巨士 貴下
<불교세계/2001.4月號, 풍경소리>
불가(佛家)에서 삭발 출가를 하지 않고 불도를 걷는 일반 남자들을 일컬어 거사(巨士)라 통칭합니다. 이는 부귀영화와 명리만을 추구하는 세속의 욕구를 초월하여 깨침을 얻겠다는 그 마음이 참으로 장한 이치이기에 불제자를 높여 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묘한 도리를 헤아릴 줄 알았던 옛 선각자들의 노파심이 묻어나는 언어입니다.
깨침을 얻겠다고 발심한 그 마음은 물질적 사유이거나 명리와 권세를 추구함이 아니잖습니까. 깨달음을 지향하는 그 작은 마음씨 하나는 인간 삶의 질을 높이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사실이 곧 무위법계에 무주상으로 보시하는 공력이 되며 또한 스스로에게는 무량공덕을 쌓게 하는 지중한 과업인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개인적 사유로서는 절대적이며 지상과제이기에 사바세계 만물로부터 축복 받을 대상이 되어짐도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것은 현생의 공과만이 아닌 다 겁생 간의 축적된 공력이 금생에 화현하여 결실을 맺는 과정이지만 깨달음은 그 마음마저도 내세울 것이 없는 텅 빈 공적뿐인 것입니다. 깨침의 과업은 오로지 자비희사만 있을 뿐입니다. 한 경계를 체험하여 자신이 부처라고 생각한다면 그 또한 반드시 무너져야 할 상(像)을 세운 것이기에 부처의 업(業)에 걸려든 중생에 불과할 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생에 공부를 새롭게 시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현생에 선지식 인연이 닿지 않으면 세속적 논리에 끄달려 다니느라 전생에 지어놓은 공덕을 거의 다 소멸시켜 다시 식(識)이 어두워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전생과 이생을 연결하여 공부인연을 짓기가 결코 간단치 않습니다. 전생에 공부하던 공력이 남아있는 경우는 이생에 힘있고 똑똑한 복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에게 일찍 풍족한 물질과 명리가 주어지는 편입니다. 대부분 이와 같은 세속적 가치관을 쫓느라 금생에는 마음 공부할 동기가 별로 없습니다. 이생에도 전생에 닦던 공부를 이어야 할 필연에 묶인 사람은 참담한 세속적 단절을 체험케 한 후 심법(心法)을 익히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을 밝혀 가는 방법론에 있어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지금 까지 인간이 피조시킨 철학 중에서 가장
합리적인 체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초과학적 논리로 짜여있습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오도된 불교관행을 초조인 석가세존의 가르침으로 곡해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지엄한 순수는 업식이 두꺼운 사람들에게는 가장 어려운 물건으로 치부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세속적 가치관에 편승된
낮은 가르침을 불교의 본질로 여기는 말법(末法)시대가 도래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익은 것이나 알음알이에 끼워 맞추어지는 것만을 선택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중생의 사고라는 것입니다.
순수 불교철학은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 분별에 물들어져 있는 중생의 사고로는 지루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진리의 가르침은 중생의 기호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중도에 닿아가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진리의 길이 처음에는 당연히 어렵게 와 닿습니다. 불교의 원래 가르침은 전생인연이 없거나 금생 역량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깊은 법을 들려줄 수 없으며 또 접근자체를 막아야 될 당연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가 잘 알아듣지 못함으로서 지중한 불법(佛法)을 임의로 비난하는 구업(口業)을 지을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는 사려 깊은 노파심 때문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맹목적으로 의지하고 기대하는 보편적인 종교라고 하기에는 가르침의 뜻이 너무나 합리적이며 초과학적 논리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분별에 걸려있는 얕은 내공으로는 쉽게 접목 될 수 없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먼저 원인과 결과가 분명한 인과를 믿어야 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듯 그에게 신심을 돋구기 위해서 믿음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 오도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인과를 믿어야 하는 당연지사가 잘못 전파되고 오용되면 오늘날처럼 겉껍질에 매달린 기복 신앙이 불교의 전체모습으로 비추어져 지리멸렬한 종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법(佛法)처럼 잘 다듬어진 논리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야 의식이 더욱 정교해 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묘한 진리의 힘이며 도리를 터득한 무심(無心)의 경지에 안착되는 첩경입니다.
수행을 지어 가는 방법론에 있어서 교(敎)와 선(禪)으로 구분하여 불교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단지 선각자들이 구사한 시대적 방편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극히 함축된 논법을 구사하면서도 교법보다 더 많은 경서를 남긴 선법(禪法)이 더욱 어렵다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거나 만져지지도 않는 마음을 얼마나 많은 언어로 표현해야 상대가 깨우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태산만큼이나 설명하면 될 것 같습니까. 이치를 분해하여 길게 늘어트려 놓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쉬운 것에 길들어져 스스로 이치를 터득하는 깨달음하고는 더욱 멀어집니다. 고(苦)가 없으면 낙(樂)을 사유할 수 없듯이 어려운 관문을 건너뛴 경험과 그로 인하여 축적된 내면의 힘이 없으면 만상에 끄달림 당하는 종속적 논리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중생이라는 이름입니다.
인생은 유한합니다. 더불어 인간은 지복에 의한 각자의 소임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지엄한
존재입니다. 이처럼 주어진 인생을 가장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방편이 깨달음입니다.
원대한 세계인 해탈을 논하는데 있어 가급적이면 만행의 이치를 담으려는 수단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 길은 함축된 언어를 구사하는 선법(禪法)이
가장 효율적이며 또, 수행자들에게 더 넓고 깊은 사고를 길러주는데 약효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상황은 반 만년 만에 도래하는 절호의 기회를 부여받고 있습니다. 세속적 가치관은 대 변화를 몰아올 것이지만 삼천리 금수강산 산하대지는 이른 봄 기운처럼 양양해져 가기에 눈 밝은 자들이 생겨날 조건들이 농익어 간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시절이 낳은 필연이며 동시대를 공유하는 지복이기에 특정 종교하고도 아무상관 없으며 그렇다고 불교가 지중한 영향을 끼친 결과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첩경은 동기감응이 절대적입니다. 오묘한 자연의 힘이 인간의 굳은 사고를 긍정으로 전환시키는데 지중한 역할을 합니다. 시기 적절할 때 대자연 섭리와 동일한 성향으로 계합 되어지는 동기부여가 없으면 중생의 육근 문[六門]은 결코 열려지지 않습니다. 8만4천 경전을 다 해독하고 외워도 헛것이며 면벽 좌선하여 죽을 용을 써도 분별에 사로잡힌 의식이 해방될 수 없습니다. 가장 큰 깨달음은 바람처럼 구름처럼 자연을 벗삼아 수행을 지어 나갈 수 있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 최상의 구도입니다. 지금처럼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눈 밝은 사람들이 많이 생겨날 조짐을 보인다는 것은 민족의 영광이자 국가적 행운이며 더 넓게는 인류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선도하는 물질문명으로 인하여 차츰 각박해지는 인간사에 깨달음을 얻은 개인의 정신력은 세속 삶의 근본을 조성하는 공력입니다.
돈오(頓悟)는 씨앗의 발아(發芽)이며 개화와 결실은 계율로서 만이 존재의 역할이 있습니다. 엄중한 율이 서지 않는 각성(覺性)도 없거니와 주어진 역할을 다할 각자(覺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생에 소임을 다할 者라면 무위로 연이 도래할 것입니다. 下心한 겸손의 그릇에는 반드시 제불 보살의 가피력이 감응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