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지신(溫故知新)과
21세기
<불교세계/2001.7月號, 풍경소리>
온고지신은 옛 것을 가려 오늘에 쓴다는 뜻이다. 초야에 널려있는 풀 한 포기도 뿌리에 근거하여 생명력을 이어가듯, 만물의 영장인 인간의 이성을 성립시키는 올바른 사유기준은 선지자들의 덕목에 기인한다. 아울러 사바세계 생명 있는 모든 것과 생명력을 갖지 못한 무정물[업식종자]에 이르기까지 옛 것인 관습적 행위[業 또는 薰習]에 근거하여 각기 존재의 특성과 삶의 방식[輪廻]을 설정하고 영위한다.
즉,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생명은 먼 과거로부터 그만의 이유에 의하여 구성되어지고 존재 영역을 구축해온 역사의 화신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과거는 단절되어질 수 없는 지나간 현실이고 미래를 설정하는 바로미터다. 더더구나 불교 가르침에 있어서는 과거 미래 현재를 구분하지 않는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철학으로써 우리는 무궁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잠시 모습 이룬 역사의 피사체임을 자각케 하고 있다.
직시하면, 불교 가르침의 꽃인 화엄사상은 존재 그것이 무엇이든 한 뿌리에서 기인한 것[一切同根]임을 기초로 한다. 중생이 거듭나는 세상인 극락정토와 화엄세계가 지금을 벗어나 저것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상[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묶여 연연하는 분별을 거두고 나면 누구나 내 안에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를 이룰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나는 어제 미국에 살고 있는 한 네티즌으로부터 인터넷 우곡선원에 매주 띄우고 있는 선시(禪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분은 서산대사의 선사상을 인용하면서 선시는 불교 교리에 입각한 애절한 절규가 배여 있는 어구들이어야 하며 그런 갈망들이 깨침을 향한 잣대이기에 내가 쓰는 시(詩)는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난 것이며 또 사실적 불교 비평은 있을 수 없다는 논지였다.
약 2년여에 걸쳐 자작 선시(禪詩)를 사이버 우곡선원에 올리면서 비판을 받아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일전에 미국에서 선시(禪詩)를 연구한다는 우리 교포 학자로부터 작가 프로필에 대한 질의를 받고 내친김에 내가 쓰는 시(詩)에 관하여 비평을 요청하였으나 결과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런데 이번은 선시(禪詩)에 일가견을 가진 듯한 네티즌의 비평인 것 같아 즉시 다음과 같은 답신을 하였다.
시상(詩想)을 가진 조사들이 남긴 선시(禪詩)는 불교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이해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더구나 선시(禪詩)는 나약한 감정의 표현이거나 이해와 타협을 앞세운 잡다한 논리의 유희가 아닌 불교 교리를 초월하여 만상의 이치를 요약한 그 시대의 언구(言句)로 봐야 한다.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간 선사(禪師)들이 만물의 요체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든 그것은 그의 시대 진솔한 삶의 모습과 철학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지금 사람들이 진리의 가르침인 올바른 경전을 비롯한 단순 명쾌한 시구(詩句)를 빌고자 함은 옛사람들이 남기고 간 고귀한 마음을 체득하려는 염원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단절 없는 온고지신의 등불인 선각자들의 마음을 이어받아 내가 무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램이며 당연한 몸부림이다. 그리하여 통(通)하면 백척간두에 선 중생의 삶을 꿰뚫어보아 오매일여로 사는 부처의 법을 깨달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선시(禪詩)는 시공을 함축시킨 한 구도자의 삶의 모습이며 명료한 시대의 언어이어야 한다는 신념이 있기에 내가 표현하는 시구(詩句)는 그 어떤 관행과도 동거하지 않으며 고불고조(古佛古祖)와도 타협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선(禪)적 사유는 결코 관행에 끼워 맞춘 미사여구일 수 없으며 더구나 중생심을 죽이는 확실한 방편은 만행으로 섭렵한 투혼과 깊디 깊은 고뇌로 정제시킨 선약(禪藥)이 특효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불가(佛家)의 가장 큰 병폐는 21세기 과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3000여년 전의 석가세존 시대로 되돌아가지 못하여 과거사에 매달려 안달복달하는 넋두리를 공부로 삼는데 있다. 그것은 인연과 연기에 의한 불교의 근본 사상을 곡해한 오해이며 온고지신(溫故知新)과 공도리(空道理)를 잘못 인식한 것에서 기인한다.
공(空) 사상은 생명 있음과 없음, 인식의 유무에 아무 상관없이 우주 삼라만상은 공도리(空道理) 영역임을 설파하고 있다.[諸行無常, 諸法無我, 一切皆苦] 이와 같은 불교의 삼법인은 상(相)으로 본 것은 실체가 없으며 영원성이 없는 헛것임을 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도(佛道)에서는 죽음마저도 있다, 없다 라고 구분하지 않고 생사일여(生死一如)로 귀착시킨 지극히 분명한 논리체계를 확립하고 있다.
존재의 연기(緣起)를 직시한 공 사상은 집착의 근원인 탐·진·치 삼독심을 내려놓기 위한 방편설이다. 그러나 첨단을 달리는 현대의 수행자 대부분은 태산보다 더 높고 크게 지은 아상에 가려져 진정 깨쳐야 할 자신을 망실한 경우가 허다하며, 좀더 적극적인 공부자는 식자우환 증상에 빠져들어 천갈래 만갈래 벌어진 마음의 끈을 움켜잡고 있거나 누구의 가르침이라는 언어에 의지해서 깊고 깊은 아집의 골을 파는 경향이 있다.
마음 공부자 대다수는 종교적 교리와 관행 또는, 깨침의 길이라는 잡다한 방편과 해괴한 어구를 쫓아 임의로 수행의 길을 설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현실은 공력과 인연동기에 의해서만이 지어지는 선정의 맛을 보기 위한 불가결한 문제이기는 하나 주의주장을 앞세운 영악한 사람일수록 객관의 저편인 정(靜)의 길은 멀어지고 문자로 익힌 맹목적 사유만을 대안으로 붙잡는다. 그러나 그것은 붓 대롱 속으로 세상을 본 것에 불과하며 눈 먼 장님 기름 값을 더 많이 지불한 것과 같다. 대자유의 세계는 문자 속에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주의주장과 흔들리는 마음속에는 결코 안착되지 않는다.
입 있는 불교인이면 누구나 말하는 공도리(空道理)는 무슨 부처, 조사, 대사 등의 인위적 개념은 대도를 열어 가는데 있어 앞길에서 치워져야 할 돌멩이만큼의 값어치도 없다. 더더구나 중도(中道)를 성립시켜야 할 깨우침의 길에서는 언어적 현시 같은 것은 놓고 비워야 할 것들의 리스트에도 끼지 못하는 매우 유치한 어구다. 단지 옛 사람 가르침은 내 마음을 세심(洗心)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세제이며 겸허한 나를 이루게 하는 초석임을 이해할 때 선각자의 가르침에 입각한 올바른 내가 되어질 것이다. 그것은 주·객관이 익어 냉정하고 냉정한 중심 잡힌 마음이 되기 위한 첩경이기 때문이다.
옛일에 기인한 오늘의 삶이 있음을 분명히 깨쳐 아는 것이 곧 내일의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열어갈 종자다. 그것은 21세기를 사는 인간이 옛사람 일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는 몸짓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의심을 걷어낸 내가 됨을 알기에 정도를 걷는 이는 맹목과 맹신에 끄달리지 않고 조신하고 또 조신한 오늘을 개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