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동의 생활화
정중동(靜中動)은 상대(相對)에 묶이지 않고 중도(中道)에도 집착하지 않는 상(相)없는 그 마음이 현실에 가장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부합되어진다는 뜻이다. 또는 살며 일구어내어야 하는 인생사에서 부닥치거나 어긋날 일이 없어 뜻하는 바를 유효 적절히 구사할 수 있는 최상의 지혜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정중동을 문자로 풀어 이해하면 목적하는 곳까지 자신의 의도나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결과에 귀착시키는 효율의 극치를 함축성 있게 표현한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상을 살면서 분별과 반연(絆緣)에서 놓여나기 참으로 어렵다. 본의 아니게 파생시키는 업(業)으로 말미암아 의도하는 바에 아무 저항 없이 가 닿을 수 있는 걸림없는 자유를 확립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우리의 삶은 물질적 대상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이 몸을 포함한 물질은 존재계의 절반에 불과하다. 동(動)적인 작용이 생기기 전, 존재의 절반이며 근본인 보이지 않는 세계에 입력된 각자의 업력에 따른 근원적 작용에 의하여 이 몸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의 절반세계라고 하여 무슨 신(神)의 영역도 아니거니와 신비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지난 생의 업력에 따라 현생의 이 몸을 받게 되었듯 인연을 빗는 초석이며 모든 삶의 정보가 수록되어지는 저장창고이기도 하다. 단지 물질적 형상이 없기 때문에 상(相)을 가진 사바세계 중생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절반에 대하여 분명히 인식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세계의 섭리 또한 물질계의 논리처럼 분명한 작용과 역할이 있다. 그것은 물질계 이전의 정신에너지, 즉 영혼이 작용하는 세계로서 因의 시작점이자 果를 담고 있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분별에 젖어있는 중생의 눈으로 볼 때는 이 세상은 대상과 모양이 있는 물질계만 존재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존재 세계는 보이는 절반과 보이지 않는 절반으로 엮이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부터 물질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과 그러므로 가지게 되는 고요한 마음이 얼마나 큰 힘이며 작용인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그것이 정중동의 요체며 정중동은 단순한 현학적 피사체가 아니라 유위법계에서 가장 효율성이 높은 정신에너지로서 내가 직접 실천하고 결과를 도출해 내는 묘약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서 한 차원 높은 인생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사바세계는 거친 풍파와도 같아 무상에 이른 마음이 아니면 난마처럼 얽힌 이해득실로 말미암아 삶 그 자체가 고통이다. 더구나 의식이 올바르지 못하면 영원하지도 못하고 실답지 못한 허망한 유위법계, 이것저것에 속고 뜻을 두느라 귀중한 인생을 탕진하고 만다. 이처럼 분별에 걸려 있는 인간의 내면세계는 참으로 나약하고 미미한 존재다.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오리에게 사람이 다가가면 그 오리는 평생을 사람을 어미로 알게 되듯이 인간의 의식 또한 이치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열리지 않으면 보고 듣고 맛본 것들로 인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속세의 부와 명예 권세에 상관없이 어둠이고 불행이다.
정중동의 참 의미는 만상에 물들지 아니하는 마음 바탕으로 아무런 저항 없이 목적하는 곳까지 도달될 수 있는 행(行)의 본성이다. 또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지 아니하고 순리로서 뜻하는 곳에 이를 수 있는 원천적 심신(心身) 에너지이기도 하다. 정중동의 참 의미처럼 바르고, 맑고, 무욕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원이 많은 세상일수록 그것은 바로 밝음이고 희망이기에 잠시 정중동(靜中動)의 참뜻을 서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