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달마
혈맥론(達磨 血脈論)
序 說
혈맥론(血脈論)은 달마대사의 어록을 집대성한 것이다.
辛巳年 立秋에 牛谷禪院은 제방에 널리 유포되어있는 달마대사의 혈맥론(血脈論)을 해제하여 牛谷禪院 참선교재로 채택, 說法하였다.
대다수 중국 불교 論書들은 필사본 과정에서 작위가 개입된 흔적들이 여러 곳에서 드러나 보이는 병통을 껴안고 있다. 本 禪院에서는 혈맥론을 재편집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논설을 대조하여 이설과 오·락을 바로잡아 본래 종지를 되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달마 혈맥론은 佛家 외에서조차 제각기 해설되어 유통되고 있는바 그 진의를 올바로 헤아리기 어려운 실정이다.
本 院은 혈맥론을 정리하는데 있어 오락된 문맥을 바로잡는 것과 아울러 가급적 선법의 종지인 근본마음을 밝히는데 치중하였다. 그러나 혹여 古祖의 聖意가 오·누락되는 우려를 지울 수 없는바 강호 선문납자(禪門衲子)들의 조언 있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달마대사는 동인도 벵골만 부근에서 태어난 승려로서
A.D. 527년 전후에 중국으로 들어왔다. 당시 중국은 위진 남북조 시대로서 북쪽에는
위나라의 후신인 북위(北魏)가 세워졌고 남쪽은 양(梁)나라 무제 시대였다. 달마대사
입멸 직후 수(隋)나라가 일어나 중원을 평정시켰다.
우리 나라는 신라 법흥왕(514∼539)시대이며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즈음 신라최초의 구법승(求法僧) 각덕(覺德)이 양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으며
승려 명관(明觀)이 2천7백여권의 불경을 가지고 들어오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은 불교를 믿으면 출가를 해야 하고 그러므로 효도와 충성도 할 수 없다는 단순논리에서 깨어나지 못한 무지한 시대였다. 달마와 양 무제와의 공덕과 무주상보시 선문답은 유위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두운 중국의 불교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출세간법을 교설하는 불교사상에 충효를 부각시켜야만 하는 당시 시대상은 굴절된 교리를 잉태시켰으며 결국 중국적 불교경전이라 할 위경(僞經)을 낳게 하였다.
다음의 일화를 통하여 무지가 횡행하는 중국 교종의 난맥상을 혁신시켜야 할 달마대사의 시대적 소임과 고육지계, 아울러 선법(禪法)의 태동역사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양 무제를 일깨울 수 없었던 달마대사는 결국 소림굴에서 9년 면벽을 하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낙양에서 큰 무리의 도속을 이끌던 신광(神光)이 찾아와 허리에까지 차 올라온 눈 속에서 법을 구하니 달마대사는 9년간의 침묵을 깨고 신광에게 이르기를,
"제불(諸佛)의 도는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정진하며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어찌 가벼운 마음으로 진실의 불법(佛法)을 구하려 하는가"라고 꾸짖고 좌방을 쳐내고 입실하라는 말에 왼팔을 잘라 결연한 신심을 보이는 신광에게 법(法)을 전하고 혜가(慧可)라 이름하여 제2조(第二祖)로 삼았다. 이처럼 선법(禪法)은 굳이 문자를 세우지 않아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불조(佛祖)의 심인(心印)이 전수됨을 말해주고 있다.』
혈맥론(血脈論)은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에 수록되어 있으며 송대(宋代) 출현한 소실육문(少室六門) 가운데 6번째로 기록되어 전해지며 자기의 마음을 깨치는 견성(見性)을 강조한 글이다. 혈맥론(血脈論)·오성론(悟性論)을 묶어 달마대사 혈맥론(血脈論), 소실삼론(少室三論), 소림삼론(少林三論), 초조삼론(初祖三論), 달마삼론(達磨三論)이라고도 한다.
참고로 보리달마의 어록으로 알려져 있는 파상론(破相論) 혹은 관심론(觀心論)은 최근 대통신수(大通神秀)의 저술임이 밝혀져 달마대사의 혈맥론과는 나란히 하지 않았다. [혜림(慧琳)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권 100 등에 수록되어있음] [註, 牛谷禪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