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유와 도- 19

 


<주간컬럼/2004-08-15>

Q :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을 읽고 고민이 늘었습니다.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이 최선이며 행복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지고 누리는 물질은 모두 불행의 씨앗이라는 것인지? 특히 요즘 어떤 승려는 외국의 일류대학을 나온 간판을 이용하여 개인적인 치부와 호의호식하는 것이 알려져 불교의 무소유 논쟁이 한창인데 도대체 무소유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A : 불교의 깨우침과 해탈은 이해관계가 선명한 현실을 등지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무소유 논쟁은 해탈자의 무소유심과 유무상대의 물질적 무소유를 혼동한 것입니다. 자성(自性)이라는 근본마음은 따로 세우는 당처가 없어 속세상의 소유와 무소유라는 이분법은 해당사항이 아닙니다. 심의식이 유무상대에 집착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남으로써 무심지혜가 생겨나고 생사윤회를 그치는 심오한 이치의 가르침이 불교입니다. 세상을 모두 다 가졌으나 마음에 걸림이 없다면 그는 무소유심이며 마음에 헌 바늘 한 개라도 지님이 있다면 아직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 중생입니다.

한때 세간에 회자되었던 무소유이야기는 기르던 난을 포기한 구도자의 담담한 소회이지 해탈자의 무심도 아니거니와 상대분별을 벗어난 무소유심의 정의가 아닙니다. 출가의 본질은 무소유처 무소유심에 이르기 위한 것이기에 걸식과 분소의로 물질에 집착하는 마음의 짐을 덜어 심신을 가볍게 하는 계율실천은 불도의 기본입니다. 승려가 토굴에서 기르던 난초화분이 성가시어 없애버렸다면 물질적인 소유가 줄어든 것이지 무소유심은 아닙니다. 무소유심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주착하지 않는 마음을 일컫습니다. 일체중생의 근본마음은 늘거나 줄지 않는 질량불변의 우주 삼라만상을 다 담고 있기에 물질의 유무에 저촉받지 않습니다. 애지중지하던 난을 포기하니 마음에 여백이 생기고 홀가분해졌다면 그 만큼의 무소유 진가를 맛본 것으로 마음공부에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불법(佛法)은 소유와 무소유를 탓하지 않습니다. 단지 마음 앞에 그 무엇이든 가려진 해탈지혜는 없기에 시대는 공유하나 상대에 집착하지 않는 무소유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만유는 인간의 전유물일 수 없다는 진실상에 비추면 물질은 소유가 아니라 잠시 위탁받은 것이고 관리책임이 주어진 인간불사도구일 뿐입니다. 말세중생이 물질에 예속되지 않는 도리를 깨닫는 것은 천지개벽과 다르지 않기에 불도는 동기부여의 일대사인연을 맞이하기 위한 갸륵한 헌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불교는 물질의 유무를 나누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무(無)를 선택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무소유심은 마음에 아무것도 담아두지 않는 텅 빈 공적(空寂)을 일컫습니다. 영원한 자유 무념무상에 이르기 위해서는 안팎으로 헤아릴 수 없는 무소유를 경험해야 합니다. 해탈에 이르는 여정은 어쩔 수 없어 스스로 놓고 비우고 버린 무소유와 영혼에 각인된 무명업장을 몽땅 빼앗겨 버린 처절한 무소유 체험이 유, 무위법에 물들지 않는 등각지입니다. 물질에 집착하는 중생심이든 영혼에 새겨진 전생업장이든 근본마음을 가린 습기가 완전히 사라진 지점을 굳이 유위법으로 표현하면 무소유라 할 것입니다.

불교공부는 무소유 실천 의지와 다르지 않습니다. 삭발염의한 자가 속물중생의 영악한 셈법과 영합하여 호의호식하는 것은 부처를 팔아먹는 전문직업인이지 불제자가 아닙니다. 달랑 몸뚱이 하나로 절에 들어온 비천한자들이 치부하며 막행막식하는 삭발원숭이가 큰 중노릇하는 시대가 지금 같은 말세입니다. 출가사문의 엄격한 계율실천은 업장소멸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자 신선한 보시공덕인데 그런 반듯한 출가자를 난 아직 듣고 본바가 없습니다. 전생업장소멸 없이는 그 어떤 학식과 권위로도 무소유처 무소유심에 이를 수 없습니다. 생사고락이 없는 평정심은 산을 깎아 골을 메우는 개념이 아니듯 무소유심은 당처가 없기에 참 사람답지 않다면 해당사항이 아닙니다.

Q : 불교에서 '道는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를 내려놓으면 수행하기가 훨씬 편할 것 같은데 막무가내로 도는 불립문자 언어도단 이라고 하니 갈수록 어렵기만 합니다. 선지식들이 깨달은 바를 논리적으로 자세히 설명해놓으면 좀 더 쉽게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요?

A : 분별망상이 걷어져 통(通)하면 천지가 도(道)임을 통감하기 때문에 ‘도는 이런 것이다’라고 꼭 집어 따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명의는 세상에 약 아닌 것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이것만이 약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덧없는 속진세상을 탐착한 업보로 천지사방이 도라는 사실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것은 시절인연이 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리와 이치에 밝은 도통이 말과 문자로 될 것 같으면 영악한 인간들이 해탈세계를 독점하여 매표장사를 할 것입니다. 천만다행으로 피안의 세계는 속세의 빼어난 역량과는 상관없으며 똑똑한 육안으로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천지사방이 도임을 깨달을 때까지는 8만4천의 허물을 벗어야 합니다. 여름 한 철 노래하며 살다죽는 매미도 땅속에서 일곱 번 등짝이 터진 결과이듯 도통은 저승형벌을 치룬자의 몫입니다. 불도수행이 살아서 저승관문을 통과하는 여정인 것은 성불을 가로막는 원인이 전생업장임을 알기에 이 사바세상 모든 가치관과 단절하는 고행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부귀영화를 일구는 출중한 식견도 내려놓지 못하면 해탈지혜를 가로막는 업장소멸에 장애가 됩니다. 도통은 전생업장이 소멸된 자유로운 영혼의 행로이기에 정해진 법칙이 없습니다. 따라서 선각자가 8만4천 비유설로 인간완성의 길인 도(道)를 일러주는 것이 바로 불교이지만 통(通)하는 것은 천차만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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