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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일과 기도- 18
<주간컬럼/2004-08-08>
Q :
산속에 있는 유명한 사찰 대부분은 절 입구에서 돈을 받고 있습니다. 재가불자들이 절을 찾는 이유는 전문적인 불교공부보다 세속잡사에서 잠시 벗어나 몸과 마음을 정화하려는 것이 대다수일 겁니다. 부처님은 무욕의 삶을 말씀하셨고 절도 그런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면 불자에게 왜 돈을 받습니까? 절 입구에서부터 마음을 다치는 불자가 절에서 무엇을 보고 배울 수 있겠습니까. 통행세를 낸다는 불유쾌한 기분은 금액의 과다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법당에서 조용히 참회정진하고 싶어도 법당에 진을 치고 기도티켓 장사하는 보살을 보면 소름이 돋고 불심이 멀어집니다. 불교가 이래도 되는 겁니까?
A :
석가부처님의 적손은 불도량의 길을 가로막고 돈을 요구할 정도로 뻔뻔스럽지 않습니다. 두타의 삶을 위하여 산에 들어가 사는데 돈에 집착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출가사문은 의·식·주를 넉넉히 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기 때문에 욕망이 들끓는 속세로부터 초연할 수 있습니다. 절에 들어오는 불자를 상대로 길 막고 돈을 요구하는 것은 소욕지족 하라는 가르침을 믿지 않거나 부처를 빙자한 사마외도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길 막고 돈 못 받아 부처되는데 지장이 있다면 구차스런 중노릇을 걷어치우면 그날로 성불합니다.
옛 말씀에 내 집 들어오는 길 막고 돈 받는 인간치고 망하지 않는 놈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도 출세간을 표방하는 절에 오는 재가불자를 상대로 돈을 요구하는 것은 부처장사치거나 놀고먹는 돼지처럼 방일하기 위해서입니다. 절집에서 길 막고 돈 받는 것은 불문곡직하고 불교취지에 어긋난 행위입니다. 절은 무주상 보시의 표상이듯 사부대중의 지극한 정성이 깃든 불사가 아니면 칠보로 장엄한 불상도 공해물질입니다. 돈 내고 동물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모든 동물을 볼 권리가 있습니다. 입장료 내고 절에 들어간 사람들이 너나없이 출가사문을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하고 일일이 방문열고 구경하기 성가시다고 절 마당에 집결시켜 한꺼번에 보겠다면 그땐 어쩔 겁니까? 맹목적인 신앙심을 불도로 여기는 무명시대에 기생하는 중노릇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두고 볼 일입니다.
돈이 없어 절집운영이 안 된다면 절을 내버리면 됩니다. 인간이 사라지면 절은 머지않아 자연으로 회귀하게 될 것입니다. 두타행은 기대하지 않더라도 소욕지족하며 청정하게 살지 않는 절집에 시주하는 것은 불교가 빨리 망하라는 저주입니다. 산중에서 정갈하고 검소하게 살아가는 출가자를 보고 지나칠 재가불자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출가자는 재가자가 절에 오면 가능한 수행편의를 제공해야 하며 재가자는 절이 잘 보존되고 출가자들이 공부하며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도록 물심양면으로 돌보는 것은 아름다운 불교문화이고 전통입니다. 절은 모든 사람의 것이며 모든 사람이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세상 그 어떤 집단도 실현 불가한 숭고한 뜻을 지닌 부처님도량에서 길 막고 돈 받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리고 빳빳한 법복에 업장소멸 기도면죄부 권유하는 법당보살을 보면 나도 소름이 돋습니다.
Q :
불교 수행법에도 기도(祈禱)가 있습니까. 요즈음 절에 가면 별별 이름의 기도라는 말 밖에 없으며 심지어 참선기도도량이라는 간판까지 버젓이 걸려 있던데 부처되는 것도 귀신에게 비는 기도로서 가능한지요.
A : 불교경전 12부에 기도라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습니다. 부처되는 것은 몸 없는 중생인 신에게 빌고 구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습니다. 근자 절집에 기도라는 말이 일반화되는 것은 석가부처님의 불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부처를 신격화시키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석가부처님 입멸 후 정법 5백년과 상법 1천년이 지나면 사마외도 자손들이 나의 제자를 빙자하여 법을 욕되게 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정설이 지금 모습일 겁니다. 기도는 비천한 구원행위로서 해탈지혜를 득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불교정신과도 상반됩니다. 불교는 사익을 위하여 빌고 구하는 기도가 아닌 자신의 염원을 불전에 이르게 하는 불공과 발원이라는 객관적이고 대승적인 마음의 당처가 있습니다. 기도는 상대로부터의 요구와 거래 개념이지만 불공을 드리는 것과 발원은 자신의 공덕만큼 보은을 받는 것이기에 원망이나 빚이 없습니다.
몸 없는 중생인 신에게 빌어 소원을 성취하려는 비천한 서양종교가 대자유인의 길인 불도에 접목되는 폐습은 근세 불문에 정각을 이룬 선각자가 없었던 탓일 겁니다. 기도행위는 명제가 무엇이든 사적인 욕망을 채워달라는 요구이기에 반드시 되갚아야 할 과제가 남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미시적 존재에게 청탁한 기도를 상쇄시키는 수단도 없거니와 언제 무슨 방법으로 저질러놓은 마음의 빚을 되갚을 겁니까? 불교는 지혜광명을 가로막는 업장을 소멸하고 일체에 걸림 없는 해방종교이기에 임의로 업(業)을 쌓는 기도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요즘은 무슨 사찰이라는 간판이 식상한지 참선기도도량이라는 절 간판이 널려있어 말법시대를 더욱 실감케 하는 판국에 격외도리인 참 선법을 기도와 연관 짓는 엉터리 무늬불교를 뉘라서 제도할지 아득하기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