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일체유심조와 원효대사

 

본 우곡선원은 신축년 열하에 신라 불교계의 이단아이며 시대의 대자유인으로 저자거리에서 불교진리를 실사구시한 원효대사의 삶과 인생을 해독하였다.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는 신라시대 고승으로 성은 설(薛)씨이며 원효(元曉)는 법명, 담날(談捺)의 아들로 아명은 서당(誓幢)또는 신당(新幢)이라 불렀으며 지금의 경북 경산 불지촌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화랑 출신인 원효는 서기648년 진덕여왕 2년에 황룡사로 출가하여 각종 불경을 섭렵하며 수도에 진력하였다. 650년에 의상과 함께 유식학(唯識學)을 배우려고 당(唐)의 요동까지 갔지만 신라의 첩자로 몰려 고초를 겪다가 풀려났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던 중 지금의 경기도 화성근처 묘지에서 잠을 자다가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와 계합되는 단초를 얻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의상과 헤어져 서라벌로 되돌아왔다. 불교의 해탈세계는 문자로 득할 수 없는 시스템임을 입증하듯 두 번에 걸친 원효의 당나라 유학은 좌절되었다.

깨달음은 다생간의 수행공력에 의한 시절인연으로서 근기에 따라 기왓장 떨어지는 소리에 깨우침을 얻는 등 여러 모습이 있다. 또한 깨우침은 전생숙업과의 단절이자 확신과 직관을 형성하는 동시적 작용이기에 보임이라는 뼈를 깎는 인고의 세월을 요구한다. 무덤 속 해골에 괸 물을 먹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구토를 한 후 마음이 열리는 개오로 중생의 상대분별에서 놓여나자 종교에 얽매인 승려로서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원효처럼 온몸으로 느끼는 깨우침의 동기가 주어진 삶은 전생숙업에 묶여있지 못하거니와 현실과의 타협도 스스로 용납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며 사바세상 그 어디 무엇과도 짝하지 못하는 득도 초기경계 해오자가 필연적으로 겪는 절대고독은 중생습기가 멸하고 심신이 평정에 이를 때까지 창살 없는 감옥살이가 따로 없다.

불교교단에서 떨어져 나와 서라벌에서 기행을 일삼던 그는 귀향 5년 후인 서기665년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을 낳는다. 설총의 이두문자는 서민들이 불교경전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방편을 구사한 것이지만 "나에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면 하늘을 떠받칠 대들보를 만들어 놓겠다"는 원효 자신의 노랫가락을 실천한 휴먼드라마이자 원효의 선견지명으로서 설총을 통한 이두는 오늘날 훈민정음의 모태가 되었을 것으로 본다. 불교경전을 대중화 하기위한 목적으로 창시된 이두문자는 오늘날 이동통신과 같은 혁명적인 사건이었을 것이다. 중국말과 글을 쓰는 상류사회 문화에서 이두는 저자거리에서 통용되는 서민언어로 자리 잡았을 것이고 고려를 거쳐 세종에 이르러 기호로 체계화한 것이 오늘날 한글의 모태인 훈민정음 이었을 것이다.

원효대사의 인생족적은 파계승의 기행보다 정치권력과 결탁된 귀족불교를 뛰어넘어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가교역할이 그에게 주어진 시대적소임이었을 것이다. 해탈이 생사에 얽매이지 않는 대자유인의 세계관이지만 동업중생을 계몽하는 시대적 소임이 없는 깨우침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중국어인 경전을 읽고 말할 수 있는 계층이 승려들이었기에 정치권력이 이들의 지식을 선호하였고 신라와 고려가 그렇듯 신정정치의 폐해는 나라의 존망을 가름하였다. 당시 서라벌에서는 권력화 된 중들이 노비를 부리고 가마를 타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계(戒)를 파한 원효는 관행에 얽매이지 않는 영혼으로 거듭날 수 있었으며 사상가로의 변신을 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파계 후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하고 광대들이 사용하는 조롱박을 응용한 무애박을 만들어 천촌만락을 노래하고 다니면서 교화를 하였다. 원효가 부르고 다닌 노래의 줄거리는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는다."는 화엄경의 이치를 담은 것으로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어 서라벌 사람들은 그 노래를 "무애가(無碍歌)"라 불렀다. 지금으로 말하면 그가 두들기는 무애박은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법당이며 화엄경을 축약한 노랫가락은 심오한 불교철학을 들려준 법음인 셈이다.

원효의 주유천하와 낭인처럼 주막집을 기웃거리는 것을 사람들은 그 심중을 헤아리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스스로 계급사회를 타파하려는 몸부림이었으며 현실과 조화를 이루는 보임에 약효가 있기 때문이다. 해오자의 초기 들끓는 분심이 가라앉을 때까지의 파행은 여법한 각자의 모습과는 딴판인 것으로 비추이나 그 경계에서의 강력한 흡인력은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가치관을 심어주는 바라밀 행이 되기도 한다. 낯선 포교기치를 앞세운 원효의 기행으로 인하여 서라벌에서는 가난뱅이나 어린이들까지도 석가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원효는 "학이불종사"라 하여 보편적인 승가의 관행을 따르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라는 승가의 법통을 초월한 독학은 보리수 아래서 홀로 깨달은 석가세존처럼 "나에게 스승은 따로 없다"는 상대세계가 멸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경지에서 더욱 고고한 불교세계를 열어갈 수 있는 해탈지혜의 높은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원효대사가 살았던 7세기 중반 한반도는 역사의 대격변기였다. 백제 고구려와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향한 대결구도는 치열한 각축장이었을 것이다. 신라통일을 전후하여 권력과 영합한 귀족불교를 타파하고 대중 불교로 다가가려는 원효에게 기성제도권의 질시와 배타가 점층 하였을 것은 불문가지다. 원효 나이 51세 때 신라는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다. 이와 더불어 시대를 관통하는 수행력도 최고경지에 이르러 통일 이후 화해논리로 균형과 조화를 도모한다. 통일 이전에는 불교를 정신적인 구심점으로 몰아가는데 주안점을 두었지만 삼국통일 후에는 평화로운 공존공생에 역점을 두었다. 현실참여 의식이 분명한 원효대사는 기성 불교교단에 대한 비판도 스스럼없이 가했다. 황룡사에서 "금강삼매론"을 강설할 때 군중을 향해 던진 그의 말은 오늘날에 못지않게 평등과 자유의 불교가 권력화 되어 반목과 시기 알력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신라는 각 지역 추천에 의한 백명의 고승을 소집하여 지도자의 길과 부국강병책을 논하는 백고좌 법회를 여는 국가적 관행이 있었다. 그러나 불교교단에서는 지금의 경산지역 추천에 의하여 선출된 원효를 파계승으로 낙인찍어 참석자 명단에서 삭제해 버렸다. 원효는 그때의 일을 빗대어 "옛날 백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내가 끼일 수 없었지만 이제 한 개의 대들보를 구한, 즉 오직 나만이 이 일을 할 수 있구나"라고 하여 백고좌에 모였던 고승들을 질타한 힘은 자유인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준 귀중한 일화다.

원효의 무애자재한 행동은 신라 귀족불교의 관행과 고답적인 승가의 틀을 과감히 떨치고 최선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아울러 화쟁사상 실천으로 자리이타의 불교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그의 금강삼매경 논이나 대승기신론소 등에서 볼 수 있는 일심사상(一心思想) 무애사상(無碍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 등은 당시 왕실중심의 귀족화된 불교이론을 대중불교로 전환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또, 종파주의로 치닫던 불교이론을 생활불교로 정착시켜야 할 당위성을 제시해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범부중생은 쉽사리 이해되지 못할 원효의 고독이 무애자재 행으로 비추어질 수 있었고 고답적인 관행을 깨트리는데 귀감이 되어준 것은 한국불교사에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교단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이므로 쉽게 대중교화로 다가갈 수 있었으며 저자거리에서 부대낀 승려의 삶은 방대한 저술을 낳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오늘날 처처산하에 불사공적이 뚜렷한 원효대사의 불사행적은 관행에 묶이지 않는 참선수행자의 진수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 불교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대자유인의 면모를 보였으나 청맹과니 무명시대가 놓쳐버린 서라벌의 풍운아 원효대사의 구도열정과 실사구시 그리고 해탈세계를 재조명하였다.
원효대사는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세수 70, 법랍 38세로 그의 토굴에서 입적하였다. 고려 숙종 6년에(1101년) 대성화정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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