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충(獅子蟲)

 

올곧은 수행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서원을 이루기 위해서 날마다 인욕 정진한다. 세속잡사 반연을 거두고 일상으로 하는 염불과 갖가지 수행상은 만 중생이 극락정토에 이르기 위한 공력을 기울이는 대 자비원력이며 이타행을 북돋기 위한 청정계율이다. 그러나 성인의 길인 불법(佛法)이 아무리 위대한 철학세계라 할지라도 법도를 올바로 수지 이행할 근기 높은 인간이 없다면 날마다의 염불은 공염불이 되고 말 것이며 견제와 시기, 반목으로 아방궁을 꾸미는 혹간의 수행상처럼 공력이 아닌 잿밥을 위한 염불을 하는 셈이 된다.

모 종단 총무원장의 세간잡사 속내 한마디가 불교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상을 온통 벌집처럼 들쑤셔 놓았다. 승려는 당연히 금기해야 될 편파적 정치발언과 또, 공인인 종교지도자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소견머리 없는 처사는 중도에 이르지 못한 낮은 근성임을 만방에 드러내 보인 것이며 그로 인한 구구한 해명서는 참회가 아닌 변명으로 일관하여 전체 불교인에게 더욱 실망을 안겨주는 사건으로 번지고 있다.

근자에 일어난 출가자 집단의 패싸움과 온갖 추태, 과거 경남의 모 사찰에서 내가 직접 목도한 사행적 폭력역사 등, 시대를 오판한 제방의 뒤쳐진 수행력으로 미루어 볼 때 일련의 사건은 승려 일 개인의 실언에 의한 오도된 행적이라기보다는 해묵은 고질병통이 밖으로 불거져 나오는 전조이자 사자충의 창궐로 여겨진다.

지금은 열린 시대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우매한 짓거리가 절대로 통용될 수 없는 대명천지로 내달리고 있는 것이다. 시운(時運)따라 급속히 밝아지는 21세기는 정치를 비롯한 인간사 제 분야에서 이기적이고 편협한 꼼수가 통할 수 없으며, 보편적인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해 맹목적이고 신성시 되어온 모든 종교들도 과거관행과 제도적 특수성이라는 보호장막 뒤에서 결코 안주하지 못한다. 더구나 완전한 철학적 사유체계를 요구하는 불법논리 속에서는 비합리적이거나 신비주의로 포장한 엉터리 종교논리는 당연히 추방되어질 것이다.

무위로 가 닿는 순리의 시운 앞에 놓인 인간사는 바람 앞에 내 맡겨진 돛단배와 같다. 순풍은 주어진 항로를 역행하거나 흐름에 저항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자연의 힘이며 그러한 힘이 우리 내면세계를 이끌어 갈 때 비로소 시대적 소임에 충실해지는 순연한 삶으로 거듭날 수 있으며 이 길이 곧 화엄세계(華嚴世界)이다.

시절인연은 분별상에 묶인 개개인의 마음이 무심(無心)에 이르게 되는 시점을 말하며 시대를 잘 타고난 각자의 지복이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하루 세끼 밥을 감사하게 먹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굳이 밖에서 구하지 않아도 밝은 눈을 가지게 되는 의식혁명에 동참하고 있는 형국이다.

얼치기 지식이나 오도된 체험에 의존하지 않고 무위로 다가온 밝은 기운으로 가치관의 대 변화를 맞이한다는 것은 다 큰 아이에게는 포대기가 필요없듯 우리를 둘러 싼 공동의 묵은 업습으로부터의 해방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목전에 도래한 변화의 양상은 인간사의 잘못된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을 대 사건으로 다가올 것이며 죽은 의식으로부터 단절되어지는 희망적 혼돈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한 변화의 일 예로 낡은 관행에 의존하려는 피동적 바램은 낱낱이 벗겨질 것이며 인간의 심층 의식인 내면세계마저 철저히 검증되어 질 것이다.

한겨울을 난 나그네의 두터운 외투를 벗게 하는 것은 따스한 훈풍이 가장 효과적이듯 학습이나 고행으로 훈습에 찌들은 사고(思考)의 문을 열어 가는 인위(人爲)의 시대는 지엽적이며 또 다른 이기를 불러들일 개연성이 늘 함께 한다. 그러나 무위(無爲)로 다가온 밝음 앞에 어둠은 결코 저항할 수 없듯이 진실이 통하는 요순시대는 동쪽으로 난 창이 먼저 밝아지듯 인연본위 혜명(慧明)천지 시대가 열림을 말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보호에 능한 편이다. 집착한 그 대상이 본연의 소임에 공헌하는 것인지, 아닌지 등은 잘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주어진 현실에 연연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근성은 부귀영화와 권세 등 반드시 무너질 세속적 반연에 더욱 집착한다. 그것은 시대적 소임과 무엇이 자신의 영원한 자산이 되는 것인지를 잘 알지 못하는 무지한 욕탐이 빚어낸 결과로서 흔히 말하는 세상을 흐리게 만드는 상대적 어둠의 표상이기도 하다. 범부중생들이야 당연히 그렇다 하더라도 어둠을 밝히는 소임이 전문인 종교지도자가 표리부동한 짓거리를 하면서도 아무 죄의식를 느끼지 못할 정도의 낮은 인성의 소유자라면 이것은 예사 일이 아니다.

세밑에 문제의 총무원장이 속한 종단의 인터넷 홈페이지는 연일 수천 여명 네티즌들의 온갖 욕설과 비난이 쏟아졌었다. 모 일간지에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종교 홈페이지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갖가지 비난은 일반 불교인들만의 건전한 비판과 질책을 넘어서 전 국민적 저주를 받는 듯하더니 오늘 아침 그 종단 홈페이지가 폐쇄되었다.

성불(成佛)이 따로 있지 않다.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할 심신(心身)을 가다듬는 초석이 곧 견성(見性)이요, 부처를 이룰 기상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 한 생명을 받아 나온 인간으로서의 지중한 소임이며 눈 밝은 자들의 염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수행자는 우선 세속잡사에 끄달리지 않는 길을 임의로 선택하며 또, 출가하여 일신을 가다듬는데 반연이 될 요소를 미연에 방지하는 고독한 용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작금에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제방의 기상은 이미 속수무책일 정도로 퇴락 하였고 육진 경계가 어두워 진지는 오래 전 일이다. 불교계가 오늘처럼 난감한 현실에 봉착한 것은 불법(佛法)을 오도한 낮은 무리들이 자초한 죄업이며, 부처를 팔아 일신의 영달을 꾀하려는 미천한 자들이 빚어낸 과보다.

옛사람이 염려하던 사자충(獅子蟲)이 멀리 있지 않다. 잿밥에 눈이 멀면 백년을 염불하여도 중도(中道)를 알 수 없듯이 초조(初祖)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부처를 짝사랑한 인과를 온몸으로 체득하는 저 낭패한 군상들이 불법(佛法)을 해할 충(蟲)이 아니고 무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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