나 무소유심을 잘못 이해하는 가난뱅이 양성소가 아닙니다. 축산업으로 인류에게 고품위 먹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자리이타의 보살행이며 육식을 하지 말라는 출가자의 계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날 비구의 250계율은 석가부처님 열반이후 방만한 출가자들을 위한 수행지침서가 집대성된 것입니다. 불제자가 육식과 오신채를 멀리하는 것은 자유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소욕지족 하라는 말씀은 있어도 무엇을 먹지 말라는 법이 따로 없습니다. 검소하고 정당한 의·식·주로 올바른 가치관을 확립하는 것이 정법수행이고 제불(諸佛)의 뜻입니다.
대자유인으로 생사를 희롱하는 해탈의 법은 천지에 가득하지만 놓고 비우고 버린 마음그릇이 아니면 결코 받아 지니지 못합니다. 정법에 의한 불도는 말법세상 종교관행을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무심지혜를 증득하여 천지만물 일제처에 걸림 없는 원만보살이 될 수 있느냐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탐착중생은 섭취하는 음식에 따라 몸과 정신이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출가자들에게 고기와 오신채를 금하는 계율이 있는 것입니다. 소중한 음식도 누가 먹느냐에 따라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합니다. 영롱한 새벽이슬도 젖소가 먹으면 우유를 생산하지만 독사가 먹으면 맹독이 되는 이치입니다. 산중에서 놀고먹는 주제도 과한데 뱃속에 개기름이 들어차면 선정은커녕 삿된 기운만 뻗치기 때문에 계율을 만들어 엄히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겁니다.
석가부처님의 성도와 생사해탈법은 오늘날의 불교라는 종교와 출가자들의 계율이 만들어지기 이전입니다. 계율을 부처공부로 삼는 것은 영악한 말세중생의 성정이 삿되고 혼탁하여 무상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며 정법이 소멸된 반증입니다. 계율을 법으로 삼는 시대가 말법세상이고 바로 지금입니다. 참 인간다워야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은 불문가지이기에 훈육적인 계율로 날뛰는 중생심을 조복 받게 하는 것이 바로 지계입니다. 석가부처님은 성도 후 줄곧 거리의 탁발로 연명하셨다고 합니다. 석가세존께서 저자거리에서 탁발할 때 음식을 제공하는 시주에게 고기와 오신채는 빼라고 분별하지 않았을 것임이 자명한 것은 6년 설산 고행 후 수자타의 우유죽으로 기력을 회복한 일상일 때 보리수 아래서 성도한 이야기가 대변합니다. 시주은혜로 연명하는 출가자가 석가부처님을 앞세워 편히 앉아 얻어먹는 것도 민망할 처지에 자신들의 생활지침서인 계율로 세상을 기망하면 득도는커녕 뿔난 망아지도 못됩니다. 특히 이런 무늬를 흠모하고 말과 글에 묶인 부처공부는 삼생을 닦아도 남의 것을 흉내 내는 원숭이를 면할 수 없습니다. 법주사 대웅전 계단의 돌 원숭이와 강화 전등사 법당 지붕을 떠받치는 원숭이가 지금의 나와 어떻게 다른가를 잘 성찰하면 해법이 보일 겁니다.
이 세상에 인간 몸 받은 것은 자비공덕을 쌓고 반야지혜로 숙업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부여받은 행운입니다. 만일 자비헌신으로 공덕을 쌓지 못하면 인간으로 누리고 부린 삶이 통째로 업장이기에 탐착을 극기한 순수성 회복을 위한 가르침이 불도입니다. 부처를 유가의 도덕군자에 빗대는 것은 생사에 걸림 없는 대자유인의 삶 해탈성불에 대한 모독입니다. 부처는 계를 지니지도 않고 지킬 계율도 없습니다. 단생에 체(體)와 용(用)을 겸비하는 해탈성불은 천복을 타고 나야 합니다. 먼저 깨닫고 중생훈습을 끊는 경우와 계율수행으로 고행을 전제로 하느냐의 차이는 극명합니다. 정법에 의한 참선수행이 천세를 이어갈 공덕인 것은 자기 중생을 극기한 힘은 염라대왕도 어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절인연이 닿아 돈오(頓悟)를 하였어도 평상심이 도(道)임을 체득하기까지는 처절한 경계로 전생훈습을 낱낱이 끊어내는 인고를 수반합니다. 깨우침과 열반해탈에 이르는 것은 세간의 지식과 밥 힘이 아니라 전생공력의 결과입니다. 중생근성이 남아있는 반야지혜도 성불도 없기에 살아서 상대세계가 없는 저승길의 절대고독을 미리 경험하는 것이 정도이고 불도입니다.
참 사람 답지 않는 깨달음은 없듯 불교의 계율은 육신에 깃든 중생습기를 조복 받는 애달픈 방편입니다. 특히 출가자의 율장을 부처공부의 왕도로 여겼기 때문에 축산업에 회의감을 가졌던 것입니다. 축산업은 생명을 번식시키고 관리하는 고등산업으로서 성품이 어질지 않으면 자본과 기술만으로는 도전할 수 없는 직업입니다. 부처와 아무 상관없는 절집계율 같은 것은 내려놓고 축산업으로 국가경제와 인류사회 건강증진에 일조하는 것이 중생구제를 위한 보살의 실천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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