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佛敎와 인간 관계

 

I. 들어가는 말

올바른 인간관계의 정립을 위한 깊은 성찰과 해결방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의 모든 종교, 철학, 사상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심리학, 경영학, 조직론 및 커뮤니케이션 이론, 정신분석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왔다. 현재 우리 사회에 보편화된 주요 인간관계에 대한 이론이나 해결 방법을 들라고 하면 그 하나는 서구에서 발달한 과학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형성된 것과 다른 하나는 충 · 효를 강조하고 예절과 사회적 질서를 강조하는 유교적 가르침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역사를 되돌아 볼 때, 고등 종교로서 가장 먼저 정착을 했고 우리의 삶 속에 깊이 있게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이다. 이는 우리의 언어 속에 숨어있는 수많은 불교적 용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정녕 그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으로 그 가르침을 생활 속에 바르게 구현하는 것인지를 밝혀 보고자 하는 노력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본다. 이제 물질문명에 지치고, 분석적이고 논리적으로 삶의 문제를 접근하면서 이해하고 풀어보려던 서양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 한계성을 느끼고 점차 동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불교사상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진리란 무엇이며, 인간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서양의 식자들이 불교의 수행방법인 참선(參禪)을 생활 속에 접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가 하면, 상품의 디자인까지도 불교의 선(禪)에서 추구하는 가치를 도입하고자 노력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본 글에서는 이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무엇이며 이를 우리의 실생활에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하는 측면을 인간관계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석가모니가 제시하는 세계관과 인간관은 무엇인가 중점적으로 알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석가모니가 생각하는 인간관계 문제의 근원은 무엇이며 이의 해결을 위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II. 불교의 세계관과 인간관

1. 세계관

석가모니가 6년 동안의 고행 끝에 깨달은 것은 존재의 실상이라고 한다. 즉 이세상의 모든 만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깨우쳤다는 것이다. 가부경전에는 "참으로 진지하게 사유하여 일체 존재가 밝혀졌을 때, 그의 의혹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깨우친 존재의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연기(緣起)의 진리다. 즉 모든 것은 '말미암아'(緣) '일어난다'(起)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일어난다(此起故彼起)" 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의지하여 그 형상을 이루고 있으므로 모두가 다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작은 변화는 곧 연기적으로 다른 것에 영향을 미쳐 변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지속적으로 변화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에 모든 것은 한 몸이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활물(活物)이라는 것이다. 이를 불교적 용어로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표현한다.

제행무상은 연기하는 실상을 시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항상(恒常)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산이나 바위는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구성의 밀도가 강한 고체로 이루어져 변화의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변화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인간 삶에 이 제행무상의 개념을 적용시켜 보면 내가 가진 권력, 사랑, 미움, 아름다움 모두 다 변화하는 과정에 나타난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그 현상을 사랑, 행복, 권력으로 인지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탐욕으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 우리의 오감을 통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무상하다.

제법무아는 이 연기적 현상을 공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모든 것들은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만의 유일한 특성을 간직한 채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든 존재는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하고 있어 그 관계가 변화하는 순간 그것이 가진 특성도 변화하게 된다. 가장 간단한 예로 물은 산소와 수소가 서로 관계를 맺고 있으므로 존재하고 있다. 만약 그 중에 하나의 원소가 떨어져 나가면 물이 가지는 특성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물질로 변화한다. 따라서 물이라고 하는 단독 입자로서의 체성[我]은 있을 수 없으며 단지 원소들의 관계 속에 나타난 관계적 산물일 뿐이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부품들이 서로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동차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지만 그 부품들의 관계가 변하면 트랙터라고 하는 새로운 물체로 재구성될 수 있다. 따라서 자동차라고 하는 스스로의 자성을 가진 존재는 없다. 단지 여러 구성 요소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일시적인 관계의 산물일 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것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존재하고 있다는 공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든 것은 무아(無我)라는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세계관으로 볼 때 우리는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대할 수 없다. 풀 한 포기조차 홀로 존재할 수 없는 온 우주가 어우러져서 만들어낸 산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 속의 모든 것 하나 하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하물며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나'(self)라고 하는 존재를 생각하면 작게는 부모를 비롯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 크게는 온 우주의 도움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한없이 소중한 존재이다. 다른 한편으로 내가 아무리 잘났다고 소리쳐 보아도 나는 세상의 만물들과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나라고 주장할 바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연기과정에 일시적으로 형상화된 자신을 대상화하여 나라고 생각하며 온갖 이기적인 마음을 내어 세상을 자기식대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 삶의 허구성은 불교에서 보는 인간관에 좀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2. 인간관

불교에서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는 중요한 이론은 오온(五蘊)설이다. 즉 인간은 다섯 가지 요소가 쌓여서 형성된 것으로, 우리가 '나'다 라고 하는 존재는 몸[色], 감정[受], 지성[想], 의지[行], 의식[識]의 다섯 가지 요소[五]들의 작용이 쌓여서[蘊] 형성되어졌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을 지칭하는 색(色)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몸은 고체[地], 액체[水], 기체[火], 그리고 에너지[風]의 네 가지 요소들의 조합물로서 눈, 코, 입, 귀, 촉각, 그리고 사고력의 6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몸은 이러한 기능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의 외부와 내부를 접촉하면서 무엇이 있다고 하는 감촉을 만들어 내고 있다. 따라서 몸은 육체의 연기적 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감촉들의 쌓임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잡아함경에 의하면 색을 "불, 파리, 뱀과 같은 외부적인 요인들이나 배고픔, 피곤함, 목마름 등과 같은 내부적인 요인들로 인한 거슬리는 감촉 즉 '거리낌'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몸을 지칭하는 색이라고 함은 육체의 덩어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가진 여섯 가지의 기능을 통해 발생하는 '거리낌'이라고 하는 감촉들이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변화하는 형체를 지칭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육체적인 작용을 통해 형성된 감촉은 느낌[受], 지성[想], 의지[行], 의식[識] 등의 4가지 마음 작용과 연결된다. 먼저 우리가 감촉을 가지게 되면 곧 좋다, 싫다 또는 좋지도 싫지도 않다는 느낌이라든지 쾌감을 주는 것, 기쁨을 주는 것, 슬픔을 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것을 수(受)라고 한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감지하게 되면 그 대상의 색깔, 소리, 무게, 크기, 맛 등에 대해 구분하고 헤아리는 마음을 낸다. 다시 말해 그 대상의 색깔이 무엇이며, 크기는 얼마나 크고, 무게는 얼마나 나가는지 헤아리게 된다. 이러한 마음의 지성적 작용을 상(想)이라고 한다. 느낌 및 지성적 작용과 더불어 우리 마음속에는 먹고 싶고, 피하고 싶고, 사고 싶고, 만나고 싶다고 하는 의지적 작용이 일어난다. 이러한 마음의 의지적 작용을 행(行)이라고 한다. 마음속의 느낌, 지성, 및 의지작용은 지각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통해 통합되고 재구성되어 의미가 만들어져 우리의 의식 속에 축적되어진다. 이렇게 지각하고 판단하며 이것을 저장하는 마음의 작용을 식(識)이라고 표현한다. 이 의식은 몸에서 오는 감촉, 감정, 지성, 및 의지의 4가지 작용을 총괄하면서 이들로부터 발생하는 사항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들을 저장하며 지속적으로 변화를 거듭하면서 성장하고 발전하게 된다. 이때 의식은 자신을 스스로 영속적으로 불변하는 자아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에 대한 강한 집착심을 가지게 된다.(이중재, 1996)

잡아함경 대장정에 보면 "4食이 있어 중생을 기르며 세간에 머물면서 자라게 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때 '4食' 즉 4가지의 먹거리란 몸을 통해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감촉과 마음의 작용인 감정, 지성 및 의지를 의미한다. 따라서 중생은 이 네 가지를 토대로 형성되는 의식 작용에 따라 움직이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또한 잡아함경에 " 의식을 종자로 4온[색, 수, 상, 행]을 땅으로 그리고 욕탐(慾貪)을 물로 하여 자라나고 그 열매를 맺는다" 라고 하는 비유가 나온다. 이는 의식 작용은 우리 삶의 중심이고 이는 몸의 감촉, 감정, 지성, 의지를 토대로 형성되어 가는 데 이 형성과정에 자기중심적인 탐욕이라는 요소가 가미되어 그 의식작용의 성장과 구성을 특징 지운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오온설을 바탕으로 불교의 인간관을 정리해보면, 인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독립적인 존재로 살아가다가 죽어 가는 하나의 객체가 아니다. 즉 자아(self)란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재구성되는 의식작용을 의미하며, 이 의식은 육체적 감촉과 감정, 지성, 의지작용을 원료로 하고 탐욕이 원동력이 되어 끊임없는 구성을 거듭한다. 단지 인간은 이 의식작용을 대상화하여 나라고 생각하고, 존재로 생각하며,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것들은 더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것들은 배척하면서 변화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나'라고 하는 존재[being]가 있다고 하는 생각은 착각일 뿐이라고 본다. 자아는 탐욕을 원동력으로 하는 육체적 감촉, 감정, 지성, 의지작용들이 쌓이면서 변화를 거듭하는 의식작용의 영원한 진행형[becoming]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에서 바라보는 인간관과 인간관계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자 하면 인간의 [의식] 구성과 그 작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III. 인간의식의 구성과 작용

불교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는 모든 것은 마음의 조화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음이란 [의식]을 의미한다. 육조단경에는 "일체의 모든 법이 자신의 마음속에 존재한다.[萬法盡在自身心]" 라고 하는 말이 있다. 이러한 표현들은 불교의 핵심이 곧 의식작용을 이해하는 데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불교를 '마음의 종교'라고도 표현한다.

불교에서는 마음 즉, 의식은 8가지 다른 종류의 의식[八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즉 안식[시각], 이식[청각], 비식[후각], 설식[미각], 신식[촉각], 의식[제6식], 말나식[제7식], 아뢰아식[제8식]이 그것이다. 이 8가지 식(識)은 다시 크게 일반적으로 표층에 드러나서 작용하는 외부의식(오감 및 의식), 자기중심적인 사고를 일으키는 자아의식[말나식], 그리고 가장 심층의 밑바탕에서 모든 의식작용에 결과를 저장하고 있으면서 모든 의식작용의 모체가 되는 심층의식[아뢰아식]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외부의식

외부의식은 우리의 오관 즉 눈, 코, 입, 귀, 몸을 중심으로 작용하는 전오식(前五識)과 감정, 지성, 및 의지의 작용의 중심이 되는 제6식인 [意識]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전오식이라고 함은 앞의 오온설에서 설명한 육체의 오관 기능을 통해 형성되는 감촉을 의미하며, 의식(意識)이란 오온에서 인간의 정신작용을 의미하는 느낌[受], 지성[想], 의지[行], 의식[識]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오식을 통해 형성된 감촉은 제6식인 의식에서 그것이 무엇이며 어떤 뜻인가 하는 판단을 내리게 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 안될 것은 의식은 무조건 외부의 것을 받아들여 해석하고 판단하고 감정을 일으키는 수동적 역할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의식은 전오식과 상관없이 스스로 추상적인 상상을 하기도 하고,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기억을 자료로 인지, 지각, 판단을 하기도 한다.

의식은 현재 생각 바로 직전의 생각과 그리고 자아의식[말나식]을 뿌리로 하여 작용한다고 한다.(太田久紀, 1992) 또한 그 동안의 경험과 의식작용을 축적하고 있는 심층의식[아뢰아식]도 이 의식 작용에 주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의식 작용은 심층의식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아의식과 직전의 사고를 토대로 형성된다. 전오식을 통해 외부와의 접촉할 때도 이렇게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거기에 요구되는 최적의 행동을 취한다고 하기보다는 과거의 경험과 자기중심적인 사고 등에 묶이어 존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고정된 관념의 틀 안에서 이해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2. 자아의식

자아의식은 언제나 무슨 일을 하든 인간의 의식작용의 뿌리가 된다 하지만 다른 의식의 작용과 달리 항상 은밀히 작용을 하는 특성을 가진다. 늘 드러나지 않게 모든 인간 의식작용의 저변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자아의식을 분석해보면 주로 다섯 가지의 심적 작용이 내재되어 있는 데 아치(我癡), 아만(我慢), 아견(我見), 아애(我愛), 혜(慧)가 그 것이다.

첫째 자아의식은 어리석어서 자아가 독립적인 객체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전 우주적 큰 힘과 하나라는 것을 잘 모른다.[아치]
둘째 자기의 견해에 묶여 있어 겸손하게 남의 의견을 수용하고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아견]
셋째 남에게 항상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의 주장만이 옳다고 하는 생각에 빠져 있도록 한다.[아만]
넷째 자아에 대한 애착 때문에 탐욕심을 내고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가도록 한다.[아애]

마지막으로 여러 가지를 따지고 분별하며 자신에게 유익한 것들을 선택할 수 있는 심적 작용인 혜(慧)의 작용까지 같이 있어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따지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강구하는 마음을 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이러한 자아의식은 우리 의식과정에 항상 작용하면서도 겉으로 보아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자아의식 작용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은 심층의식 즉 아뢰아식이다. 따라서 인간은 항상 심층의식을 자아로 생각하고 그것을 토대로 모든 자기 집착심을 낸다.

3. 심층의식

심층의식은 인간의 의식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로 무기성(無記性)을 근본으로 한다. 즉 심층의식은 원래 무색 투명하여 선성(善性)에도 속하지 않고 악성(惡性)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층의식은 인간의 모든 경험과 행위의 결과를 축적하여 놓는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이를 저장할 장(藏)자를 써서 장식(藏識)이라고도 표현한다.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축적되어진 모든 경험과 행위의 결과는 물론 태어나기 이전의 경험도 바로 이 심층의식 속에 축적되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심층의식에 축적된 그 동안의 경험과 행위의 결과로 인해 인간들은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게 된다. 즉 불교에서는 우리가 악한 행동을 하면 후에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게 된다고 보는데 그 이유는 심층의식에 그러한 정보가 다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심층의식에 축적된 정보들은 나중에 외부의 특정한 인연을 만나게 되면 그 과보를 낳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심층의식을 때로는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닌 심층의식은 곧 우리가 바깥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고 인식을 할 때 그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똑같은 산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그 산에 가서 어떠한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그 산은 다르게 인식될 것이다. 즉 그 산에서 사고를 당한 사람과 그 산에서 산나물을 캔 사람은 그 산을 바라볼 때 달리 인식할 것이다. 이렇게 심층의식에 축적된 경험은 인간이 세상의 만물을 보는 지각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심층의식은 자신이 어떠한 생각과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변화하게 된다. 이 변화과정을 훈습(薰習)이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훈습이라고 하면 점차적으로 촉촉하게 배어 든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향을 피우면 그 냄새가 우리 옷에 배어 들듯이 그렇게 자기의 생활태도와 방식에 따라 심층의식도 훈습되어 변화한다. 이 심층의식의 훈습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로서 등류습기(等流習氣)와 이숙습기(異熟習氣)라는 표현이 있다. 등류습기라고 함은 심층의식에 행위결과가 저장될 때 변함없이 있는 그대로 저장되고 그것이 종자가 되어 나중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과보를 받을 때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받게 된다는 의미다. 즉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는 것처럼 선업(善業)은 선과(善果)를 그리고 악업(惡業)은 악과(惡果)를 가져옴을 의미한다. 하지만 심층의식의 작용에 있어서의 인과관계는 이렇게 단선적인 것이 아니라 복잡하면서도 역동적이다. 한 행위의 결과가 심층의식에 축적되어 하나의 과보로 나타날 때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다르게 익어서[熟] 예상 밖의 결과로 나타난다고 하여 이숙습기라고 표현한다.

그러면 왜 이러한 이숙습기 현상이 나타나는가? 일단 선천적으로 심층의식에 축적된 과거 행위의 결과는 하나의 원인이 되어 인연을 만나면 한 행위가 형성되고 그 행위 결과는 또 다시 심층의식에 축적된다. 이렇게 심층의식에 축적된 과거행위 결과는 새로운 행위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그 행위의 결과는 다시 심층의식에 저장되며 이는 또 다른 새로운 행위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영속적인 순환과정이 바로 우리의 삶의 과정이라고 불교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은 새롭게 지속적으로 심층의식에 축적되어지는 행위의 결과물은 이미 심층의식 속에 축적된 기존 내용물의 특성을 변화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즉 현재 우리의 행위는 그 동안 심층의식에 축적된 기존의 행위결과물과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면서 서서히 그 속성을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심층의식은 지속적으로 그 속성을 달리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과보도 다른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이 결과로 설사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지속적으로 선행을 하게 되면 과거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 축적된 심층의식의 악업(惡業)은 점차 희석이 되어 그 과보는 다르게 형성되는 이숙습기 현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심층의식의 변화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우리의 자성은 없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의식의 작용만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영구 불변의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아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주어진 운명에 따라 결정된 인생의 항로를 갈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가 아니라 운명의 창조자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지속적으로 선행을 하면 어느 순간에 우리의 심층의식은 그 특성이 변화하여 좋은 과보를 낳을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된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는 피조물이요 주어진 대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적 존재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우리가 어떠한 실천적인 삶을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업장(業藏)이 아무리 두텁다고 해도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우리의 심층의식을 정화시키면서 바른 덕을 쌓아 가면 현생에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은 분명 희망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IV. 불교에서 본 인간관계

1. 인간관계의 중요성과 주체

불교의 세계관을 통해 이 세상의 만물은 연기적 산물이며 인연에 따라 생주이멸(生住離滅)하는 그 자체임을 살펴본 바 있다. 즉 모든 것은 서로가 의지하면서 존재하고 그 관계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실제의 모습이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인간관계도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다.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내가 누군가 하는 것은 곧 누구와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즉 '나'라고 하는 실체는 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누구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나는 부모와 함께 있으면 자식이 되고, 직장의 부하와 있으면 상사가 되고, 동생과 있으면 형이 된다. 이러한 불교적 시각에 비추어 보면 타인은 나의 특성을 결정해주며 나를 현재의 내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나의 일부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야말로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개념의 하나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바른 스승을 만나고 함께 공부하는 바른 동료들을 만나는 것이 인생의 전부다"라고까지 표현했다.

우리가 특정인과 만나서 서로간의 관계를 맺게 되는 이유를 불교에서는 '인연'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자칫 인간관계를 숙명론에 치우친 해석으로 몰고 갈 수 있는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이는 불교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불교에서 인연의 형성은 그 인연의 주체가 되는 당사자의 적극적인 역할을 전제로 하고 있다. 모든 연기과정의 중심이 되는 당사자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느냐 하는 것은 어떠한 연을 형성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요한 변수가 된다고 본다. 자신이 살아오면서 축적한 몸[身], 입[口], 그리고 마음[意]으로 지은 모든 행위결과는 그냥 그대로 업(業)이 되어 누구와 어떠한 관계를 형성·발전시키게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결정변수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관계는 내가 그 동안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가를 설명해주는 지표다. 미래에 내가 누구와 어떠한 관계 속에서 인생을 펼쳐갈 것인가 하는 것은 현재의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따라서 현재 나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행 · 불행도 내가 만들어온 필연이요 나는 그 관계를 있게 한 주체요 책임자다. 아무리 뜻하지 않는 상황에서 인간관계를 통해 고통을 받아도 그것은 내가 만들어 내가 받는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고 보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인간은 단지 이것을 잘 알지 못해 상대방을 원망하고, 부모를 원망하며 주위 사람들을 원망하고 살아갈 뿐이다. 모든 인간관계의 주체는 자신이요, 그리고 자신에게 불어 닥치는 어떠한 행· 불행의 원인은 곧 나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불교에서 시사해주는 인간관계에 대한 메시지이다. 따라서 어떠한 관계 속에서 겪는 괴로움도 우리는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기쁨도 기뻐할 큰 이유가 없다. 내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인간관계 상의 문제를 겸허하게 수용하고 새로운 관계를 위해 옛 성현들의 가르침에 따라 바르게 살아감이 중요하다는 것을 불교는 가르치고 있다.

2. 문제의 뿌리

사람들은 살아가는 동안 가족과의 관계, 직장 내(內) 상사나 동료와의 관계에서 많은 문제에 직면한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 괴로워한다. 그 동안 학문적인 차원에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의 원인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어 왔고 그 답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관계 문제 발생의 원인을 욕구불만, 성격상의 차이, 이해의 부족, 성장과정의 심리적 결함, 인격의 미성숙 등의 개인적인 이유에서 설명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는 인간관계의 문제를 커뮤니케이션이 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경영학이나 조직학에서는 개인의 문제는 물론 업무의 특성이나, 리더십, 조직문화 등 여러 가지 상황변수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그러면 불교에서는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고 있나하면 인간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개인이 인(因)이라고 하면 주변 상황은 연(緣)이 된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인과 연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에 개인과 상황 모두가 문제 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먼저 그 문제 발생 주체인 당사자 자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즉 개인에게 그 근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무엇이 문제인가? 한마디로 무명(無明)이 가장 근본적인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라고 본다. 무명이라 함은 '어두움' '밝게 깨우쳐 알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 밝게 깨우쳐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즉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밝게 깨우쳐 알지 못한다고 하는 의미이다.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지속적으로 함께 변화하는 존재이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은 서로가 연결된 한 몸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단어가 자비(慈悲)이다. 자(慈)는 함께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성공을 나의 기쁨으로 느끼고 같이 감사해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비(悲)는 타인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같이 슬퍼하고 걱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원래 이렇게 자비적 삶을 살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무명에 쌓이고 이기심에 노예가 되어 우리 모두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밝게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남의 아픔을 보고 지나쳐 버리고 남의 기쁨을 시기하고 질투한 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명으로 인한 타인들과의 연결고리의 단절을 주된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한방에 불인(不仁)이라고 하는 병이 있다고 한다. 이는 몸의 일부분이 마비 증세가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가 팔이 마비가 되어 있으면 아무리 팔의 일부가 썩어 들어가도 잘 느낄 수 없듯이 우리는 무명으로 인해 모두가 한 몸이라고 하는 감각이 마비되어 나 아닌 타인의 아픔, 고민, 그리고 괴로움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방관하거나 심하면 더욱 그 사람의 단점을 꼬집고 비판한다. 이렇게 무명이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불교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또 인간관계의 또 다른 문제점은 원래 '나'라고 할 것이 없는 데 연기과정에 나타난 일시적인 모습을 나라고 생각하고 집착심을 내는 것이다. 이미 오온설에서 살펴보았듯이 나는 다섯 가지의 요소들이 모여 형성된 일시적인 복합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대상화하여 '나'라고 생각하고 그 허상을 잡고 욕심을 내고 존립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이러한 전도(顚倒)된 사고 때문에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취하려고 노력하고 불리한 것은 배척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인간관계의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의식작용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식대로 생각하고 자기의 관점에서만 문제를 이해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노력하니 타인과의 마찰은 불가피하며, 서로 오해하고 원한을 사며 질시하는 욕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즉 내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집착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불교에서 보는 인간관계의 또 다른 문제의 주요 원인이다.

V. 인간 관계를 위한 바른 길

그러면 우리는 바람직한 인간 관계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깊이 사무치게 깨달아 알고 마음속에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욕심을 제거하는 것만이 인간관계의 문제들을 없애는 길이다. 석가모니는 바로 이 길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그 동안 살아온 습관에 의해 우리는 길들여져 있다. 이미 의식의 구성과 작용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아집, 아만, 아애를 바탕으로 엮어온 과거부터 경험과 의식작용이 그대로 내 심층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고, 그것이 나의 행동과 의식작용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그 동안 살아온 방식과 질서 패턴으로부터 탈피할 수 없다고 불교에서는 본다. 하지만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작용을 스스로 돌아보고 바른 삶을 정립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다. 석가모니는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바탕으로 하는 삶을 통해서만이 어둠과 욕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인간관계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고 흔들림 없이 바른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 여덟 가지 바른 길이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定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이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여덟가지 바른 길(八正道)

팔정도는, 인간관계 측면에서 보면, 인간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만 바른 삶을 살수 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고통 없이 대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보편 타당한 행위의 법칙이다. 이 팔정도는 계(戒)·정(定)·혜(慧)의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이 가능하다. 계는 인간의 바른 행위에 관한 문제이고, 정은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번뇌에 흔들림이 없이 순수의식으로 귀착하는 수행에 관한 것이며, 혜(慧)는 순수의식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마음 작용에 관한 것이다.

계(戒) [正語, 正業, 正命]

바른 인간관계는 상대방 행동의 변화나, 타협 또는 서로간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방법보다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바른 행동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행동일까? 우선 말이 바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남을 비웃고, 비방하고, 이중적인 말을 하지 말고, 순수하면서도 부드럽고, 분명하면서도 때에 맞는 말을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정어(正語)이다. 그 다음에 행위가 바라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해치고, 속이며, 음란하며, 흐트러진 삶을 통해서는 바른 인간관계를 엮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업(正業)이다. 마지막으로 정정당당하고 모든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생업을 찾아 그것에 충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생업이 다른 이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삶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책임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정명(正命)이다.

정(定) [正精進, 正念, 正定]

바른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자신의 내적 정화를 위한 끊임없는 수행과 노력이 필요하며 그를 통해 성취한 흔들림 없는 삶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자신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출몰하는 여러 가지의 번뇌를 버리고 탐욕에 흔들림이 없이 맑고 티없는 순수한 원래의 마음자리로 돌아가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속에 시시각각으로 출몰하는 탐내고, 성내며, 어리석은 생각들을 지속적으로 덜어내는 것, 즉 아집과 번뇌에 끄달리지 않고 순수한 우리의 본래 성품으로 돌아가려는 간단없는 정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정진이다. 다음으로 바른 생각 즉 정념(正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념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몸[身], 느낌[受], 마음[心], 그리고 세상의 존재의 실상[法]들을 바르게 고찰하고 생각해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늙어가고 소멸되어 가고 있는 몸을 관찰함으로써 자신 몸에 대한 집착심을 없애고, 간사한 우리 느낌, 허망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관찰함으로서 탐욕과 성내는 마음을 잠재우고, 그리고 무상하게 변해 가는 존재들을 바라보고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바깥 세상의 잡다한 유혹으로부터 벗어 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하고 평정되고 집중된 마음과 힘을 가지고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을 간절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정정(正定)이다.

혜(慧)[ 正見, 正思]

진정으로 행복한 삶과 바른 인간관계를 위한 지혜는 실상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시각을 바탕으로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존재에 대한 바른 이해이고 시각을 바르게 갖는 것일까. 연기설에서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온 우주와 한 몸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모든 사물과 사건을 보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존재하는 것은 온 우주적인 작용과 연기과정을 통해서 가능하였다는 연기의 실상을 여실하게 아는 것이 바로 정견(正見)이다. 다음으로 정사(正思)라고 함은 우리의 시각을 나라고 생각하는 자신과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에다 두지 않고 전 우주적인 모든 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에 기준을 두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해치지 않고[不害]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정사(正思)이다. 이렇게 연결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실상에 대해 바르게 알고 나의 입장에서가 아닌 전 우주적 입장에서 사랑과 자비로서 살아갈 때 우리에게 지혜의 광명이 발하여 자연의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 수 있고 모든 이들과 바른 관계를 정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불교에서 제시하는 인간관계의 바른 길은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자신의 삶을 바르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것이다. 바깥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고, 나의 삶을 바로 세우고 내 마음을 정화하고 이기적인 자기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주위에 모든 이들을 나의 몸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전환시킬 때 바른 인간관계는 당연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VI. 맺는 말

본 글에서는 주로 세계관과 인간관을 중심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다. 불교에서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의 핵심은 어디에 있다고 보고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하는 것을 피력하였다.

역설적인 결론일는지 모르지만 불교적 관점으로 볼 때 바른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갈등을 해소하고, 타협하고, 조정하며 해결책을 찾기 위해 작위로 노력하지 말라는 것이다. 초래된 혼돈은 자신이 만든 자신의 삶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을 겸허하게 수용하고 또 올바른 인간 관계 성립을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삶을 성찰하여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켜 가라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바른 행위의 보편적 법칙이 있으니 그것이 팔정도이다.

자기 중심적인 이기심과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을 버리고 성현(聖賢)의 향훈(香薰)을 토대로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정화시키면, 삶의 지혜가 솟아나고 자유분방한 행동에서도 예(禮)에 어긋남이 없는 참된 삶과 행복을 맛볼 수 있다. 이는 현실 속에서 철저하게 정도(正道)에 입각한 실천적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 바른 인간 관계를 위한 불교의 가르침이다.

  참고문헌

  "불교심리학" 1996 <시공사> - 루네 E.A. 요한슨[박태섭 역]
  "인간관계론" 1999 <학현사> 송운석
  "유식학 입문" <불광출판부> 오형근
  "아함의 중도체계" 1995 <불광출판부> 이중표
  "놓고 비우고 버리기" 1997 <도서출판 여래> 장명화
  "인간의 자아실현" 1998 <나남> 정범모
  "통일불교성전" 1994 대한불교 진흥원
  "불교의 심층심리" 1992 太田久紀[정병조 역]
  "What Buddha Taught" 1959 Grove Press, Inc. New York. [Sri Rahula]
  "
http://www.zenkorea.org"

I. 학문적 영역에서 인간 관계에 접근하는 일반적인 例

(연습)

  1. 내 자신이 가장 내세울만한 장점은 ---라고 할 수 있다.
  2. 나의 단점이 있다면 ---라고 할 수 있다.
  3. 나는 상대방이 나를 대할 때 ---게 대해 주었으면 한다.
     또한 그러한 상대가 되려고 나는 노력하고 있다.
  4. 내가 생각하기에 서로간의 믿음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5. (자신의 그룹에서 한 사람을 지적해서) 내가 보기에 상대방이
     8살 때는---한 어린이였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6. 이 대화가 끝난 후 집단 구성원에 대한 느낌은 처음과 어떻게 달라졌나?

◇ 조하리 창 ◇

 

자신이 모르는 부분

자신이 아는부분

 

자신이 아는부분

자신이 모르는 부분

 

타인이 아는 부분

맹점영역

공개영역

 

공개영역

맹점영역

타인이
아는 부분

타인이 모르는 부분

미지영역

비공개영역

 

비공개영역

미지영역

타인이
모르는 부분

◇ 조하리 창 ◇

 

→

피드백

 

 

 

 

↓

공개영역

맹점영역

 

공개영역

맹점
영역

 

자아
개방

비공개영역

미지영역

 

비공개영역

미지
영역

 

 

II. 불교적인 시각에서 보는 인간관계 문제의 뿌리

불교에서는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을 어디에서 찾고 있나, 물론 인간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개인이 인(因)이라고 하면 주변 상황은 연(緣)이 된다. 인간관계의 문제는 인과 연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에 개인과 상황 모두가 문제 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는 먼저 그 문제 발생 주체인 당사자 자신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고 있다. 즉 개인에게 그 근본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개인의 무엇이 문제인가? 한마디로 무명[無明 또는 業識]이 인간관계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본다. 무명이라 함은 '어두움' '밝게 깨우쳐 알지 못함'을 의미한다. 그러면 무엇에 대해 밝게 깨우쳐 알지 못한다는 말인가? 즉 모든 존재의 실상을 밝게 깨우쳐 알지 못한다고 하는 의미이다. 이미 앞에서 말했듯이 모든 사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지속적으로 함께 변화하는 존재이기에 사람들 역시 서로가 한 몸으로 연결되어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사상의 핵심은 자비(慈悲)이다. 자(慈)는 함께 기뻐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기쁨과 성공을 나의 기쁨으로 느끼고 같이 감사해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비(悲)는 타인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받아들이고 같이 슬퍼하고 걱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원래 이렇게 자비로운 삶을 살도록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무명에 쌓이고 이기심에 노예가 되어 우리 모두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밝게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남의 아픔을 보고 지나쳐 버리고 남의 기쁨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명으로 인한 타인들과의 연결고리의 단절을 주된 원인으로 보는 것이다.

한방에 불인(不仁)이라고 하는 병이 있다고 한다. 이는 몸의 일부분이 마비 증세가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우리가 팔이 마비가 되어 있으면 아무리 팔의 일부가 썩어 들어가도 잘 느낄 수 없듯이 우리는 무명으로 인해 모두가 한 몸이라고 하는 감각이 마비되어 나 아닌 타인의 아픔, 고민, 그리고 괴로움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방관하거나 심하면 더욱 그 사람의 단점을 꼬집고 비판한다. 이렇게 무명이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라고 불교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인간관계의 또 다른 문제점은 원래 '나'라고 할 것이 없는 데 연기과정에 나타난 일시적인 모습을 나라고 생각하고 집착심을 내는 것이다. 이미 오온설(五蘊說)에서 살펴보았듯이 나[我]라는 존재는 다섯 가지의 요소[색, 수, 상, 행, 식]들이 모여 형성된 일시적인 복합체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대상화하여 '나'라고 생각하고 그 허상을 잡고 욕심을 내고 존립을 위하여 몸부림친다. 이러한 전도(顚倒)된 사고 때문에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며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취하려고 노력하고 불리한 것은 배척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인간관계의 문제가 발생한다. 또한 의식작용에서 살펴보았듯이 어떠한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식대로 생각하고 자기의 관점에서만 문제를 이해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노력하니 타인과의 마찰은 불가피하며, 서로 오해하고 원한을 사며 질시하는 욕탐의 삶에서 헤어나지 못할 수밖에 없다. 즉 내가 있다는 생각으로 집착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불교에서 보는 인간관계의 또 다른 문제의 주요 원인이다.

III. 인간관계를 위한 바른 길

그러면 우리는 바람직한 인간 관계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인간관계의 근본적인 문제를 깊이 사무치게 깨달아 알고 마음속에 지속적으로 출몰하는 욕심을 제거하는 것만이 인간관계의 문제들을 없애는 길이다. 석가세존은 바로 이 길을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동안 살아온 습관에 길들여져 있다. 이미 의식의 구성과 작용을 통해 살펴보았듯이 아집, 아만, 아애를 바탕으로 엮어온 과거부터 경험과 의식작용이 그대로 내 심층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고, 그것이 나의 행동과 의식작용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 동안 살아온 방식과 질서패턴으로부터 쉽게 탈피할 수 없다고 불교에서는 본다. 하지만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작용을 스스로 돌아보고 바른 삶을 정립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여덟 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바탕으로 하는 삶을 통해서만이 어둠과 욕탐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온갖 인간관계의 문제들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정을 얻고 흔들림 없이 바른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 여덟 가지 바른 길이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定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결론적으로 불교에서 제시하는 인간관계의 바른 길은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자신의 삶을 바르게 하는 것이 최 우선이라는 것이다. 바깥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내 안에서 찾고, 나의 삶을 바로 세우고 내 마음을 정화하고 이기적인 자기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주위에 모든 이들을 나와 한 몸으로 생각하고 항상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전환시킬 때 바른 인간관계는 당연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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