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돈오입도요문論 해제법문 녹취록

 

이 글은 2004년 11월 우곡선원 참선법회에서 牛谷선사님의 돈오입도요문論 총론 해제법문 녹취록이다.

오늘부터 부산선원에서 돈오입도요문論을 해제하려 한다. 석가부처님 말씀을 經이라 하고 조사들 말씀을 어록이라 부른다. 여기 대주 혜해선사의 돈오입도요문은 영원히 빛나는 장명등과 다를바 없는데 논서로 분류한 것은 교법을 도외시하는 선가에서 이 글이 대주 혜해의 자산, 즉 법이 아니라고 판단한 결과일 것이다. 한 물건도 얻을 것 없는 경지로의 입성이 깨달음이고 길 없는 길이 해탈의 법도이다. 대주 혜해선사는 광대무변하고 무상한 세계관인 경전 구절을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佛法의 종지를 밝혀놓았다. 선각자의 인간 불사 원력이 깃든 육필을 아무런 공덕도 없이 덤벼들어 해제하는 것이 송구하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다 함께 참회하고 늘 감사히 여기며 파천황의 자세로 돈오입도요문론 해제 법회에 임하기를 당부한다.

본문 해제에 앞서 대주 혜해스님은 복건성 출신으로 성은 주(朱)씨이며 절강성 대운사로 출가하여 수도 중 강서의 마조 도일스님을 찾아가 법을 묻고 깨쳤던 일화를 간략히 서술한다. 마조 도일스님이 묻기를, 어디서 오는가? 월주 대원사에서 왔습니다. 여기 와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佛法을 구하려고 왔습니다. 그러자 마조스님은 자기 집의 보배창고는 돌보지 않고 사방으로 싸돌아다니면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나에게 한 물건도 없는데 어떤 불법을 구하려 하는가? 그러자 혜해스님이 절을 하면서 어떤 것이 혜해 자신의 보배창고입니까? 라고 물으니 마조스님은 그대가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 바로 너의 보배창고이다. 일체가 구족하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사용이 자유자재한데 어찌하여 밖에서 구하려 하는가. 라는 말 끝에 혜해스님은 그 자리에서 대오각성하였다.

그로부터 6년 동안 마조스님을 시봉 한 후 10여년의 은둔생활로 방대한 불교 경전의 요체를 마치 조각을 빗듯 일목요연하게 정립한 것은 교법으로 심법을 들어 보이려는 선승의 열정이 녹아있어 본원의 참선법회 참조교재로 채택하였다. 언어는 주관이 개입된 마음의 표현이기에 해탈의 경지 무념무상 도리가 왜곡될 소지가 농후하다. 특히 실천행을 요구하는 참선법은 말이나 문자에 담기지 않기 때문에 제아무리 심오한 불교철학도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옛 선각자들이 법을 깨친 후 공부한 메모지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렸던 것은 뒷사람을 위한 배려였다. 경전을 통한 지식에 묶이고 불가사의한 경구에 혹하면 자기 법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앞 사람의 그림자를 지워버린 것이 임제선사의 살불살조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주 혜해선사가 공부한 기록이 도반을 통하여 제방에 알려진 덕분에 우리는 광대무변한 불세계를 편하게 앉아 만행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 돈오입도요문 해제에 앞서 우리는 지난 7개월에 걸쳐 유마경을 해제하였다. 대중은 공부한 바를 내놓아라!! 선각자의 살림살이를 엿보고 훔치려고만 해서는 깊디깊고 오묘한 무상심심미묘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부처가 되지 못한다. 보고 듣고 느낌으로 아는 식견은 언제든 무너지고 다시 어두워지기 마련이다. 참 사람 답지 못한 부처 없듯 바라밀을 실천하는 보살이 되어야만 언제 어디서나 여여하고 능수능란한 무심지혜가 깃든다. 부처는 경전을 많이 알거나 말을 잘하거나 논리가 정연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다. 일체법에 걸림없는 무심한 마음을 적재적소에서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 사람이 무심도인이고 부처다. 돈오입도요문論은 상대법에 얽매인 무명 중생에서 벗어나 마음을 잘 쓰는 법, 즉 일상이 공덕이 되는 올바른 불도수행을 위한 지침서와 다름없다.

참선법회는 심오한 불교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대우주 만법계 일제처로부터 자유스러워지는 참선법회는 전생에 지은 바라밀 공덕이 연을 맺어준 결과다. 하열한 중생은 상대법이 사라진 대자유인의 행로를 알지도 못할뿐더러 동참할 기회도 없다. 참선수행으로 마음이 지극해지면 오감이 성성해지고 차츰 귀가 열리고 말문이 트이고 눈이 열리면서 8만4천 경전이 손금보듯 쉬워지는 것은 심신이 불세계에 진입되었기 때문이다. 해탈성불은 그의 영혼이 빅뱅 이전의 순수세계로 회귀 되었고 태초의 원자에너지가 심파로 작동되는 원초적인 사람이 되었다는 것으로 識은 물론 혈액과 체세포의 질 또한 일반적이지 않다.

태평양 물을 뜨려면 빈 바가지를 주저 없이 바닷물에 빠뜨려야 한다. 생사 경계가 없는 확신과 용기는 운명을 가로막던 마장을 물리치고 대자유인이 되는 도리를 터득하게 한다. 대주 혜해가 마조 도일과 연이 닿지 않았다면 평생 죽은 문자나 뒤적거리며 남의 자산을 헤아리는 그런 수도자일 뿐 해탈 진리를 실천하는 참사람, 시대의 주인공은 못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경야독하며 참선공부를 하는 것은 해탈진리를 실천하는 실사구시가 목적이다. 참선으로 탐진치 삼독심을 놓고 비우고 버린 그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빈 바가지를 지녔지만 卽事卽理하지 못하면 아무런 공덕도 없는 인생살이로 끝난다. 여러분은 직. 간접으로 무심의 원류 牛谷의 자이파 맛을 본 경험이 있다. 무심맛을 본 마음 그릇은 사바세상 어디 무엇에 쓰든 부족하거나 오염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져라. 곧 서산 그림자가 드리울 텐데 언제까지 주어진 현실 앞에서 머뭇거리고 빌빌댈 것인가.

우리는 내생을 기약하지 않지만 혹 이생 공덕이 부족하여 성불에 이르지 못한 내생도 지금같이 사람 몸 받을 확신이 있는가를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운이 좋아 사람 몸을 받아도 해탈 인연을 만난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고 불연이 아니면 괴로운 사생육도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천만다행으로 우리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사유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 사바세상 일체법이 덧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원인은 자신이 지은 무명업이지만 과거 현재 미래를 관통하는 참선공부로 업장을 소멸한다면 고뇌와 두려움 같은 건 없다.

여기 돈오입도요문론은 깨달음의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입도요(入道要), 즉 도의 길에 들어서서 부처님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될 것인가를 묻고 있다. 마음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당연히 불국정토 구현을 서원한다. 인간불사 소임을 소홀히 하면서 법문에 도취 되고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힘을 구하려는 의도는 사도다. 특히 외도 사마의 문전을 기웃거리다 자신의 주인공 영혼을 더 오염시켜 시운을 놓치는 딱한 인간으로 남지 말아야 한다. 돈오의 요결은 과거 미래가 아닌 지금 바로 여기 확신으로 찰나에 즉(卽) 하는 기민한 인간상을 요구하고 있다.

깨우침은 지식의 결정체가 아니다. 이즈음에서 지금까지 공부한 지난 시간을 한번 되돌아보라. 다양한 경전 해제는 물론 전국 방방곡곡 명산대찰과 세계를 여행하면서 힘을 기르고 신심명. 임제록, 무심론, 백장록, 마조록, 혈맥론 등등의 불조사의 미묘한 해탈 세계를 헤집고 다녔다. 돈오입도요문論은 덧없는 이 사바세상에 구애받지 않고 한세상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비법이라는 믿음을 가지면 광대무변한 佛세계가 한눈에 쏙 들어오게 될 것이다. 본원의 참선법회는 애당초 석가부처님 회상 당시처럼 묻고 답하는 야단법석이었다. 이타행이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일체 만법 모든 영역에 관한 질문은 도반을 위한 법보시 공덕이 됨을 유념하면서 참선법회에 임하길 당부한다.

참된 삶은 시간의 길이에 매달려 있지 않다. 번뇌 망상에서 헤어나지 못한 100년은 해탈의 삶 단 하루에도 견주지 못한다. 오늘 법회에 동참한 사부대중들에게 불보살님의 가호가 늘 함께 하기를 기원하며 이만 돈오입도요문 서설에 가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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