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백장록(百丈錄) [Ⅱ]
行錄(행록)
1
백장이 마조(馬祖)스님과 길을 걷다가 날아가는 들오리떼를 보고 마조스님께서 물었다.
"저게 무엇인가?"
"들오리입니다."
"어디로 갈까?"
"날아갔습니다."
그러자 마조스님은 갑자기 머리를 돌려 백장의 코를 비틀자 아픔을 참느라고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 마조스님께서는,
"다시 한번 날아갔다고 말해보라."
백장스님은 그 말끝에 느낀 바가 있었다.
시자들의 거처로 돌아와 대성통곡을 하니 어떤 시자가 물었다.
"부모 생각 때문인가?"
"아니"
"누구에게 욕이라도 들었는가?"
"아니"
"그렇다면 왜 우는가?"
"마조스님께 코를 비틀렸으나 철저하게 깨닫지를 못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깨닫지 못하였는가?"
"마조스님께 직접 물어보게."
그 시자가 마조스님께 묻기를,
"회해가 왜 깨닫지 못했습니까? 요사채에서 통곡을 하면서 스님께 물어보라 합니다."
마조스님께서는 "그가 알 테니 그에게 묻도록 하라."
그 시자가 요사채로 되돌아와서 말하기를,
"스님께서는 그대가 알 것이라 하시며, 나더러 그대에게 물어라 하셨네."
여기서 백장이 깔깔 웃자 그 시자가 말하기를,
"조금 전에 대성통곡을 하더니 무엇 때문에 금방 웃는가?"
"조금 전에 울었지만 지금은 웃네."
그 시자는 그저 멍할 뿐이었다.
2
마조스님이 사람을 시켜 편지와 장(醬) 세 항아리를 보내왔다. 백장스님께서는 법당 앞에 죽 놓으라 하고는 상당하더니 대중이 모이자마자 주장자로 장 항아리를 가리키면서 말씀하셨다.
"말을 바로 한다면 부수지 않겠지만 못하면 부수겠다."
아무도 대꾸가 없자 백장스님은 그 자리에서 장 항아리 세 개를 모두 깨트려버리고 방장실로 돌아갔다.
二乘의 道[無色界]
이승(二乘)은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다 쉬어버렸으나 탐내는 마음이 없어진 경계에 눌러앉아 옳다고 여기니 이는 무색계(無色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광명을 가리고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수행자에게는 선정을 닦고 지혜를 배우게 해야 하며 깨끗하고 더러움을 구별해 주어야 한다. 더러운 법이란 탐욕·성냄·애착 등을 말하며 깨끗한 법이란 보리·열반·해탈 등으로 불리어진다.
왜냐하면 불조(佛祖)의 가르침은 초선(初善) 중선(中善) 후선(後善)의 세 구절도 초월하기 때문이다.
초선(初善)은 범부와 성인, 색·소리·냄새·맛·촉감·생각과 세간과 출세간법에 티끌만큼의 애착도 가지지 않는다. 이미 애착하지 않게 되면 그 애착하지 않음에 생각이 눌러앉아 그것만을 옳다고 여기는데 이것을 일컬어 초선(初善)이라 한다. 이것은 조복된 마음[調伏心]에 스스로 안주하는 것이며, 강을 건넌 자가 타고 온 뗏목이 아까워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성문(聲聞)으로서 이승(二乘)의 도(道)에 지나지 않으며 선나과(禪那果)이다.
중선(中善)은 애착하지도 않고 애착하지 않는 마음에 눌러앉지도 않는다. 이러한 경계는 반자교(半字敎)로서 아직은 무색계(無色界)에 속하나 이승과 마군의 도에 떨어짐은 면한다. 그러나 선병(禪病)과 보살 행에 끄달림이 있다.
후선(後善)은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 앉지도 않고 눌러앉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 이것은 만자교(滿字敎)로서 무색계(無色界)에 떨어짐을 면하고 선을 닦는 병통에 떨어짐을 면하며 보살승에 떨어짐을 면하고 마왕의 지위에 떨어짐을 면한다. 그러나 지혜[智]에 막히고 지위[地]에 막히고 행(行)에 막혀 자기 불성(佛性)을 보는데는 마치 캄캄한 밤중에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
1
한 스님이 물었다.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 법화경 화성유품에 나오는 부처님)은 10겁(十劫)을 도량에 앉아 있었는데도 불법이 목전에 나타나지 않아서 불도를 이루지 못하였다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겁(劫)이란 '막힘' 또는 '머뭄'이라고도 하니 하나의 착함에 머물고 열 가지 착함에 막히는 것을 말한다. 인도에서는 부처[佛]라 하고, 이 땅에서는 그것을 깨달음[覺]이라 하는데, 자기에게 비추어 보아 깨달음[鑑覺]이 그 착함에 막히고 오히려 집착되므로 선근인(善根人)에게는 불성이 없다. 그러므로 '불법이 목전에 나타나지 않아 불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악에 부딪치는 대로 악에 머무는 것을 '중생의 깨달음'이라 하고, 선에 부딪치는 대로 선에 머무는 것을 '성문의 깨달음'이라 하며, 선·악 양쪽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음을 옳다고 여기는 자를 '이승의 깨달음' 또는 '벽지불의 깨달음'이라 한다.
선·악 양쪽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음을 '보살의 깨달음'이라 한다. 또한 머물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 것이 없다는 생각을 내지 않아야만 비로소 '부처의 깨달음'이라 하니, 마치 '부처가 부처에 머물지 않아야 진실한 복전(福田)이라 이름한다'고 한 것과 같은 이야기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홀연히 이를 체득한 자가 있다면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라 하니, 어디서나 스승이 되어 부처가 없는 곳에서는 부처라 하고, 법이 없는 곳에서는 법이라 하며, 스님 없는 곳에서는 스님이라 하며 '큰 법 바퀴를 굴린다'고 하는 것이다.“
도통한 옛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다. 불에 타고자 하면 탔고, 물에 빠지고자 하면 빠졌으며, 살겠다면 살았고, 죽겠다면 죽었다. 이렇게 가고 머물음이 자유로우니, 그에게는 자유로울 분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면 부처를 구하거나 보리·열반을 구할 필요가 없다. 만일 부처를 집착하고 구한다면 탐심에 속하며, 탐심이 변하여 병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 병 고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불법을 헐뜯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의 밥이란 신령하게 알아보는 자기 본성으로서 번뇌 없는 밥[無漏飯]·해탈밥[解脫飯]을 말한다. 이 말은 10지(十地)보살을 치료하는 것으로서 초발심부터 십지에 이르기까지이다. 지금 조금이라도 구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모두다 '파계승', '명자나한(名字羅漢)' 또는 '여우'라 이름하는데, 그들은 분명히 공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지금 메아리같이 고르게 소리를 듣고, 바람같이 평등하게 냄새를 맡으면서 일체 유·무 등의 법을 떠나고, 떠났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으면 이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허물도 얽어매지 못한다.
위 없는 보리·열반을 구하기 때문에 '출가'라고 이름하나 그래도 그것은 삿된 발원이다. 하물며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안다'하면서 세간에서 승부를 다투며 논쟁하는 경우이겠는가.한 문중을 탐하고 한 제자를 아끼며, 한 안주처에 연연해 하고 한 신도와 관계를 맺는다. 옷 한 벌, 밥 한 그릇, 명예 하나, 이익 하나에 다시 '나는 그 모두에 걸림이 없다'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속일 뿐이다.
불지(佛地)는 미세소지우(微細所知愚)와 극미세소지우(極微細所知愚)의 두 가지 어리석음[二愚]도 벗어난다. 그러므로 큰 지혜는 미진(微塵)을 타파하여 경전[經卷]을 벗어난다. 3구(三句: 三善)를 꿰뚫어 세 단계에 매이지 않는다면 교학[敎家]에서는 그것을 세 번 뛰어 그물에 벗어난 사슴에 비유하며 번뇌를 벗어난 부처라고 하는데 그를 구속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
이는 연등불(然燈佛) 이후의 부처님에 속하며 최상승(最上乘), 상상지(上上智)로서 불도(佛道) 위에 오른 것이다. 이 사람은 불성을 가졌으며 스승[導師]으로서 걸림없는 지혜를 구사한다. 그는 차츰 인과와 복덕 지혜를 자재하게 굴리니 수레를 만들어 인과를 실어 나르며 삶에 묶이지 않고 죽음에 이르러도 죽음에 매이지 않으며 5음(五陰)에 처하여도 문이 여닫히듯 행장이 자유롭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지위와 우열을 논할 것이 없으며 일상이 불가사의한 정토인 것이다.
부처다 보살이다 하는 것도 부스럼을 만드는 일이며, 있다 없다는 식으로 법을 설명하면 긁어 부스럼을 덧나게 만드는 행이다. 일체법은 모두 유·무에 포함되기에 수행력을 구분 지어놓은 십지보살(十地菩薩)은 탁류(濁流)가 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청류(淸流)가 된다.
지난날 10대제자 사리불·부루나·바른 믿음을 가진 아난·삿된 믿음을 가진 선성 등은 저마다 본보기나 법칙이 있었는데 모두들 부처님에게 설파 당했다. 그들은 팔만겁을 선정에 머무는 사선팔정(四禪八定)의 아라한은 아니었으나 행할 바를 의지하고 정법(淨法)에 집착하는 술(術)에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성문인(聲聞人)이 불법을 들으면 위없는 도를 행할 마음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선근(善根)을 끊는 사람이 되는데 경전[敎]에서는 이를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는 두려워할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부처란 중생편에서 쓰는 약이니 병이 없으면 먹을 필요가 없다. 약과 병이 없어지면 맑은 물과 같다. 스스로 알고 절로 깨닫는 이것이 자기 부처인줄 알지 못하고 밖으로 부처를 찾는다. 선지식의 설법을 의지하여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 술술 나오게 하는 약을 지어 구하여 밖으로 치달리던 병통을 치료한다. 이윽고 구하여 밖으로 치달리던 병이 낳으면 약은 버려야 한다. 또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데 집착한다면 그것은 선병(禪病)이며 영락없는 성문이다. 이러한 수행력은 마치 물이 얼음이 되면 얼음 자체가 물이긴 하나 목마름을 풀어주기 어려운 것과도 같다.
이런 경우는 스스로 묶인 병통이기에 세상 그 어떤 의원도 약 처방이 없는 속수무책에 놓여지게 된다.
선지식은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고 없음[無]에서 집착하지 않아서 십구(十句) 마군의 말[분별상]을 벗어나 있기에 말을 꺼내도 사람을 얽어매지 않는다. 그는 설법을 해도 스승이라 자칭하지 않고 말뜻이 골짜기를 가득 채우는 메아리 같아 허물이 없다. 만일 "나는 설법할 수 있다"라든가 "나는 스승이고 너는 제자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군이다.또 "눈빛 부딪치는 곳에 도가 있다"라든지 "부처는 부처가 아니다"라고 한다든지 또는 보리·열반·해탈 등등을 열거하면서 근거 없는 말을 한다. 또한 알음알이를 근거 없이 설명하며 한 손가락을 들고 세우고 "이것이 선(禪)이고 도(道)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람을 얽어매는 것으로 수행자에게 결박만 더하게 하는데 이런 자는 말을 하지 아니해도 구업(口業)을 짓는 것과 같기에 마음마저도 스승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평등한 진여법계(眞如法界)는 부처도 없고 그러기에 중생을 제도하지도 않는다. 싹을 보고 토질을 알아내듯 주·객관이 분명하며, 세간 출세간 법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나 중생의 분별하는 성품은 한번도 부처님의 단계를 밟은 적이 없기 때문에 시시때때로 모든 법에 끈끈하게 집착한다. 그들은 잠깐 묘한 이치를 맛보아도 약이 되지 못하며 잠깐 틀을 벗어난 도리를 들어도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 이렇기 때문에 깨친 후에는 중생을 위한 설법에 깊은 고뇌를 하게 된다.
'본래 청정하다'거나 '본래 해탈하였다'는 데에 집착하여 지금 이대로가 바로 부처이며 선도(禪道)를 이해했다고 자처하는 자는 자연외도(自然外道)에 속하며, 한편 인연에 집착하여 닦아 증득을 이루는 자는 인연외도(因緣外道)에 속한다. 유(有)에 집착하면 상견외도(常見外道)에, 무(無)에 집착하면 단견외도(斷見外道)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는 데 집착하면 변견외도(邊見外道)에,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非有非無]는 데에 집착하면 공견외도(空見外道) 또는 우치외도(愚痴外道)에 속한다.
부처다 열반이다 하는 등의 견해를 내지 않기만 하면 된다. 유·무 등 모든 견해가 전혀 없으며 견해가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봄[正見]이라 한다. 또한 아무 것도 들음이 없고, 들음이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들음[正聞]이라 하며, 이것을 두고 외도를 꺾었다 하는 것이다. 또한 범부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아주 신통한 주문[大神呪]이며, 이승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아주 밝은 주문[大明呪]이며, 보살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가장 높은 주문[無上呪]이며, 나아가 부처라는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견줄 바 없는 주문[無等等呪]이다. 중생 아수라를 변화시키고 2승 아수라를 변화시키며, 보살 아수라를 변화시키니, 이렇게 하여 3변정토(三變淨土)가 되는 것이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거든 상대적인 개념을 끊기만 하면 된다. 분별에서 해방되면 어떠한 테두리도 그를 매어두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는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 높낮이와 평등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다. 방편을 떠나 마음에 조금이라도 알음알이를 낼 틈을 준다면 또다시 테두리에 매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