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휴정 西山大師

 

휴정 서산대사는 탁월한 學識과 詩想을 겸비하였다. 출가 승려의 몸으로서 나라사정이 위급할 때는 전국 사찰에 격문을 돌려 승군을 모집하여 그들에게 무기를 들게 하였으며, 일선 전쟁터에 나아가서는 혁혁한 전공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처럼 휴정의 행동하는 철학은 계율에 집착한 수행자의 삶을 초월하여 한 시대를 공유하는 동업중생으로서의 의무를 가감없이 구현한 것이다.

辛巳年 춘삼월에 자유인의 덕목이자 禪의 진면목을 열어 보인 休靜 西山大師 그 호쾌한 삶의 향기를 論하였다.

선가구감에 禪은 부처님 마음이요 敎는 부처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言]라 하여 禪敎一致를 설파하면서도 禪을 통해서 마음을 닦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는休靜 西山大師의 삶과 인생을 註解하여 禪道를 밝힌다.

눈 내린 들판 지날 때는
발걸음 어지러이 마라
오늘 걷는 나의 발자국
뒷사람 이정표되느니라.
   <休靜 著. 牛谷 註解>

휴정 서산대사는 완산 최(崔)씨로서 평남 안주(安州)출생이며, 서기1520∼1604(선조 37년) 자, 현응(玄應) 호, 청허(淸虛)·서산(西山) 아명 여신(汝信), 휴정(休靜)은 법명이다.

9살에 어머니를 잃고 다음해 아버지마저 타계하자 안주목사를 따라 서울로 옮겨와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1534년[중종29] 진사시(進士試)과거에 낙방하자 친구들과 어울려 지리산의 화엄사와 칠불암 등을 구경하며 유람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전등록. 화엄경, 원각경. 능엄경, 유마경, 반야경, 법화경 등을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시(詩)를 짓고 스스로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중종 35] 일선을 계사로,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운수 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년] 승과에 급제, 대선(大選)·중덕(中德)을 거쳐 교종판사(敎宗判事)·선종판사(禪宗判事)를 겸임했으며, 보우(普雨)를 이어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사가 아니라는 판단에 관직을 버리고 금강산, 두류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을 만행하며 수행과 후학지도에 전념하였다. 1589년[선조 22년]에 정여립이 괴서인 정감록에 근거하여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역모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휴정과 유정이 역모에 가담하였다는 요승 무업(無業)의 무고로 잠깐 옥사를 겪기도 하였다.
선조는 그를 무죄 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화 한 폭을 하사하였다. 휴정은 그 자리에서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詩)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선조도 그의 시에 감동하여 시 한편을 지어 화답하였다. (청허당 집에 수록)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다시 의주로 피난을 다니게 되었다. 이때 선조는 묘향산에 은둔 중인 서산대사에게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국난 극복의 묘책을 물었다. 73세의 노구를 무릅쓰고 선조에게 달려온 서산대사는 나라를 구하는데 혼신을 다하겠다는 뜻을 전하고 승려로서 국가적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이조 중엽의 고질적인 당파싸움과 피폐해진 국정으로 말미암아 왜의 침입을 불러들인 누란의 국가위기 속에서 출가 승이 할 수 있는 일은 직접 창칼을 들고 전쟁터로 달려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편이었다.

그는 전국사찰에 격문을 돌려 늙고 병들어 싸움터에 임하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면서 호국기원으로 나라를 구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 전쟁터에 나갈 수 있는 승려는 총 동원토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의 휘하에서 싸움에 임하게 하고 유정 사명대사는 금강산에서 1,000여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휴정 자신은 순안 법흥사에 1,500명의 승을 집결시키고 직접 승군을 훈련 통솔하면서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는데 앞장섰으며 한양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웠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으로 승병을 통솔하여 국가에 공훈한 것을 기려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이라는 최고의 존칭과 정2품 당상관 작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충성한 공적과 불교의 덕을 치하하였다.

1594년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유정에게 군직을 물려주고 묘향산 원적암에서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다가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때 700여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가 어가를 호위하여 맞이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출가사문으로서 온당한 처신은 아니라고 여겨질 수 있으나 방편은 여하한 분별도 없다는 이치로 보면 승이 왕을 맞이한 것은 승·속을 떠나 동업 중생으로서 도리를 이행한 것이며, 국난에 임하여 불법(佛法)을 기민하게 구사하는 서산대사의 용(用)은 승·속을 떠나 만인의 표상이 되고도 남을 쾌거였다.

한편으로 이조중엽 이전까지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가 경원 당하고 있던 고난의 시대상을 반조해 보면 참담한 국난을 겪으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의무와 또, 원로 승으로서 불교 위상을 바로 세워야 할 시대적 소임을 다하려는 고뇌가 서산대사의 행동 속에 녹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세수 85, 법랍 67세에 좌탈입망하였다.

문집으로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있으며 편저에 "선교석(禪敎釋)" "선교결(禪敎訣)" "운수단(雲水壇)" "선가구감(禪家龜鑑)" "심법요(心法要)" "설선의(說禪儀)"등이 있다.

선교결(禪敎訣) -유정에게-

선교결(禪敎訣)은 휴정 서산대사께서 말년에 유정 사명대사에게 남긴 짧은 내용의 논서다. 서산대사는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言]"라고 하면서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설파하고 있지만 교리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선(禪)을 통해서 마음을 닦는 것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잘못된 관행과 가르침을 가차없이 질타하고 바른 수행을 지어갈 것을 당부하고 있다.

[Ⅰ]

서산대사는 요즈음 선(禪)을 하는 사람은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다"하고, 교(敎)를 말하는 사람은 "이것이 우리 스승의 법이다"라고 말하면서 한 법(法)을 가지고 서로 옳고 그르다느니 하여 손가락질을 하며 다투고 있으니 슬프도다! 그 누가 능히 판단하겠는가? 그러나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言] 교(敎)는 말이 있는 곳으로부터 말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요, 선(禪)은 말없는 곳으로부터 말없는 곳에 이르는 것이다. 말없는 곳으로부터 말없는 곳에 이르면 그것을 누구도 무엇이라고 이름할 수 없어 억지로 이름하여 마음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고 배워서 알고 생각하여 얻는다고 하니 이는 실로 가엾은 일이다.

교(敎)를 하는 사람으로서 "교(敎)가운데도 또한 선(禪)이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니, 이는 성문승(聲聞乘)도 아니며 연각승(緣覺乘)도 아니고, 보살승(菩薩乘)도 아니며 불승(佛乘)도 아니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선가(禪家)의 문에 들어가는 첫 구절이지, 선(禪)의 근본 뜻은 아닌 것이다. 세존께서 한 평생 말씀하신 가르침[敎]은 비유컨데 세가지 자비의 그물을 가지고 과거, 현재, 미래의 생사의 바다에 펴서 작은 그물로는 새우와 조개를 건지고[人天 小乘敎], 중간 그물로는 방어와 송어를 건지고[연각의 中乘敎], 큰 그물로는 고래와 큰 자라를 건져서[대승원돈교(大乘圓頓敎)] 그 모두를 열반의 언덕에 두는 것과 같으니 이는 교의 순서다.

그 가운데 한 물건[一物]이 있으니, 갈기는 시뻘건 불과 같고 발톱은 무쇠 창날과 같으며, 눈은 햇빛을 쏘고 입으로는 바람과 우뢰를 토한다. 몸을 뒤쳐 한번 구르면 흰 물결이 하늘에 닿고 산과 강이 진동하며 해와 달이 어두워진다. 세 가지 그물을 뛰어넘어 바로 구름 위로 올라가서 감로수를 쏟아 뭇생명들에게 이로움을 주니 조사(祖師)문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기틀을 말한다. 이는 선(禪)이 교(敎)와 다른 점이다. 이 선법(禪法)은 우리 부처님 세존도 또한 진귀조사(眞歸祖師)에게서 따로 전해 받은 것이며 옛 부처의 케케묵은 말이 아니다.

요즈음 선의 본 뜻을 그릇되게 이어받은 자는 돈점(頓漸)의 문(門)으로써 바른 줄기라 하는가 하면, 더러는 원돈(圓頓)의 교(敎)로써 종승(宗乘)을 삼고, 더러는 외도의 글을 인용하여 비밀한 뜻을 설하거나, 혹은 업식(業識)을 희롱함으로써 본분을 삼고, 또 더러는 빛의 그림자[光影]를 실재한 것으로 알아 자기라고 생각하며, 심지어 눈멀고 귀 먹은 "방할(棒喝)"을 함부로 행하여 부끄러움도 없으니 이는 참으로 무슨 까닭인가?

법을 비방하는 그 허물을 내가 구태여 말하겠는가 마는 내가 말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는 것이 배워서 알며 생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로지 마음 길이 다하여 끊어진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이며 스스로 긍정하여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듣지 못하였는가? 세존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가섭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지은 뒤로부터 나아가 후세에 전한 바가 있으니, 이른바 달마(達磨)의 "확연히 툭 트이어 성인이랄 것도 없다[廓然無聖]"한 것과 육조(六祖) 혜능대사의 "선도 악도 생각하지 말라[善惡不思]."한 것과, 회양(懷讓)의 "수레가 멈추거든 소를 채찍질한다[車滯鞭牛]."고 한 것과 행사(行思)의 "여능의 쌀값[廬陵米價]"과 마조(馬祖) "서강의 물을 모두 다 마심[吸盡西江]"과 석두(石頭)의 "불법을 모른다[不會佛法]."함과 운문(雲門)에 이르러서는 "호떡(胡餠)"이요, 조주(趙州)의 "차 마심[喫茶]" 투자(投子)의 "기름 탐[沽油]", 현사(玄沙)의 "흰종이[白紙]", 설봉(雪峰)의 "공 굴림[車昆毬]", 화산(禾山)의 "북 두드림[打鼓]", 신산(神山)의 "바라 두드림[敲羅]", 도오(道吾)의 "춤을 춤(作舞)"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옛 부처와 옛 조사들이 같이 부른 교외별전(敎外別傳)의 가락이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말로써 얻을 수 있겠는가? 이는 모기가 무쇠 소를 물어뜯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제 말세에 이르러 하근기가 많아 교외별전의 기틀이 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다만 원돈문(圓頓門)의 이치의 길[理路]과 뜻의 길[義路]과 마음의 길[心路]과 말의 길[語路]로써 보고, 듣고, 믿고, 아는 것[見聞信解]을 귀하게 여길 뿐, 경절문(徑截門)의 이치인 길이 끊어지고 의(義)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의 길이 끊어지고 말의 길이 끊어져 재미도 없고 모색할 것도 없는 경지에서 칠통(漆桶)을 깨뜨리게 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길 수 없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이제 그대가 팔방의 납자(衲子)들에 대하여 그 요긴한 곳에 칼을 내리쳐 구멍을 뚫지 못하거든 바로 본분인 경절문의 활구(活句)로써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쳐 스스로 얻게 하여야만 할 것이니, 그것이 바로 종사(宗師)로서 사람들의 모범이 될 것이다. 만일 학인이 깨닫지 못함을 보고서 아무렇게나 설하고 가르치면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일이 적지 않을 것이다.

만일에 종사(宗師)가 이 법을 어기면, 비록 설법하여 하늘에서 꽃비가 어지러이 내릴지라도 이는 미치광이가 미쳐서 밖으로 내닫는 것이 될 뿐이다. 만일에 낮은 학인 일지라도 이 법을 믿으면 비록 금생에 철저한 깨침을 얻지 못하여도 목숨을 마칠 때에 악한 업에 끌리지 않고 바로 깨달음의 바른 길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옛날 마조가 한 번 소리치자 백장이 귀 먹었고 황벽이 혀를 내둘렀으니, 이는 임제종(臨濟宗)의 연원이다. 그대는 반드시 정맥(正脈)을 가려서 종안(宗眼)이 분명할 것이므로 이렇게 누누이 말하는 것이니 뒷날 이 노승의 말을 저버리지 말라. 만일에 노승의 말을 저버리면 반드시 부처님과 조사의 깊은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니 자세히 살피고 살펴야 한다.

[Ⅱ]

천리를 달리는 기마(驥馬)가 어찌 채찍의 그림자를 기다리며, 광야의 봄바람을 생각하면 흐르는 물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옛 사람은 말하기를 "도(道)를 보기는 쉬우나 도를 지키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그대는 항상 계율을 힘써 지켜 지해(知解)와 행(行)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고,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며 조정의 일을 이야기하지 말며 외서를 보지 말며 삿된 형색을 보지 말며, 달콤한 말을 듣지 말아라. 이불과 베개가 있는 곳도 두려워해야 할 것이거늘 하물며 바깥 사람이 있는 곳이겠는가. 아첨하는 웃음을 가까이하지 말라. 속인도 꺼려하거늘 하물며 도인이야 그래서 되겠는가. 총명과 지혜로 나를 높이려 하지 말고 문자를 가려 남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

지극한 도에는 사람이 없고, 참된 이치에는 나[我]가 없느니라. 항상 분수를 지키고 자신의 허물을 살피되 정직함과 검소함으로 체(體)를 삼고 사랑과 인내로 용(用)을 삼으며, 푸른 산과 흰 구름으로 집을 삼으며, 물과 달과 소나무와 바람으로 내 마음을 아는 벗으로 삼아라. 그러면 그것이 도인의 행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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