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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佛道- 17
<주간컬럼/2004-08-01>
Q :
존재세계는 절반인 현상계와
나머지 절반의 보이지 않는 실상계가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화두선, 염불선, 위빠사나,
주력, 단전호흡 등의 수행이 하나씩 실체를
인식해 나가는 과정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불도에 들어 정진하는 것입니까?
A :
일체만유가 法이고 佛이지만
하나 둘 감지하고 인식하는 점수(漸修)에 매달린
근기에게 해탈열반세계는 그림의 떡입니다.
지난 세월은 한 토막 꿈같아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영원한 의지처가 되지 못합니다. 더구나
내생은 사람 몸 받고 불법인연 만나기가 맹구부목(盲龜浮木)만큼
어렵다는데 이런 저런 공부방법과 구차스런
경구에 휘둘려서 언제 성불합니까.
佛道는 거두절미하고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는데 있습니다. 업 때문에 미혹하고
그러므로 육도 윤회합니다. 업의 뿌리는 탐욕과
아집, 악연입니다. 업을 멸하는 지혜의 힘은
자비공덕에서 나오기에 우리는 애써 불도를
닦지만 종교관행에 묶이면 구불이고 그런 짓을
전문으로 하는 중생일 뿐입니다. 인연취산
하는 제법을 분별시비하고 유, 불리를 따지는
소아에 사로잡혀 단 하루라도 온전히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아직 삼독의 노예인 것입니다.
요즘 세간에는 무슨 호흡법과
마음에 떠오른 영상을 죽이는 수련 등, 별
용천한다는 수행법이 지천입니다. 모든 심신수련은
일시적으로는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외도의
법은 육근에 맛 들이고 환을 잡는 것이기에
쉽게 빠져들지만 머지않아 치유할 수 없는
고질병통을 껴안게 됩니다. 더구나 상을 죽인다고
임의로 지은 잔혹한 영상은 식심을 악성으로
전이시키는 역사로서 혼비백산한 식(識)을
평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마음으로 지은
살생은 의도적인 것이기에 죄업이 더 지중하며
반드시 혹독한 대가를 지불하게 됩니다. 보리심과
자비실천이 아닌 수행은 편견과 아집, 원한의
뿌리를 더욱 굳건히 하여 다함께 손잡고 세세생생
윤회하자는 마왕의 자손이 되는 법입니다.
그리하여 지옥이 붐비면 강남의 부동산투기꾼들은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
Q :
저는 취업 때문에
면접을 보고 있습니다. 친구들하고는 대화도
잘 통하고 표현도 잘하는 편인데 막상 면접장에서는
말문이 막혀버립니다. 고민이 많은데도 불교
용어가 늘 머리에 맴돌아 선원 문을 두드려
봅니다.
A : 백토는 굽지 않으면 청자가
될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올바른 길을
알지 못합니다. 고뇌하는 젊음의 소리는 희망찬
미래를 예견합니다. 애써 익힌 것들이 실전에서
기량을 못 펼치는 것은 믿음과 확신의 결여입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하나로 보지 못하고 나와
너라는 분별과 미사여구로서 본심을 포장하는
훈습 때문에 첫 의도가 빗나가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있는 그대로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순수이며, 禪입니다.
현실은 고달픈데 불교용어가
아른거리는 것은 숙세의 근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苦 없는 樂은 없듯이 곧은 사람일수록
시련이 먼저 닥칩니다. 인고는 행복의 어머니이듯
난관이 겹칠 때는 이 세상을 위하여 분명한
역할이 있다는 철칙을 믿고 한발 물러나 마음의
힘을 기르는데 뜻을 두는 것도 미래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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