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와 중

 

어느 토요일 오후, 오락 가락하는 장마비 속에 북한산 자락의 한적한 산사를 찾았다. 언제나 시간에 쫓기는 일상을 벗어나 마음의 고향같은 산사를 찾는다는 것이 결코 간단치 않다. 외근 업무 중 오래 전에 한번 다녀온 사찰이 여기 어디쯤 있었다는 기억을 더듬어 골목길을 돌다가 언뜻 비추인 법당의 기와 지붕이 무척 반가웠다.

북한산은 수도 서울을 배태한 명산인 만큼 짜임새 또한 일품이다. 오늘 내가 찾았던 산사 역시 북한산을 주산으로 지세를 잘 살리고 있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아련한 정감이 일었다. 이 사찰 입구의 주차장에 들어서니 절 안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 왔다. 사찰에서 개를 키우는 것은 많은 문제점을 빚는다는 것을 익히 알지만 요즘은 어딜 가나 흔히 있는 일이라 무심히 우산을 받쳐 든 채 법당이 있는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계단 옆 좌측 공터 쪽에서 누렁이 한 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짖어 대기에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계단 끝에 다다르니 다른 흰 개 한 마리가 느닷없이 뛰쳐나와 내 우산 끝자락을 물고 늘어진다. 날카로운 송곳니로 우산 지붕을 물고 흔들어 대는 모습이 가히 경지처럼 이런 소임에는 이골이 붙어 있었다. 우산 지붕을 사나운 암캐에게 빼앗기고 앙상한 손잡이만 든 채 미친듯이 짖어대는 수캐를 보니 법당에 들어갈 생각이 싹없어졌다.

벌건 대낮에 개와 다투느라 온 사찰이 들썩거리니 거처에서 비구니 두 명이 머리만 내밀고 빤히 쳐다보기에 계단을 내려와 스님하고 그 비구니들을 불렀더니 문을 쾅 닫아 버린다. 나는 이 절의 내력을 잘 알고 있는 터라 저들은 사찰법도를 잘 모르는 학승들일 것 같아 주지를 만나려고 청을 넣었으나 아예 응대를 해 주지 않았다. 이들은 번뜩이는 혜안으로 사태를 짐작하고 침묵하는 모양인데 시시비비 가릴 것 없다 싶어 갈기갈기 찢어진 우산을 들고 그 절에서 나와 버렸다.

절에는 뼈다귀가 나오는 음식도 없을 터인데 이 절집 개는 도력으로 기량을 잘 가꾼 탓인지 짖어 대는 소리도 우렁차고 아귀처럼 우산 지붕을 물고 뜯는 모습은 게걸스럽다 못해 가히 오매일여였다. 한사코 법당 문을 가로막는 이 개는 주인노릇도 하지 못하는 비굴한 중을 제쳐두고 시주밥값 정도는 제대로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상대 법으로 보면 불자의 구도행각을 식(識) 어두운 축생이 임의로 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올바로 알지 못하듯이 법도를 막은 마구니 또한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 마음속의 분별심도 마구니의 잔재지만 불도량에서 참회 길을 막는 개 또한 마구니의 화신과 다를 바 없다. 무명(無明)을 밝히는 전문 수행공간인 절에서 사나운 개와 동거하면서 인과(因果)를 양산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는 절집 인간들에 대하여 진한 배신감이 일어나 산등성이에 차를 세우고 서글픈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다.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위하여 출가 수행을 하는 것이 본분이라면 개를 시켜 사찰의 재산을 지키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개에게 인과를 짓게 하는 업을 지어서는 절대로 안될 일이다. 도둑이 두려워 개까지 기르면서 사찰의 귀중품을 지켜야 될 것 같으면 다 버려야 될 중노릇이 아니라 명예와 부, 권세가 들끓는 속세의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 삭발수의한 출가승 모습으로 부처님을 앞세워 공짜 시주 밥먹으며 산중에서 장사판을 벌이는 것은 불제자의 도리는커녕 축생의 길보다 더 낮아지기 위한 몸부림과 같다.

구전에 불가(佛家)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개는 사람과 가까워 말을 잘 알아듣고 행동하는 동물이기 때문에 절반의 사람 대접을 해준다. 육도윤회의 법칙으로 보면 내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있는 축생이기 때문에 개고기를 먹는 것은 잔인한 짓으로 여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보신탕 집에 있는 개는 죽어 육신을 통째로 보시하는 공덕이 있어 내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 반대로 사찰에 사는 개는 전생에 지어 놓은 공덕으로 똑똑하고 피둥피둥 살찐 큰 덩치를 가졌지만 보신탕 집에 갈 운명을 피하여 풍광 좋은 사찰에서 주인과 함께 칠보 탑보다 더 큰 인과(因果)를 쌓는 것을 주업으로 삼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세상에는 업 많은 중생으로 태어나 길 모르고 살다가 불법인연 만나 고달픈 생활을 무릅쓰고 틈틈이 절을 찾아 참회를 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자성(自性)을 밝히려는 생각은 그대로가 정념(正念)이고 아무도 막아서는 안될 원력인 것이다. 그런데 잘 키운 절집 개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순수 동기를 빼앗기게 되면 본능적으로 강렬한 기(氣)를 발산하여 일체동근(一切同根)인 나와 개 사이를 분별하여 갈라 놓게 된다. 그러면 절집 개는 본의 아니게 불도(佛道)를 가로막은 대죄가 되어 내생에는 사람으로 오기는커녕 반드시 삼악도(三惡道)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그때 지옥의 형벌을 받는 개가 할 수 있는 일은 내생에 사람으로 태어날 공덕을 그르치게 한 사찰의 중에게 한 맺힌 원한을 곱씹을 것이다. 이런 일을 다반사로 벌이는 사람들이 출가하여 부처님의 지혜를 빌어 해탈열반에 들기를 바란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음의 표상인 것이다.

자칭 속세를 벗어난 출가자라고 말하는 인간들이 허망한 유위의 법에 착하여 내생에는 사람 몸 받을 개를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였으니 개와 중 사이에 맺어진 인과는 몇 겁을 함께 윤회하며 원한을 풀 숙업이 산적하다. 먼 후생에 북한산의 절집 개가 중이 되면 지금의 중은 틀림없이 절 지키는 개가 되어 또 인과를 만들 것이다. 난 이런 일에는 더 이상 계산이 안 되어 그만 필을 놓는다.
해탈 법은 흑과 백이 분명하고 망상분별이 없는 현실이 곧 이치다. 무욕(無慾)이면 그저 어디서나 그대로 주인인 이치를 못 깨달아 허구한 날 철옹성을 쌓고 있는 절집에 어떻게 석가부처님 정법이 깃들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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