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의정과 하나가 되라
 

 7. 의정과 하나가 되라

참선하는 납자는 죽어서 살아나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살아만 있고 죽지 않을까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결단코 의정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들떠 움직이는 경계를 굳이 떨어버리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떨어지고 허망한 마음도 억지로 맑히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히 맑아진다. 그리하여 6근이 자연히 텅 비어 자유로와 진다. 이런 경지에서는 움찔했다하면 벌써 마음먹은 곳에 가 있고 입만 벙긋했다하면 벌써 반응이 있게 되니 달리 살아나지 못할까 근심할 일이 있겠는가.

8. 세 가지 폐단을 조심하라

공부가 향상되기를 바란다면 천근되는 짐을 어깨에 걸머진 듯하여 팽개치려 해도 내려놓지 못하는 형편이 되어야 한다. 또한 잃어버린 중요한 물건을 찾듯하여 확실하게 찾아내지 못하면 맹세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아집과 집착 알음알이가 생기는 일이다.

그러면 아집은 병이 되고 집착은 마가 되며 알음알이는 외도로 빠지게 한다. 결단코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잃어버린 물건을 찾듯 열심히 공부하면 앞서 말한 세 가지 폐단이 얼음 녹듯 말짱해질 것이다. 이른바 "한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들뜨게 하면 그 순간 법체와 어긋난다"라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하는 말이다.

9. 또렷하게 깨어 있는 채로 참구하라

일념으로 공부하는 납자는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처럼 분명하고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옛사람도 "적군의 목을 베지 않고는 맹세코 쉬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망상의 도깨비굴 속에 들어앉게 되어 어둡고 깜깜한 채로 일생을 다 보내고 말 것이니 참선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두 눈을 반짝 뜨고 목표물을 노려보며 네 다리에는 힘을 주고 곧추서서 오는 쥐를 잡아 입에 물어야만 비로소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비록 닭이나 개가 옆에 있다 하더라도 돌아볼 정신이 없다. 참선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오직 열심히 이 도리를 밝히기만 하면 될 뿐이다. 그렇게 되면 8경(마음을 흔들어 놓는 8가지 경계)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해도 신경 쓸 틈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해도 쥐는커녕 고양이마저도 달아나고 마는 것이다.

10. 하루에 공부를 다 마치듯 하라

참선할 때는 날마다 하루할 공부를 다 마쳐야 한다. 미루고 질질 끌면 백겁생을 살아도 끝내 공부를 다 마칠 날이 없을 것이다.
언젠가 나는 향 한 개비를 꽂아놓고 그것이 다 타는 것을 보고 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공부가 늘 그저 그러하여 나아진 것도 퇴보한 것도 없다. 이런 식으로 가면 하루에 몇 개비의 향이 타겠으며 1년이면 얼마만큼의 향이 타겠는가."
그리고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시간은 눈 깜짝 할 새 지나가 버리고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데 생사문제를 아직 밝히지 못했으니 어느 날에나 공부를 마치고 깨닫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으로 더욱 나 자신을 채찍질하였다.

11. 옛사람의 공안을 천착하지 말라

참선하는 납자는 옛 스님들의 공안을 알음알이로 헤아려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비록 그런 식으로 하나 하나의 뜻을 깨닫고 지나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공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런 사람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즉 옛 선사들의 말씀은 마치 큰 불덩어리 같아서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물며 그 가운데 어떻게 앉아보고 누워볼 수 있겠는가. 그러한 말씀에 다시 이러니 저러니 분별을 일으키면 자기 신명을 망치게 된다.

12. 선에서의 바른 믿음

선(禪) 공부는 교학과는 다르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대승을 공부해 온 사람도 선(禪)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하물며 성문 연각을 공부하는 소승이 어떻게 선을 알겠느냐.

3현 10성이 어찌 교(敎)에 통달하지 못했을까마는 오직 참선하는 일에 대해 설법할 때만은 그렇지 않아서 3현 보살은 간담이 떨리고 10지 보살도 혼이 빠진다고 하였다. 또한 등각보살도 마찬가지이다. 등각보살은 비오듯 자재한 설법으로 무량한 중생을 구제하시며 무생법인을 얻으신 분이다. 그런데도 아직은 소지장에 막혀 도와는 완전히 어긋난 사람이라고 하셨으니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선종에서는 범부에서부터 완전히 부처와 똑같다고 한다. 이 말은 사람들이 믿기 어려운 데가 있겠으나 믿는 사람은 선(禪)을 할 수 있는 그릇이고 믿지 않는 사람은 이 근기가 아니다. 모든 수행자가 이 방법을 택하려 한다면 반드시 믿음으로부터 들어와야 한다. 그런데 믿음이란 말에도 그 뜻이 얕고 깊은 차이와 바르고 삿된 구별이 있으므로 가려내지 않으면 안된다.

믿음이 얕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불교에 입문한 이라면 뉘라서 신도가 아니라고 자처할까마는 그런 사람은 단지 불교만을 믿을 뿐 자기 마음을 믿지 않으니 이것을 말한다. 믿음이 깊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대승보살도 아직 믿음을 갖추었다 할 수는 없으니 <화엄경소>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지금 설법을 하고 대중들은 그 법문을 듣고 있구나. 이렇게 의식하면 그 보살은 아직 믿음의 문턱에도 들어오지 못한 것이다." 가령 화엄경에 나오는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즉심시불(卽心是佛)]"라고 한 말씀은 누구나가 다 믿노라고 한다. 그런데 "네가 부처냐"라고 묻게 되면 영 어긋나버려서 알아듣지를 못한다. <법화경>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생각을 다해서 아무리 재어보아도 부처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가 없다." 그것이 무슨 까닭인가. 생각을 다해 재보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이는 벌써 믿음을 갖추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르다 삿되다 한 것은 무슨 차이인가. 마음이 곧 부처라고 믿는 것을 "바른 믿음"이라 하고, 마음 밖에서 법을 얻으려는 것을 "삿된 믿음"이라 한다. 그대로가 부처임을 철저히 밝혀 자기 마음으로 직접 맛보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경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바른 믿음'이라 할 수 있다. 얼굴만 번듯하고 속은 어리석은 노름꾼 같은 이는 단지 말로만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고 떠들 뿐이지 사실은 자기 마음도 모르고 있다. 이런 것을 바로 "삿된 믿음"이라고 한다.

13. 본체를 보아야 선정에 든다

옛 선사는 복숭아를 따다가도 문득 정(定)에 들고, 호미로 밭을 매다가도 문득 정에 들었으며, 절의 자잘한 일을 하면서도 선정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찌 한 곳에 오래 눌러 앉아 외연을 끊고 마음을 일어나지 못하게 한 다음에야 정에 들었다고 하겠는가. 이를 곧 "삿된 선정"이라고 하며 이것은 납자가 가져야 할 바른 마음이 아니다.

6조 혜능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부처님은 항상 선정 속에 계셨으며 선정에 들지 않으실 때가 없었다."
모름지기 본체를 확실하게 보아야 비로소 이러한 선정과 하나가 된다. 석가 부처님께서 도솔천에서 내려와 왕궁에 태어나시고, 설산에 들어가 샛별을 보고 허깨비 같은 중생을 깨우쳐주신 일들이 모두 이 선정을 벗어나지 않으셨다. 그렇지 않았다면 들뜬 경계에 빠져 죽었을 것이니 그래서야 어찌 정이라 할 수 있겠는가. 들뜬 경계에 있어서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아서 고요하든 들뜨든 간에 전혀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여기서 무엇을 가지고 경계를 삼겠는가. 이 뜻을 깨달을 수 있으면 세상이 온통 정(定)이라는 하나의 몸으로 꽉 차서 다른 것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