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頭陀)의 삶
<불교세계/2001.11月號, 풍경소리>
현대사회는 인종과 이념, 종교와 사상, 빈부의 차이에 따라 끝임없는 갈등과 충돌을 빚고 있다. 뉴욕의 테러참사에서 볼 수 있듯이 첨단이기를 동원한 집단살상의 잔인함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빚은 공동의 죄업이라 아니할 수 없으며, 나날이 발전되는 문명에도 불구하고 준비되지 않은 생죽음과 더욱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인생은 유한하며 이 몸 떠난 깨달음이 달리 없다. 무한 우주에서 잠시 시간의 토막을 점유한 것이 사람의 일생인 것을 자각한다면 나와 함께 연기하는 실체는 모두 소중하며 옳다. 세상에 대해서 존경과 감사, 이해하는 대긍정이 스스로 극락정토를 일구는 길이고 타인에게도 극락을 희사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다. 그러나 미혹한 사람은 이 세상 밖의 또 다른 세계를 말하는 어줍잖은 종교논리를 맹신하여 현재의 삶을 폄하 하거나 부정한다. 오늘날 민족과 국가간의 충돌을 빚는 요인은 단순한 생존다툼이 아니라 서로 다른 종교이념에서 기인된 반목이 대부분이다. 강자는 공멸이 두려워 만연하는 테러와 보복전쟁은 문명충돌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지만 결국 드러내 놓고 말 못할 종교문제가 갈등을 빚게 된 원인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은 전생 습인과 이생의 학습으로 조성되지만 육신을 제어하는 통제력은 종교신념이 더욱 단호하고 과격한 결과를 빚는다. 앞선 지식으로 잘 조련된 이성일지라도 지엽적인 종교이념에 빠져들면 합리적인 지식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첨예한 모순만 부각된다. 비근한 예로 문명화된 사회일수록 예언적 운명론에 더 나약한 면모를 보이는 것은 내려놓지 못한 탐욕과 반드시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부와 권세가 많고 높을수록 저승을 주관한다는 의인상에는 무조건적으로 굴종하며, 더구나 절대 신(神)이라는 명사 앞에서는 불문곡직하고 외경심(畏敬心)을 보이는 경향이 있다. 이 모두는 참 삶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인간정신을 선도한다는 종교논리가 왜곡되어 잘못된 관습을 낳은 원죄가 있기 때문이다.
열린 정보시대만큼 정신계도 온갖 잡설이 횡행하여 해탈자인 석가모니 부처님도 무슨 절대 신(神)쯤으로 여기는 무지한 인간들이 허다한 판국이다. 특히 전지전능하다는 별스런 신(神)을 앞세워 선과 악을 논하면 어리석은 중생은 죽은 문자에 현혹 당하여 옴짝달싹 못하며 더더욱 가관인 것은 방편으로 세운 온갖 의인상 앞에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처할 정도로 피폐해진 정신력이 21세기 다수의 정신사조다.
금강경에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라고 일러주고 있다. 범부중생은 영원하지 않는 형상과 작위로 세운 갖가지 이유에 끄달리느라 삶의 본질을 올바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제행무상(諸行無常)함을 올바로 알아차리면 즉시 부처가 되는데도 온갖 것에 집착한 인과로 마음의 눈이 가려진 까막눈 인생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원래 마음은 분별이 없다. 혼돈이후 적자생존에 매달려야 하는 갖가지 생명이 태동되고 생·멸하는 연기법칙을 작위로 논하는 인간사가 형성되면서 천태만상의 이해타산을 빚어 놓았다. 소아에 사로잡힌 마음은 환(幻)에 놀아나거나 분별에 빠져 좌충우돌하고 조금 깬 마음은 만물의 생성소멸이 인연취산 법칙임을 알아차려 생사에 걸리지 않는 마음의 힘을 기르려고 갖가지 심신수행 방법을 찾아 헤매는 것이 사바세계다.
마음은 만물을 포용한 태초의 주인이다. 지금의 생명력으로 근본마음과 동체대비 시키면 그것이 해탈이며 완성된 인격체인 것이다. 그것은 현재에서 잘못된 원인을 교정할 수 있는 참선 수행으로 숙세의 업(業)으로부터 해방되어지는 해탈 길을 모색하는데 있으며, 탐욕과 집착으로 훼손된 원래 마음을 회복한 이후의 마음을 말한다.
분별이 없는 피안의 삶은 허구를 각색한 신비주의나 종교지상주의와 함께 하지 않는다. 그 길은 온갖 명상(名像)을 쫓는 중생의 가치관에서 개시 허망함을 통감할 때부터이며 그로부터 영원한 고요를 확립하는 성인의 학습이 무르익어야 할 때이다.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해탈법을 체득하지 못하고 종교이념이나 슬로건, 관행을 쫓게 되면 종국에는 독선과 아집만 키워 자신이 누구며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무기에 빠지거나 인생을 망실한 맹신자가 된다.
육신의 주인인 정신은 오래 묵은 인연과보의 훈습(薰習)으로서 이생에 의존하는 물질보다 상위체계다. 전생에 자유에 이르지 못하여 윤회하게 된 영혼이라는 습인(習因)이 사대를 갖춘 것이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은 형상에 묶여 지낸 전생 업력이 남아있어 이생에 인연공덕 없이는 스스로 홀로 서지 못한다. 금생에 아무리 잘 구성된 율이나 문자진리를 익혔다 하더라도 해탈자인 각자(覺者) 인연이 닿지 않으면 상대에 묶이지 않을 수 있는 무소유의 정신력은 인식되거나 배양되지 않는다. 더구나 구불(口佛) 타령이나 무늬를 경배하는 어리석은 정신을 버리지 않으면 만겁을 사람으로 윤회해도 영원한 자유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
참다운 선각자는 만물이 약동하는 자연환경 속에서 깨달음을 얻었듯이 생존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에서 익힌 너그러운 마음이 진정한 평등과 자유를 구현한다. 척박한 토양에서 태어나 구겨지고 멍든 가치관을 가진 박복한 사람들에게 천국은 염원이며 극락은 사후세상쯤으로 여긴다. 더구나 극한 생존여건으로 허상이나 절대자에게 매달려야 하는 교리를 갖게 된 이들의 가슴에 해탈은 먼 이야기며 더불어 살아가는 무소유의 복락이 담겨질 수 없다. 이처럼 극단적이고 편협한 정신력을 갖춘 동업중생들로 말미암아 첨단의 기술과 정보를 선점한 한층 더 문명화된 사회구성원들이 문명 속의 고아로 내몰려지는 이 아이러니는 이미 오래 전에 예견되어 있었다.
가치관의 대 전환점에 들어선 세상사는 날마다 시끌벅적하다.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을 정신적 해방이 아니고서는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운 이즈음에 소욕지족(少欲知足)하는 삶의 지혜가 돋보이는 것은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듯 싶다. 세간잡사 훌훌 털어 버리고 바람소리 물소리 벗하며 한세상 살아가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아 짬짬이 세속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해 보지만 아직 부처를 이루는 명약인 참선이라는 이름으로 지어놓은 반연이 깊다.
참선 공부는 만상에 끄달려 중심을 잃고 날뛰는 마음을 조복시켜 가장 합리적인 사유체계를 갖춘 진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전인(全人)교육이며 불조(佛祖)와 한마음이 되어지는 최선의 방편이다. 이처럼 참선은 자유인이 되는 최적의 조건을 두루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비례하여 온갖 잡설과 관행이 선도(禪道)에 끼어 들어 선의 본래종지를 망실시켜 놓기도 하였다. 참담하게 흐트러진 선도(禪道)를 복원해 가며 흑과 백이 분명한 해탈의 세계를 열어 보이고 일 단계 공부를 회향할 때 이제야 불조(佛祖)의 참 가르침이 무엇인지 감을 잡았다는 희열 가득한 불자들의 면면을 보면서 사람농사의 존귀함과 길 없는 길을 열어가야 할 시대의 소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황야에 선문(禪門)을 세우고 독야청청하지 않을 수 없었던 지난 삼년 세월이 몇 겁을 살아 온 듯 하다. 무명천지에 햇살을 끌어 비추듯 한 열정으로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일깨워주고 이 가을에 훌쩍 산문을 벗어났다. 성주괴공하는 대자연은 나 홀로 억겁의 허물을 벗고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이치를 일러준 유일한 해탈법의 스승이었다. 유난히 햇살이 좋았던 지난여름, 실다운 열기에 굳건히 뻗어 난 초목과 싱그러운 기상이 주는 명료함은 서둘러 이 강 저 산을 넘나들어도 시비가 없어 좋고, 소백산 조각 밭에는 새하얀 메밀꽃 세상이 흐드러져 대자유의 전설을 다시 들려주고 있다.
늘거나 줄지 않는 천지자연 그 위대한 순수의 터전에 어언 반백머리 내 삶의 흔적을 내려 놓고 한적한 산사에 좌선하면 우르르 몰려와 심금을 스치는 소슬바람, 푸른 물소리는 텅 빈 충만을 일깨워 만추의 여행을 더욱 즐겁게 한다. 난세를 떠나온 내 짧은 만행으로는 늘 여여(如如)할 두타행(頭陀行)을 자족할 수 없어 안타까운 문자로 속세의 티끌조차 묻어 들지 못할 심산유곡 불이문(不二門)을 두드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