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생과
거북이
불교에서의 방생(放生)은 집착에 사로잡힌 내 안의 어리석은 중생을 해방시키는 것을 비유해서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석가부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무명업식(無明業識)에 가두어진 자성(自性)이 업을 걷고 자유스럽게 된 것을 방생된 마음이라고 할 것이다. 아울러 나와 함께 시대를 공유하는 이 사바세상의 모든 중생의 고통도 함께 덜어야 한다는 자비 원력으로 불쌍하고 어려운 생명을 구하여 자유를 주는 것도 방생이라는 이름의 자비 행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불가(佛家)는 산야지소(山野池沼)에 물고기와 새 등을 풀어주는 것을 방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불법(佛法)은 심법(心法)이자 인연법(因緣法)이며 삼세(三世)에도 끊어진바 없다. 말과 문자는 법을 전달하는 절대조건일 수 없는 방편이다. 출중한 학문을 겸비한 지성인들이 불교용어를 해석할 줄 몰라 즉시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치를 통하는 법을 모르고 정확한 사리판단력이 부족하여 보고 듣고도 바로 알지 못하는 지혜가 모자랄 따름이다. 지혜는 현란한 언어나 빌어 구하여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류최고의 자연철학을 담고 있는 불교에서 물고기를 풀어주면서 복을 기원하는 등의 아주 잘못된 수행풍토로 말미암아 정신사조를 더욱 피폐시키고 진실한 방생의 법을 가로막고 있다. 갇힌 물고기와 새를 풀어주는 것은 굳이 방생행사를 빌지 않더라도 정상적인 인간은 누구나 당연히 하던 일이었다.
중생은 전생의 업과 이생을 살면서 보고 듣고 맛본 분별의식을 키워 지혜의 원천인 고요를 갖지 못하여 진실을 바로 아는 눈과 귀, 느낌이 없어 끊임없이 들끓는 마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풍진 사바세상을 사는 중생은 누구나 집착에 묶인 마음이 영원히 방생되어지고 걸림없는 대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간절한 원을 가지고 있다. 전생에 중생으로 살고 그 인자로 태어난 업으로 말미암아 쉬 다가오지 않는 마음의 평정을 위하여 먼저 깨달아간 선지식의 삶의 흔적에 의지하여 방생 법을 익히는 것이 바로 불세계(佛世界)인 것이다. 불세계는 잡다한 종교 행위나 별스런 수단과 방법을 앞세워 방생되어지는 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마음의 장애만 걷어내면 절로 만상과 통해지는 자연 해탈법을 담고 있다.
사리 판단과 이치에 어두운 것이 중생이다. 오늘날 불가의 여러 종교의식 중에 가장 어리석은 것은 바로 방생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지는 물고기 놓아주는 행사라고 할 것이다. 바닷가나 강 혹은 저수지변에 사부대중들이 염불하며 물고기 놓아주는 광경은 도대체 저들이 의식이 있는 사람들인지 의문을 갖게 한다. 식용으로 대기 중인 물고기를 돈을 주고 사거나 일부러 잡아 여기저기 끌고 다니다가 놓아주는 짓이 법공양이고 자비행인가? 방생이라는 이름으로 산 물고기를 흔들거리는 차에 싣고 와서는 복을 비는 염불기도로 시간을 끌어 초죽음을 시켜 놓아주는데 천벌이 내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리고 물고기가 태어나 살던 환경과는 전혀 다른 곳에 풀어놓은 물고기에게 복을 달라는 어처구니없는 짓거리가 불조의 회상당시에도 있었다면 불교는 이순간 당장 망해야 마땅하다.
어느 해 봄 남해안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겪은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해변가에 앉아 좌선을 하던 중 몸부림을 치는 기운이 발산되어 주변을 살펴보니 바다로부터 거북이 한 마리가 허겁지겁 내 앞으로 헤엄쳐 왔었다. 이 녀석이 물길을 잃었나 싶어 거두어 바다로 돌려보내었더니 다시 되돌아오기를 서너 번 반복하였다. 바다를 싫어하는 거북이이게 무슨 곡절이 있을 것 같아 거북이를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거북이 흰 배에 검은 매직펜으로 사람 이름이 빼곡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도 바다 거북이가 아니라 반드시 강물에 살아야 하는 민물 거북이를 짠 바다에다 풀어놓고 소원성취를 기원하는 어리석은 불자들의 방생행사가 있음직한 장소에서의 역사였다. 방생이라는 미명하에 바닷물에 놓여나 목숨이 경각에 달해진 민물 거북이가 과연 자기를 놓아준 불자들의 소원을 들어줄 것인가? 제 명에 못 죽게 된 거북이는 복을 구하던 불자를 향하여 두고두고 원한을 곱씹을 것이다.
나 너 없이 이 세상 모든 생명은 무위자연에 의지하여 목숨부지를 하고 있다. 특히 방생과 같은 종교의 기복행위는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낮 뜨거운 짓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자연 질서를 교란시키는 방생은 일대일의 단순관계로 인한 인과(因果)가 아니라 미래세상까지 자연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많은 생명에게 크나큰 고통을 안겨주는 죄업이 된다. 불법(佛法)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자연의 섭리를 완전히 이해한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법(法)을 말한다. 생사(生死)가 분명한 자연의 섭리를 인위로 그르치는 불가(佛家)의 오도된 방생관행을 지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