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法力과 용맹정진

 

 1. 깨달음의 길

사람은 일생에 한번은 반드시 넘어야 할 절대 경계가 있다. 그것은 깨달음이라는 지엄한 세계로의 입성이다. 깨달음에 이른[到] 자(者)는 자비와 德을 숭상하지만 때로는 용맹스런 사자처럼, 창공을 휘젓는 독수리로, 그러나 흔적이 남지 않는 허공처럼 이 사바세계를 살다 간다.

깨우침은 앞 뒤 생각과 현재의 생각마저도 끊어내는 인고와 헌신이 아우러진 인연공덕의 산물이다. 운명의 창조자로 거듭나는 깨달음은 현실과 괴리를 두지 않으며, 예(禮)에 입각한 건전한 인성의 토대 위에 부단히 쌓아올린 학문과 다양한 경험 더미에 피어나는 지혜의 불꽃이다.

2. 깨우침은 완성된 정신에너지

만난(萬難)을 극기하고 터득한 깨달음은 형이상학적인 종교논리이거나 무슨 신(神)이나 절대자에 도취된 신봉자의 길도 아니며, 자아(自我)를 망실하거나 현실 도피가 아니다.

깨달음의 힘[法力]은 우주에서 인간이 점유할 수 있는 최상의 에너지이며 가장 숭고한 가치관이다. 깨우침을 위한 정도수행(正道修行)은 강건한 심신(心身)과 유·무위에 묶이지 않는 초월의 힘을 길러낸다.

3. 깨우침과 삶

깨달음은 가장 정제된 에너지와 같아 법기(法器)에 따라 시대에 기여하는 바가 상이하다. 종교교리를 머리로 익힌 구불 타령을 법력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며 삿된 타력에너지[神氣]를 접수하고 그 위에 죽은 종교용어로 각색하여 법이라고 외치기도 한다. 또, 창창한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비운의 사나이를 맹종하고, 불신하면 지옥행이라고 협박과 공갈을 일삼는 종교도 지금의 첨단 문명시대와 동거한다. 억설과 모순을 정신적 지표로 삼는 인간은 타고난 본성이 그 만큼 어둡고 나약하다는 반증이다.

이생에서 가장 큰 죄악은 無明에 사로잡혀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다.

4. 법력(法力)의 역할

선(禪)에 입각하여 체득한 심신에너지를 정법(正法)이라 한다. 이러한 법력(法力)의 소유자는 세속의 가치관에 현혹 당하지 않으며, 촛불이 천년 어둠의 방을 일시에 밝히듯, 소금이 음식의 간을 맞추듯, 사회 각 분야에서 선구자 소임을 다한다.

인간사에 무명을 밝히는 법(法)을 몸소 밝히고 해탈을 시연한 석가세존으로부터 달마와 혜능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땅에 살다간 원효와 서산대사 같은 각자(覺者)들은 한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었으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화신이었다고 볼 수 있다.

5. 정법과 경계

정법은 생명의 기원인 태양에너지와 같은 근본 에너지를 체득한 각자(覺者)의 심신에서 나온다. 진리의 실사구시 또한 해탈자의 삶이 기준이다. 중생은 그 누구도 중천에 뜬 태양을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는 것은 내면의 어두운 습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법을 체득한 무심자(無心者)는 태양과 마주하며 그러한 순수의 힘으로 중생을 제도하며, 8만4천 교설은 방편이다.

정법 구현자가 중생을 제도할 때 나타나는 증상을 몇 가지 나열하면,

        첫째 대근기는 특별한 가르침이나 방편을 앞세우지 않아도 백년가뭄에 단비 반기듯이 단번에 발심하여 진리에 귀의한다.

        둘째 빌어 구하는 근성과 상(像)에 의존한 성향이 강할수록 설사 등 신체의 급격한 변화를 보인다. 이러한 경우는 낮은 방편으로서만이 경계를 넘어간다.

        셋째 무상 법을 설하면 태양을 정시한 듯 눈물을 찔끔거리거나 하품을 하면서 무기력해져 버리는 하근기가 지금 말법시대의 주류다. 이들은 계율을 수행으로 삼는 부류다.

        넷째 환(幻)에 묶이거나 마음밖에 해탈법이 있다고 믿는 외도는 부정과 회피로서 일관한다.

사바세상은 연기법칙이 멈춘바 없고 생멸(生滅)이 일상이다. 정법을 능히 체득하는 것도 바라밀행이 절반이지만 천차만별 중생을 제도하는 것도 희비가 있다. 습기가 다 하지 않았다면 굳이 불연(佛緣) 밖에서 마음 쓸 일은 아니다.

7. 용맹정진은 해탈의 지름길

불교 8만4천 교설을 토대로 마음의 장애를 극복하려는 믿음과 용기도 가상한 일이다. 그러나 인생은 유한하여 문자와 종교관행에 의지하여서는 무명을 다 제거할 수 없다. 습기를 녹이는 비법을 전수해 주는 선지식 인연만 있으면 억겁의 윤회 세월을 단축하지만 업 많은 중생은 그 법도를 알 수 없다. 대다수 구도자는 옛 사람들이 지어간 구도행각을 더듬는 알음알이로 해탈 길로 다가가려 하지만 그것은 고상한 노력일 뿐 원만구족한 지혜와는 아직 멀다.

깨달음은 선악(善惡) 호불(好不)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앎을 체득하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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