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로 가는 길

 

<불교세계/2001.8月號, 풍경소리>

마음수행의 극점은 오매일여로 살아지는 법을 깨닫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미혹에서 벗어난 깨달음, 즉 해탈에 이른 사람의 일상(日常)이 그 표상이다. 오매일여는 기민함을 구사하는 마음의 힘으로써 시절인연을 만난 자의 지복(至福)이며 그가 지어놓은 공덕의 발현이다.

불교는 어리석음을 참회의 대상으로 여기며 그러한 미혹함을 죄악으로 규정하는 단호함도 수용하고 있다. 미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리석음의 폐해는 미혹한 개인을 떠나 대단히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 예로 "한 국가의 통치권자가 어리석으면 민생이 도탄에 빠지게 될 것이며 심지어 국가의 존망마저 위태로워 질 수 있다. 또한 각 사회 조직의 대표가 어리석으면 관계자들이 곤경에 처하게 되며, 가장의 어리석음은 가족의 불행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불교 가르침의 극점인 깨달음은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혜의 불꽃을 일으키는 것이다. 깨침은 일신의 영달과 명예를 위한 특별한 방편이나 도구가 아니라 시대를 선도하는 각자(覺者)의 덕목으로 귀결시키며, 다다익선(多多益善)을 위한 가치관의 전이와 그 구현을 위한 용맹심이 부처의 삶이라 할 것이다.

지혜가 항상한 부처의 삶은 탐욕으로 인한 미혹함과 의심에 의한 분별이 소멸된 굳은 마음이다. 아울러 중생은 미혹으로 인하여 바름을 제대로 알지 못한 자아(自我)가 흔들리는 가치관 속에 묶여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것은 집착에 의한 업습으로써 살아서는 온갖 번뇌로 인한 마음고통이 끊어지지 않고, 죽어서는 윤회의 굴레에서 헤어날 수 없는 습인(習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탐욕에 사로잡혀 존재의 이치를 올바로 꿰뚫지 못한 어둡고 얕은 중생이라는 자아가 부처의 삶으로 회귀하려면 선각자의 발자취에 입각한 가치관의 전이를 체득하거나 수증(修增)으로 차츰 분별에 물들지 않는 중심 잡힌 마음을 키워 나가야만 한다. 수증(修增)은 올바른 불교가르침에 비추어 분명하지 못한 자신의 내적 요인들을 제거하므로 말미암아 차츰 사실과 효율적인 가치관을 오달(悟達)시키는 지혜의 칼이며 중생의 습(習)에서 벗어나 부처의 훈습(薰習)을 새롭게 닦아 익히는 정도문(正道門)이다.

불교는 주지하다시피 오랜 역사만큼 수많은 관행과 어록을 포함하고 있다. 경구의 한 구절을 놓고 여러 각도에서 해석되고 판단 할 수 있는 특이성과 또, 개인적 사유체계를 미화하고 합리화시키는 자율성도 부가되어있다. 이처럼 자율적인 불교 수행상에는 일시에 만행의 이치를 밝힌 대각(大覺)도 있지만 대다수는 오랜 수행 경륜만큼 오도된 가르침에 매달린 심(心)원숭이로 전락되어있다.

왜냐하면 진리의 스승은 천지자연이고 깨침은 당연한 섭리에 맡겨놓을 수 있는 오묘한 심개안(心開眼)임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깨침은 평상심의 회복으로 그것은 각자의 몫임을 체득한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석존께서도 후대에는 내 뜻을 올바로 아는 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하였듯이 초조의 법통은 말법시대 중생의 가치관과는 너무나 상이하여 일찍이 세인들의 혀 속으로 묻혀버려 그 행방이 묘연하였다.

불교의 모든 가르침은 깨달음이라는 현학적 어구를 맹신하는데 있지 않다. 수행의 극점은 자신의 몫으로써 지극히 단순하고 분명하며 순수한 그러나 너무나 인간적인 희생과 봉사, 자비를 구현한 선각자의 삶의 향기에서 나아갈 바를 이심전심으로 인도 받을 때이다. 흔히 법통이라는 법력의 전수는 종교적 어구나 행위가 그려내는 요란스러운 의식이나 화려하게 장엄되고 신비로움으로 포장된 구전 속에 석존의 법력이 상존하지 않는다. 지극히 간단명료하며 단순한 의식의 전환점을 수지 증득케 하는데 부처의 성품이 상존하고 확산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법수지(佛法修知)는 오매일여로 살아가는 대 서사시(敍事詩)로써 중생의 보편적 가치관인 부귀영화에도 기대이지 않으며, 허물어질 돌부처 금부처와는 더욱 함께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주변에서는 우리 절, 우리스님, 큰스님 등 부처의 법과는 동떨어져 작위로 세운 허상에 공을 기울이는 어리석은 무리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이런 부류들이 추구하는 기복과 자기만족적 종교행위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향훈(香薰)을 체득하려는 근본 불교 승단과는 아무 상관없다. 한마디로 불교간판을 앞세운 전문 종교쟁이들이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편의에 따라 각색된 절교[寺敎] 승려교[仲敎]에 부화뇌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교의 근본은 해탈이고 무주처(無住處)에 이르는 마음이 되는데 있다. 즉 수행의 힘으로 집착이라는 탐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고, 비우고 놓은 마음이 원래의 평정심이고 참 인생살이 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공(空)도리를 깨달아 무주상 보시를 구현하는 삶, 참 사람의 길을 일러주는 초조의 가르침을 담은 불교는 장구한 역사만큼이나 여러 각도에서 구도자가 마음 쓰고 행하는 방편을 의인화 시켜놓고 있다. 인종과 문화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다양한 보살상으로 그려놓은 부처는 인과와 윤회의 법칙에서 피조된 인연공덕의 화신이며 실다운 구도자다. 불교는 그를 과거 현재 미래 부처로 도식화하여 시대적 역할과 더불어 살아가는 나눔의 지혜를 선도하는 의인으로 설파한다.

견성(見性)이 성불(成佛)이며 불성(佛性)은 지극한 존재 논리에 귀착되어지게 하는 씨앗이다. 인연으로 불성이 발현되고 수증으로 업습을 녹이고 반연을 정리하는 내 안의 금강장사를 키우는 것이 중도구현이기에 상에 의존하거나 기복과 환, 미시적 신비로움에 기대는 하찮은 종교행위는 성불도(成佛道)에 끼어들 여지조차 없다.

너와 내가 영원한 안식처에 이르는 깨달음을 구하는데 있어 상으로 세운 것에 의식을 묶이게 한다거나 타락한 종교행위를 강매한다는 것은 올바른 구도의 길이 아니라 불교라는 이름아래 모여 혹세무민을 도모하고 함께 지옥으로 떨어지자는 마구니와 동거하는 행위다.

깨침은 순수로의 귀의이며 섭리로 회귀되는 마음이다. 모든 불법의 가르침과 올바른 지혜는 오로지 이러한 법리에서 나온 것이다. 별스런 종교 행위나 관행을 쫓아 인생을 낭비한다거나 방편을 곡해하면 애써 지은 수행이라는 두터운 업(業)으로 인하여 식(識)은 더욱 어두워져 고개만 돌려도 알지 못하는 더 낮은 중생이 되는 것이 현실이다.

중생을 인도하는데 있어 올바른 선지식은 스스로 분별의 장벽을 뛰어넘은 마음바탕으로 시대상황에 입각하여 비합리적이고, 비능률적인 요소들을 덜어내는데 주력한다. 다시 말하면 부처는 온갖 모습으로 각색되어진 상호가 아닌 야단법석(野壇法席)으로 화합대중에게 이치를 통(通)하게 하는데 기여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법, 이러한 가르침만이 정법 수행이며 사바세계 중생을 깨달음의 문(門)으로 인도하는 불 보살이라 할 것이다.

근자 그대로 있어 청정불(淸淨佛)임을 일깨워주는 유구한 가야산에 세계최대 청동불상을 세우겠다는 눈먼 망아지들과 국가 문화재인 사찰을 보수하라는 국민의 혈세를 절취하는 삭발 승냥이, 산 좋고 물 맑은 산사에 살면서 인간 망종으로 재 둔갑하는 말법시대의 증후군, 소를 쳐서 마차를 가게 하는 것이 조사의 뜻이라고 설법하는 엉터리 선지식을 불(佛)화살에 꿰어 오매일여의 삶을 관(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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