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임제록 示衆 [Ⅲ]

 

7. 모양없는 네 경계

무엇이 모양 없는 네 가지 경계입니까?
그대들이 한 생각 의심하는 마음이 흙[地]이 되어 가로막히고, 한 생각 좋아하는 마음이 물[水]이 되어 빠지며, 한 생각 성내는 마음이 불[火]이 되어 타고, 한 생각 기뻐하는 마음이 바람[風]이 되어 나부끼는 것이다. 만약 이렇게 알아낼 수 있다면 경계에 끄달리지 않고 가는 곳마다 경계를 활용할 것이다. 동쪽에서 솟았다가 서쪽에서 꺼지며, 남쪽에서 솟았다가 북쪽에서 꺼지고, 가운데서 솟았다가 가에서 꺼지며, 가에서 솟았다가 가운데서 꺼져서 땅 밟듯 물을 밟고 물 밟듯 땅을 밟는다. 어째서 그런가? 4대가 꿈 같고 허깨비 같은 줄 통달하였기 때문에 그렇다.

납자들이여! 지금 법문을 듣고 있는 것은 그대들의 4대가 아니라 그 4대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그것이다. 이렇게 볼 수만 있다면 가고 머물고에 자유자재할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꺼려할 법이라곤 없다. 그대들이 만약 성인을 좋아한다면 그때 성인은 성인이라는 이름일 뿐이다. 어떤 납자들은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은 확실히 틀린 얘기다. 오대산에는 문수가 없다. 문수를 알고자 하는가? 그대들 눈앞에 작용하는 그것, 처음과 끝이 다르지 않고 어딜 가든지 의심할 것 없는 이것이 산 문수이다. 그대들의 한 생각 차별 없는 빛은 어디에나 두루한 진짜 보현이요, 그대들의 한생각 마음이 스스로 결박을 풀 줄 알아서 어딜 가나 해탈이니 이것이 관음의 삼매법이다. 서로 주인도 되고 짝도 되어 나올 때는 한꺼번에 나오니, 하나가 셋이고 셋이 하나이다. 이와 같이 알 수 있다면 비로소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보는 것이다.

8. 어디서나 주인공

임제스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도 배우는 이들은 이제 스스로를 믿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밖으로 찾지를 말라. 모두가 저 부질없는 6진 경계를 반연하여 도무지 삿되고 바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 조사니 부처니 하는 것은 모두가 부처님 가르침의 자취 가운데 일일뿐이다. 어떤 사람이 속으로든 겉으로든 한 마디 꺼내면 곧바로 의심을 내어 이리저리 생각해 보고 옆 사람을 찾아가 물으며 몹시도 정신없이 서둔다. 대장부라면 그렇게 주인이니 도적이니, 옳거니 그르거니, 색이니 재물이니 하며 쓸데없는 이야기로 날을 보내지 말라.
나는 승·속을 논하지 않고 찾아오는 자가 있으면 다 알아내 버리고 만다. 어디서 오든 간에 그것은 소리나 명칭 개념따위일 뿐이어서 모두 꿈이나 허깨비이고 경계를 타고 나타나는 사람의 진면목을 보게 되나니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깊은 뜻이다.

부처님의 경계가 "나는 부처의 경계이다"라고 자칭하지는 못할 것이요, 도리어 의지함이 없는 도인이 경계를 타고 나타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나에게 부처되는 길을 묻는다면 나는 청정한 경계로 응대해 주고, 어떤 사람이 나에게 보살을 묻는다면 나는 곧 자비의 경계로 응대해 주며, 보리를 묻는다면 깨끗하고 오묘한 경계로 응대해 주고, 열반을 묻는다면 고요[寂靜]한 경계로 응대해 준다. 경계는 수만 가지로 차별되나 사람에는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사물에 응하여 형상을 나투는 것은 물 속에 비친 달과 같다.

납자들아! 그대들이 진여법을 깨치고자 한다면 반드시 대장부라야 한다. 시들시들 나약하게 흐느적거려서는 안되니, 깨진 그릇에는 제호[醍塢]를 담지 못하기 때문이다. 큰 그릇이라면 남에게 홀리지 않고 어딜 가나 주인공이 되어 선 자리 그대로가 모두 참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찾아오는 자가 있거든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그대들이 한 생각 의심하면 곧 마구니가 마음속으로 들어오니, 보살이 의심을 낼 때 생사의 마구니가 틈을 타는 것이다. 다만 생각을 쉬면 될 뿐 다시 바깥으로 구하지 말고 사물이 다가오면 오는대로 관조하도록 하라. 그대들이 지금 바로 작용하는 이것을 믿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다. 그대들의 한 생각 마음이 3계를 내고 경계 따라 반연하여 6진 경계로 나뉘게 되니 그대들이 지금 응용하는 곳에 무슨 모자람이 있겠느냐. 한 찰나에 그대로 정토(淨土)에도 들어가고 예토(穢土)에도 들어가며, 미륵누각에도 들어가고 3안국토(三眼國土)에도 들어가서, 가는 곳마다 노니나니 오로지 빈 이름임을 볼뿐이다.

9. 3안국토(三眼國土)

무엇이 3안국토입니까?
나는 그대들과 함께 깨끗하고 묘한 국토에 들어가 청정한 옷을 입고 법신불을 말하며, 차별 없는 국토에 들어가 차별 없는 옷을 입고 보신불을 말하며, 해탈국토에 들어가 광명의 옷을 입고 화신불을 말한다. 이 3안국토란 모두가 의지하여 변한[依變]것이다. 교학자들은 법신을 근본으로 하고 보신·화신을 그 활용[用]이라 하나 내가 보기에는 법신이란 설법할 줄을 모른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의미에 입각하여 법신을 말하고, 바탕에 입각하여 국토를 논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법성신과 법성토가 의지하여 통한[依通]국토이니 빈주먹에 누런 잎사귀를 쥐고 돈이라고 속여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임을 분명히 알겠다. 찔레와 마른 가시와 마른 뼈다귀에서 무슨 즙(汁)을 찾느냐. 마음밖에는 법이 없고 마음 안에서도 찾을 수 없으니 무엇을 찾겠느냐.
그대들 제방에서는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고 하는데 착각하지 말라. 설령 닦아 깨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가 생사의 업이다. 그대들은 6도 만행을 빠짐없이 닦는다고 말하나 내가 보기에는 모두가 업을 짓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를 구하고 법을 구하는 것은 지옥의 업을 짓는 것이고, 보살을 구하는 것도 업을 짓는 것이며, 경을 보고 논을 보는 것 역시 업을 짓는 것이다. 부처와 조사는 일없는 사람이며 유루유위(有漏有爲)와 무루무위(無漏無爲)가 청정한 업이다.
어떤 눈 먼 중들은 배불리 먹고는 좌선하여 관법을 닦는다고 한다. 그들은 생각이 새나가는 것을 꽉 붙들어 달아나지 못하게 하면서 시끄러운 것은 싫어하고 조용한 것만을 찾는데 그것은 외도법이다.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만약 <마음에 머물러 고요함을 보고 마음을 일으켜 밖으로 관조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안으로 맑히며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정(定)에 든다>*면 이러한 무리들은 모두가 조작을 하는 것이다"고 하셨다. 지금 이렇게 법문을 듣는 그대들이 어떻게 저것을 수행하고 증득하며 장엄하려 하겠느냐. 저것은 닦을 물건도 아니며 장엄할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만약 그것을 장엄하게 된다면 무엇이든지 장엄할 수 있을 것이니 그대들은 잘못 알지 말라.
* <주심간정 거심외조 섭심내징 응심입정(住心看靜 擧心外照 攝心內澄 凝心入定): 이 네 구절은 북종(北宗) 신수계(神秀系)에서 학인을 가르치는 표어로서, 하택(荷澤)스님이 인용하여 북종을 공박한 말이다.>

납자들아, 그대들은 어떤 노스님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는 그것이 참된 도라고 하여 선지식은 불가사의하고 나는 범부의 마음이므로 감히 저 노스님의 뜻을 헤아려 볼 수 없다고 한다. 이 눈 먼 바보들아! 일생을 이러한 생각만을 내어서는 멀쩡한 두 눈을 저버리는 것이며 싸늘하게 입 다문 모습이 마치 빙판 위에 서 있는 나귀새끼 같을 뿐이다. 나는 감히 선지식을 비방하여 구업(口業)짓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큰 선지식이라야만 비로소 감히 부처와 조사를 비방하고 천하를 옳다 그르다 하며 3장(三藏)의 가르침을 물리치며, 어린애 같은 모든 무리들을 꾸짖으면서 맞고 거슬리는 경계 속에서 사람을 찾는다. 그러나 나는 12년동안 업의 성품을 찾았는데도 겨자씨만큼도 찾을 수 없었다.
만약 새색시 같은 선사(禪師)라면 절에서 쫓겨나서 밥도 못 얻어먹을까 두려워하여 늘 불안하고 즐겁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로부터 대선사(大禪師)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믿어주지 않아 쫓겨나는 일이 빈번한데 그것이 비로소 귀한 것이다.
만약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두 인정해 준다면 이런 사람은 아무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사자의 포효 한 번에 여우는 머리통이 찢어지는 것이다.

납자들이여! 제방에서는 닦을 도가 있고 깨칠 법이 있다고 하는데 그대들은 무슨 법을 깨치며 무슨 도를 닦는다고 말하는가. 그대들이 지금 작용하는 곳에 무슨 모자람이 있으며 어떤 점을 보완한다는 것인가. 나이 어린 후학들이 잘 모르고 이들 여우 도깨비들이 하는 말을 믿는다. 그리하여 사리를 설명하여 다른 사람들을 얽어매고는 "이치와 수행이 부합하고 3업을 잘 지켜야만 성불할 수 있다"는 말을 하도록 허락해 버리는데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봄날의 가랑비처럼 많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길에서 도에 통달한 사람을 만나거든 무엇보다 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만약 누구라도 도를 닦는다면 도를 행함이 아니니 수만 가지 삿된 경계들이 앞 다투어 생겨난다. 지혜의 칼을 뽑아 들면 아무 것도 없어져서 밝음이 나타나지도 않았는데 어둠이 밝아진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말하기를 '평상심(平常心)이 도(道)'라고 하였다.

무엇을 찾느냐? 지금 바로 눈앞에 법문을 듣는 의지함이 없는 도인은 너무도 분명하여 결코 부족한 적이 없었다. 그대들이 만약 조사나 부처와 다름없기를 바란다면 이렇게 보면 될 뿐이니 의심하여 잘못되지 말라. 그대들의 마음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산 조사라고 하니 마음에 다름이 있으면 성품과 모양이 다르지만 마음이 다르지 않으므로 성품과 모양이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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