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행(卍行) 이야기

 

<불교세계/2001.12月號, 풍경소리>

녹음(綠陰)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가는 계절에 서울을 벗어난 만행은 그 의미가 깊다. 지극한 현실이 곧 극락이듯 오매일여로 살아가려는 눈 푸른 수행자들은 때때로 산 높고 물 맑은 산하를 그리워하는 공통된 바램을 가지고 있다. 늘 그래 왔듯이 생업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 주말에 여러 도반들과 함께 하는 만행은 장대하고 청정한 대자연의 생명력을 내 마음에 깃들게 하는 알뜰한 심신수행이며 진실한 삶의 한 토막이라 할 것이다.

하 수상한 시절에 주경야독으로 참선공부의 정도를 정착시킨 牛谷禪院에서 이따금 떠나는 만행은 옛 벗을 만나는 것처럼 가슴 설레게 한다. 촌음을 아끼며 명산대찰을 두루 순방, 법리(法理)를 체득하는 만행은 언제나 하루해가 짧았다. 노정에 어둠이 내리면 한적한 산사에 여장을 풀고 자연의 섭리에 비추어 존재하게 된 불법의 정도를 토론하고 진리를 체득하는 현장 체험공부는 그 무엇보다 더한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수행자가 오매불망하는 견성(見性)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자연의 섭리를 수용할 수 있는 순수와 내 안에 세상을 다 퍼 담을 빈 마음의 그릇을 조성하는 단초와 같다. 오랜 선업(善業)이 발현한 견성(見性)으로 법열이 달아오를 때면 풍진세상을 멍석 삼아 한바탕 춤추는 희열의 순간도 있다. 연이어 타는 듯한 갈애와 좌절, 무기(無記)의 수렁으로 치닫는 경계를 초월하여 무심(無心)으로 들어서는 단계는 숨 쉬는 것이 죽음보다 더 괴롭기도 하다. 이처럼 숙세 간에 보고 듣고 맛보면서 구축한 나[我]라는 오온(五蘊)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도 수미산을 넘은 듯하지만 입전수수(入廛垂手)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할 대원각(大圓覺)은 무념(無念)만이 할 수 있기에 牛谷山門은 단 한시도 수행력을 놓을 수 없다.

잘 정제된 순수라 할 무념(無念)은 무위에 귀의한 정신력이며 대상에 끄달리는 속세의 가치관을 꿰뚫은 절대의식을 말한다. 상대 분별이 끊어진 해탈세계 즉, 대 자유는 참 인연을 지어 만행으로 만가지 이치를 섭렵하지 않으면 8만4천 교설로도 아니 되고 면벽좌선, 염불, 기도 등에 매달리는 얕은 종교 행위로는 더욱 불가하다.

대중이 함께 하는 만행은 치밀한 계획과 일사불란한 행동 거지를 요구한다. 업력이 제각각인 사람들을 한꺼번에 무심의 세계로 몰아간다는 것은 오랜 세월동안 흐르던 강의 물줄기를 임의로 바꾸는 대 역사와 같다. 이때 각기 타고난 운명의 길이 틀어지게 되므로 말미암아 훗날 필연적으로 만나야 하는 숱한 반연들이 좌시하지 않는다. 인식의 대 전환과 동시에 반드시 날뛰게 되는 마(魔)를 조복시킬 원만한 법력의 보호가 없으면 공들인 만행정진도 요란스런 구도행위일 뿐이지 숙세의 업(業)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깨우침은 기법이나 요행이 아니라 하늘과 땅 사람이 일치되는 찰나에서 비롯하며 인연이 내면의 세계를 재창조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에 각각의 시운과 때를 맞추려는 노력을 더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각성(覺性)은 시절인연 따라 무심(無心)을 직접 체감하는 것이다. 부처의 맛이라 할 무심 경계를 체험한 다음 무명이 범접하지 못하도록 선지식의 가르침을 등불로 의심을 거두고 차츰 깊은 이치를 깨달아 가는 것이 정도수행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방에는 온갖 상(像)과 환(幻)에 기대인 하등한 종교행위만 난무할 뿐 원래 종지인 무심(無心)으로 곧바로 인도하는 힘을 갖춘 선지식 인연도 없거니와 정법을 구현하는 문중 또한 찾아볼 수 없다.

만행은 말 그대로 기민하게 움직여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접하면서 이치를 터득하는 다이내믹한 심신수련이다. 옛 정취가 더 그리운 백담사를 휘돌아 동해로 내려서는 진부령은 가을이 떠나기도 전에 벌써 삭풍이 휩쓸어간 잔해가 너부러져 있다. 앙상한 가지에 매달린 스산함을 거두어 휴전선에 기대인 천년고찰 건봉사에 내려놓고 좌선하면 우수수 바람 불어 천지가 감응하는 기별은 내 안의 벽을 허무는 참선의 묘미를 더 한층 실감나게 한다.
기운이 상큼한 산사는 그 맛에 취하기 일쑤다. 그러나 순간순간 백척간두에 올라선 듯한 절박함이 항상 할 때 비로소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속세의 끝이기에 참선수행자들에게는 알싸한 산사의 향취마저 아니 본 듯 내려놓고 무심히 되돌아서게 하는 단호함도 요구된다.

금강산 등걸에 기대인 석양을 뒤로 하여 동해로 내려선 이름 모를 해변은 더 머물고 싶은 산사를 털고 나온 아쉬움을 씻어내는데 썩 잘 어울린다. 검푸른 파도가 쉼 없이 부딪치는 아득한 모래밭은 낭만이 나뒹굴었던 지난여름의 역사가 아직 여기 저기 배여 있다. 냉철함을 요구하는 선(禪)적 사유가 때론 중생의 가치관과 전혀 달라 박절한 모습으로 비추어지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상(像·image)에 묶여 지내지 않으므로 동일시간에 더 넓고 더 오묘한 이치를 섭렵하여 자유자재한 인생을 구축할 수 있는 것이 선(禪)의 본래면목임을 요해한다면 이참에 "응여시생청정심(應如是生淸淨心)하여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할 것이며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하여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하라"는 금강경의 핵심사상을 통달해 볼만도 하다.

마음공부의 근본은 놓기 어렵고 회향하기 어려운 소아(小我)에서 벗어나 무욕의 삶을 지향하고 그러므로 더욱 분명하고 효율적인 결과와 항상 할 고요를 희구하는데 있다. 집착이라는 소유욕에 묶이지 않으므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을 더욱 밝고 올바르게 계도하는 현자(賢者)의 체성(體性)과 덕목을 갖추는 것이라 할 것이다.

설악산 동쪽, 험한 산골짜기에는 텅 빈 충만의 즐거움을 생산할 목적으로 세워놓은 고찰은 언제 보아도 불사원력의 정성과 수고로움이 묻어난다. 또한 옛 사찰은 불교철학의 핵심인 무소유의 실천을 위한 대중의 교육도량으로 존재한다는데 그 의미가 더욱 깊다. 더불어 승속을 불문하고 사찰에서 생활하는 불자는 그 도량과 인연이 다하면 뒷사람이 기거하는데 불편하지 않도록 곡식과 땔감을 넉넉히 준비해 놓고 나는 아니 살은 듯 떠나는 것이 불가의 오랜 전통이자 성스러운 불문율이다. 말로서는 이루 다할 수 없는 이 아름다운 무소유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출가 수행상은 이제 구전에서나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만행 길에는 덕성스런 소도 보고, 미련한 인간도 만난다. 어제 오후 모 이교도의 속초 도장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은 비록 앞뒤가 맞지 않는 종지와 허상에 묶여 있지만 우리를 맞이하는 정성은 갸륵하였다. 개인의 삶을 얽어매는 유사종교가 판치는 말법시대에 내방객을 정중히 맞아들일 줄 아는 인간미가 유난히 돋보이는 것은 그 어떤 가르침보다 인간적이고 사실적인 불교의 해탈법을 왜곡시킨 불가의 실상과 극명하게 대비되기 때문일 것이다. 산중에는 "사람답지 못한 부처 없다"는 당연한 사실 조차 모르는 무지가 판을 치고, 부처님 법을 욕되게 하는 크고 작은 먼 미래 부처들이 죽은 부처장사에 전력투구하느라 정작 생불(生佛)이 눈앞에 있어도 모르는 까막눈들이다.

고래등같은 법당 지붕아래는 상 높은 보살이 면죄부를 파느라 수행분위기는 오간데 없고, 가당치도 않은 천도재와 업장소멸 기도 염불소리는 절이 바로 무당소굴이고 산천을 더럽히는 공해의 원산지라 아니할 수 없다. 밤이면 법당 문마저 폐쇄시키고 여인숙으로 둔갑하는 산사(山寺)에 때맞추어 흩뿌리는 가을비는 잠 못 이루는 긴 밤을 엮는다. 부처되는 공부를 원수처럼 여기는 불(佛)도량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넘는 미시령이 오늘따라 유난히 높고 험하게 여겨지는 것은 삼세(三世)에 끊어진바 없는 법향(法香)이 유독 출가산문(出家山門)에만 그쳐버린 서글픔이 진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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