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깨달음과
人生
해탈에 이르는 길은 至福으로서 世間과 出世間 法을 초월한 한 소식 경계로 다가서며, 각자의 시절인연이 베푸는 영원한 자유로의 초대다.
法은 처처의 實像이고 眞理는 존재의 自性이듯 萬法을 具足할 것이 깨달음임을 깊이 새겨 알지 못하면 해탈은 멀다. 해탈은 理致로 존재를 통찰하는 능력자 됨이기에 牛谷禪院은 고루한 동기부여를 위하여 시대에 알맞은 용어를 구사하여 아래와 같이 해탈세계로 진입하는 갖가지 비유를 設하였다.
1. 業으로부터의 해방
깨달음은 마음 안의 또 다른 마음작용이 아닌 인간으로 오기까지 갖추어 놓은 공력이 발현하여 원래의 마음인 정상적인 상태로의 복귀입니다.
탐욕의 習因이 혼재된 중생심이 본래 마음을 되찾는 과정이 곧 깨달음으로 가는 행로입니다. 여정 길은 억겁세월 동안 닦아야 될 팔만사천 경계일 수도 있고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일시에 극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공력과 원력이 시절인연을 만나는 시점입니다. 그 또한 인연의 산물입니다.
業으로부터의
해방은 王이 되는 이치이며 그 王은 결코 벌거벗은 모습이 아닙니다.
예(禮)와 덕(德)이 밑거름된 王이기에 때로는 강하고 때로는 유하며, 만상을 수용하기에
그의 뇌리는 세속적 분별에 저촉 받을 사유가 근원적으로 배제되어 있습니다. 이를
일컬어 영원한 자유 즉, 깨달음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有·無, 長·短, 善·惡 모두를 行합니다.
2. 분별로부터의 해방
분별(分別)에 사로잡힌 깨달음은 결코 없습니다. 분별은 인식의 벽입니다. 삼라만상은 스스로 분별을 짓지도 않았거니와 차등을 지은 바도 없습니다. 우주의 입장에서 보면 불성(佛性)또한 있다, 없다 할 것도 없습니다.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우주법칙에 순응하지 못하는 人間들이 時空을 작위로 해석하여 나누고 덧붙임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분별을 만들었고 결국 그 분별의 질곡 속에 빠져 고통받는 인식의 소유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인간이 임의로 시간과 공간을 토막 내어 소유할 수 없듯이 대 우주에 귀속된 일체 형상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로부터 빚어진 분별상은 그것이 무엇이든 허상일 뿐입니다. 단지 미혹한 인간만이 스스로 지은 허상에 끄달림을 당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명력 또한 무한 우주 공간 속에 일시적으로 피조된 작은 인식의 조각에 불과 하다는 사실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게 한 탐심이 진실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분별에서 벗어난 초월의식입니다. 그것은 체험의 세계이자 올바른 힘으로 체득한 자아의 완성이기에 나 외에 절대자를 설정하고 있는 우치한 종교논리와는 결코 비교될 수 없습니다.
수행자가 존재의 본질에 가 닿는 순간 삶은 절대고독으로 다가옵니다. 즉 존재의 존엄성을 올바로 알게 된 순간부터 인간은 영원한 방랑자임을 확연히 알게 되며 이러한 앎이 또 다른 새로운 業이 되어 또 다시 무너져야 하는 자신을 맞이하게 됩니다.
인간은 홀로 일 수밖에 없음을 사무쳐 통감할 때 만물은 성주괴공하고 생명있는 것은 반드시 윤회하는 지금 여기 이 사바세계가 칠보로 장엄한 불국토임을 분명히 체감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대자연의 숭엄한 역할에 참으로 겸손해진 자신과 무위의 섭리 그 속에 함몰될 수 있었던 성숙한 자아(自我)에 스스로 경탄하는 일성(一聲)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3. 육근 경계로부터의 해방
깨달음은 올바른 그릇에만 담겨지는 지고한 생명에너지입니다. 내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청소한 준비된 마음이 선행되지 못하면 사바세계 처처(處處)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으나 시와 때가 맞지 않아 자신은 그곳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法 비가 소나기처럼 쏟아져도 알음알이로 가득 채운 주장의 그릇을 들고 있다면 갈증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올바른 수행은 그것이 무엇이든 빈 그릇을 만드는 과정이며 관념적 사고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하는 길입니다. 즉,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와 힘을 길러 순수한 사고를 정립시키는데 수행의 본질이 있으며 이것은 영원한 재산인 깨달음을 얻어 내적 곤궁과 갈증이 없는 극락정토에 다시 태어나는 수순입니다.
사람이 가장 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은 잡다한 망상덩이가 담겨진 녹슨 그릇을 버리고 일상에서 기민하게 사용할 수 있는 빈 그릇 한 개면 족할 수 있는 대 확신을 가지는데 있으며 이것이 육근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열반적정(涅槃寂靜)에 이르는 이치입니다.
一心이면 通天이듯, 깨달음은 숙업으로 뒤덮여 있는 자신의 육근 경계를 해방시킬 때 다가서는 환희지입니다.
4. 인간은 연기(緣起)의 조합물
인간 존재의 본질은 대우주의 연기(緣起)과정에서 조성된 소우주이며 지어놓은 업연 따라 윤회하는 떠돌이 행성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자의가 아닌 전생을 살 때 집착의 근(根)을 멸하지 못한 인(因)이 있어 금생에 부모인연 지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금생에 인간으로 탄생된 인(因)은 전생 공덕이 수승하여 축생이나 미물이 아닌 이성(理性)을 가진 만물의 영장으로 온 것이며, 그러므로 깨달음에 도달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기에 탄생 그 자체는 고귀함의 극치입니다.
인간은 지구의 다른 생명체보다 더 분명한 특성을 가진 동체이기에 그만큼 충돌적 소양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사는 더불어 살기 위한 인위적 약속이 필요하고 개체에게 올바른 의식을 함양시켜야 할 명제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후천적 교육만으로는 전생부터 짊어지고 다니는 탐심을 다 내려놓게 할 수는 없으며 더구나 주장이 분분한 현대사조에 묶임을 당하게 되면 윤회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로 인도해 내는 일이 어렵게 됩니다.
불법(佛法)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 즉, 자기성품을 보게 되는 인연공덕을 논하며 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집착을 내려놓는 깨달음에 동참하게 되면 긍정적인 사고가 팽배해 지기 때문에 고의적인 살생이나, 투쟁, 파괴를 일삼지 않으며 그로 인한 인과도 남기지 않게 됩니다.
진리의 절대 스승인 무위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게 되면 순리를 위배한 파괴나 배타적 성향이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집착으로 묶여진 만가지 병통을 일시에 퇴치하고 영원한 자유를 얻게 되는 지고한 방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유에 이르는 길은 인간을 통한 스승인연이 없어도 가능합니다. 독각(獨覺)은 전생 공력이 지고하여 홀연히 순수의식으로 전환된 사람을 칭하며 인간을 통하여 얻은 깨침보다 더욱 원대하고 수승한 경지를 펼쳐갑니다.
지금의 시대상황은 종교적 관행에 묶여 있는 죽은 의식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순수환경 조성 등 깨달음의 직접적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며 공존공생의 덕목이 될 것입니다. 고귀한 인간으로 태어나 바른 길을 찾지 못하면 본의 아니게 언행 그 자체가 동시대를 공유하는 무정물에게까지 해악을 끼치는 하찮은 생명체로 전락될 수 있는 것이 존재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5. 性品이란
性品은 인간의 本性과 같은 것으로서 불교에서는 佛性이란 용어로 통칭되기도 합니다. 이 물건은 존재의 최상승점에 도달된 인간 몸을 받기까지의 공덕의 산물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성품을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깨달음의 근본을 삼는 것은 순수성의 재발견이 있어야 참 인간으로 성숙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禪法을 포함한 佛敎의 모든 가르침은 성품을 보기 위한 과정까지이며 그 다음은 해방된 인생으로 거듭나며, 그리고 더 큰 동업중생으로서의 의무를 부여받게 됩니다.
6. 문전옥답을 소중히
성품(性品)을 보는 것은 혼자든 둘이든 아무 상관하지 않지만 부처는 무상에 이른 마음 이전에 끊임없는 인격도야 인이자 완성된 인간 됨을 칭하는 것입니다.
四季에 관계없이 파종할 수 있는 부처 씨앗은 원래부터 낙동강의 모래알보다 더 많습니다. 그러나 작금의 수행자들은 부처성품의 씨앗을 돋아나지 못하게 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경(經)으로 인한 식자우환이 들어 부처될 자기 자신은 내팽개쳐놓고 남의 것인 빈 거울만 하늘 높이 쳐들고 다니니 성품의 씨앗을 묻고 발아시킬 인연터전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경(經)은 말 그대로 중생의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 그 자체일 뿐이며 자기 부처는 고경(古經)에도 비추어지지 않는 근면하고 용기 있는 자아(自我)임을 통찰해야 합니다.
금생에 성품을 보려거든 예(禮)로서 황폐화된 문전옥답부터 재 개간하는 것이 지금 당장 할 일입니다.
백토는 굽지 않으면 청자가 될 수 없고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올바른 길[道]를 알지 못합니다. 佛法은 분별을 끊지 못하여 바로 알지 못하는 중생심을 치유하는 名 처방전입니다.
7. 깨달음의 실체
깨달음은 가장 진솔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마음가짐이며 부처 以前입니다.
人生은 고귀하고 단 한번입니다. 내생은 결코 기약할 수 없으며 또, 태어나는 고와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 생사가 이어져서도 아니 됩니다.
종교적 관행이라는 미명아래 고행과 기복을 내세우는 것은 불교 본래 가르침도 아니거니와 또 불교 집안에서 온갖 주술과 낮 뜨거운 의례를 만들어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고 염불하는 것은 성불은커녕 임의로 인생을 낭비하는 우매한 짓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시연한 석가세존(釋迦世尊)의 심인(心印)을 이어받는 참선수행으로 집착에서 멀어지고, 그러므로 가장 자유스런 정신에너지를 체득한 실사구시(實事求是)가 대승이며 참 보살의 삶이라 할 것입니다.
8. 산다는 것은
내가 산다는 것은
동편에 해뜨면 서편으로
솔 그림자 드리우듯
그렇게 산다는 것이다
밤 오면
한낮의 열기로
풀잎에 이슬 맺히듯
나타남도 사라짐도 없이
그대로
인연으로 살며
주어진 것 다할 뿐
살고 죽고
오고 감에 연연하지 않으리.
- 牛谷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