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현통사와 생이지지

 

경자년 역병으로 지구촌이 휴면에 든 시간에 월영루에 칩거하며 전생에 선승으로 살았던 지역이 명확히 재현되었던 일화 한 토막을 길을 묻는 선문납자들의 참선공부에 작은 도움이 될 것 같아 이 기록을 남긴다.

이 글은 중국 산서성 태원 오대산 현통사를 찾았던 만행이야기이다. 어언 23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구도열정이 샘솟던 초기 불교계에서는 전무후무한 내 경계체험을 비추어 볼 정명경을 찾아 2년여 동안 중국대륙을 휘젓던 구도역정이 마치 어제일 같이 생생하다. 1997년 12월 초, 중국 선불교의 성지 오대산 현통사를 가려고 북경 서역에서 산서성 태원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중국 선불교의 성지를 간다는 설렘도 크지만 타국에서 미지로 혼자 떠나는 만행이기에 밤을 새우는 여정 내내 뜬눈이었다. 10여 시간을 달려 새벽녘에 산서성 태원역에 도착한 기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두 사람이 나타나 대뜸 "한국의 누구 아니냐"고 한다. "나를 어째 아시오"하니 "그냥 알지요"하면서 환하게 반기는 사람은 태원에서 여행사를 설립하고 내가 첫 손님이라던 조선족 젊은 부부였다. 길림성에서의 교사생활을 접고 생소한 산서성에서 여행사를 시작한 이 사람들은 어설픈 우리말을 구사할 뿐 지리, 역사, 문화, 정보, 서비스 등 여행사 기본지식은 개념조차 없는 완전한 백치였다. 당시 중국 교사로서는 비전이 없다고 판단되어 교단을 버리고 부부가 대차게 저지른 일이 여행사였던 셈이다. 지금까지도 인연이 있어 우곡선원에서 산서성 오대산 만행정진을 갈 때면 살갑게 마중하고 배웅해 주는 산서성 불교성지 전문여행사의 대표로서 우리 GK TOUR와 밀접한 관계이다.

당시 오대산 현통사를 찾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뿐더러 산서성 불교성지여행 인프라 자체가 없었다. 작은 승합차에 운전기사와 가이드 겸 통역을 맡은 채사장과 노정도반이 된 오대산행은 7시간을 예정하였으나 출발과 동시에 난관이었다. 이정표도 없는 비포장 길을 물어물어 찾아가는 달구지 같은 승합차는 수시로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이드 채사장이나 운전기사 역시 초행이라 헤매기 일쑤고 갈수록 앞길이 막막해지자 내 전생기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 오지는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미로 같은 옛길 그대로였다. 동네 골목길을 이리 가자 저리 가자하면서 무인지경인 3천고지 산악도로를 넘을 때는 첫눈이 쏟아졌다. 겁을 먹은 기사가 더는 못가겠다고 버티자 저 굽이만 돌면 암자가 있고 또 어디쯤 사찰이 있다고 어르고 달래면서 고지를 거의 넘을 즈음 가이드가 코피를 쏟으며 혼절하였다. 여자 몸으로 거친 여정에 지치기도 하였겠지만 아무도 모르는 길을 마치 고향 동네 골목길처럼 보이지도 않는 사찰위치를 미리 알고 일러주면서 몇 시간을 보내는 동안 사회주의 유물사관에 젖어있는 식자로서의 충격과 상식을 뛰어넘는 현실에 직면하여 그만 정신 줄을 놓아 버린 것이다.

그로서는 도무지 이해 불가한 현실 앞에 난 전생에 여기 오대산의 중이었다는 것과 과거, 현재 미래가 단절된 것이 아니라는 심오한 불교철학 등, 전생 생이지지 이야기를 하면서 요즘은 2시간 남짓 거리를 거의 12시간을 소요하여 저녁 때 즈음 현통사에 도착하였다. 당시 현통사는 간절한 마음이 아니면 접근자체가 어려운 중국내륙지방의 심산유곡 오지 사찰이었다. 채사장에게 앞으로 오대산이 굉장한 불교관광지가 될 것이니 정통 불교공부로 식견을 잘 갖추면 당신 여행사가 크게 번창 할 것이라고 하였던 말이 씨가 되었는지 그대로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그동안 그가 어떻게 사는지 전혀 몰랐는데 내가 오대산에 온다는 여행정보를 다른 경로에서 발견하고 마중 나와 지금껏 단 하루도 내 생각을 안 한 날이 없었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날이 어둡기 전에 현통사 탐방을 마쳐야 하기에 서둘러 대웅전 앞에 도착하니 법당 앞에 세워놓은 돌탑이 눈에 거슬렸다. 탑이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세워진 것을 발견하고 채사장한테 저 석탑 자리가 원래 샘터였다고 일러주자 순간 그가 멍해졌다. 한나절 내내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위대한 불교세계 이야기였지만 이건 완전히 새로운 상황이었던 것이다. 오대산 현통사는 마치 큰 봉분정수리 같은 지형에 세워진 사찰인데 대웅전 앞마당이 샘터였다는 내 말에 어리벙벙해지는 건 당연했다. 안내문도 없어 한번 알아보자고 하는 순간 인적이라곤 없던 계단위로 중 머리가 쏙 올라왔다. 석탑사연을 물어보는 채사장 통역이 끝나기도 전에 그 중이 대뜸 내 팔을 붙잡고 여기서 하룻밤 묵고 가라며 간청하였다. 정치적인 문제로 일체 기록을 남기지 않는 핵심비기를 한국서 온 젊은 사람이 어떻게 그 사실을 잘 알고 묻느냐며 연신머리를 조아리는 그는 현통사 주지였다. 내가 그리 멀지 않은 전생 어디쯤에 여기 오대산서 중노릇한 이력이 있고 생이지지를 가진 대쪽 같은 선승이었음을 알아챘던 것이다. 난 군대음식에 적응하기 전까지 육식은 물론 생선비린내에도 질겁하였다. 전생 중노릇 때 계율을 제대로 지킨 숙업으로 92년 불연이 닿기 이전에는 이 사바세상 어디 한곳 마음 둘 곳이 없어 무던히도 애로가 많았다.

현통사 주지 말에 의하면 대웅전 앞의 샘을 메우고 돌탑을 세운 것은 한족의 인재탄생을 막기 위하여 이민족이었던 청나라가 세운 방책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삼천리금수강산 혈처곳곳에 철심을 박아 정기를 끊으려고 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역사적으로 산서성은 중국대륙에서도 자연재해나 환란에서 비교적 안전하고 걸출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것은 오대산 정기가 원천이고 그 중심이 현통사이다. 지금도 중국에서 유일하게 대학타운을 만들어 20만대학생이 한곳에서 수학중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각설하고 그로부터 22년이 흘러 2019년 초가을 다시 찾은 현통사 샘터는 복원공사 중이었고 G2로 도약한 중국대륙의 부흥과 오버랩 되는 현장이었다.

본원의 국·내외 만행정진은 매회 많은 도반이 참여하지만 지금껏 어떤 불상사도 없었던 것은 대중의 구도 길에는 불보살님의 가호가 늘 우리와 함께한다는 믿음과 불가사의한 이적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사부대중이 혹 불편한 상황에 직면하면 누가 우리 여행목적에 딱 맞추어 주듯이 날씨 교통 숙박 등 여행편의문제가 즉석에서 척척 해결되는 것은 불보살님의 가호이지만 우곡선원 대중은 신비한 이적에 너무 익숙하여 그냥 무심하다. 석가세존 적손들의 정법수행 공덕이 발현하는 현장을 비유로 든 것은 불법은 경전속의 지식이 아니라 부사의한 힘을 발휘하고 영원한 자유를 선사하는 인간사 최상의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대산 만행이야기는 법력을 체감하지 못하는 선문납자를 위한 수많은 일화 한 토막이며 간간히 나의 세계구도역정을 게재하려 한다.


山西省 五臺山

Ⅰ
가쁜 길 따라
허위허위
산마루 올라서니
높은 뫼 깊은 골
눈설지 않은 산천이로다.

Ⅱ
내 돌아올 제
中原은
광란의 세월
피바람에 묻혀
法緣의 다리
목
끊어져

Ⅲ
현통사 옛 샘
무지의 돌탑되고
인걸 애달파
오대를 우러르니
晴天에
운무 드리우고
헐벗은 세월
백설로 가리 운다.

★ 1997年 作, 牛谷 禪詩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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