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효(孝)

 

지금 우리는 혼돈의 시대, 잘못된 가치 개념 속에서 번민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에서 촉망받던 한 교육자가 재산을 물려받기 위하여 자신의 부모를 잔인하게 해하는 천륜을 배반하는 범죄를 접하게 된 것이다. 매스컴에 등장한 그는 천륜을 어기면서도 아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도덕적 상실감에 빠져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인간의 기본요소마저 너무나 간단히 부정해버린 한 지식인의 행위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모습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서 큰 번민에 사로 잡히게 되었다.

사회에서 촉망받던 지식인이 영원성이 없는 물질에 마음이 빼앗겨 참 자기 주인을 잃어버리고 시대의 패륜아로 등극한 것은 위아래가 없어진 혼탁한 사회가 원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사람들은 본 존속살인 사건을 접하면서 동병상련을 앓고 있다.

삶의 본질을 도외시한 채로 부귀영화에만 매달려 살아온 지난날들의 잔재는 가혹하기 이를 때 없다. 우리들 대다수는 바쁘게 산다는 이유만으로 우주 만물 중에 가장 존엄한 존재인 인간으로 태어나게 된 근본 이치를 망각한 육근(六根)의 노예로 살아온 전역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물질적 충족만이 삶의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착각한 지난날들을 되돌아 볼 수 있는 냉철한 힘을 길러야 할 때다.

오늘 매스컴에 등장한 한 지식인의 소행은 방탕한 인성이 빚어낸 도덕성의 파괴로 귀착되고 말지만 그 연유는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얕은 사고가 그 주범이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참 주인을 찾아야 할 때가 되었다. 바른 의식의 소유와 같은 참 주인은 영원성이 없는 물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가 되었음을 말한다.

인간은 탄생 그 자체가 집착의 근이 남아있는 중생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생에 올바른 훈습을 익히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탐의 노예로 전락케 되는 위험한 소지를 항상 내포하고 있다. 탐심은 그 끝을 모르는 야욕이 본 바탕이기에 일상에서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귀착점을 찾지 못한다.

물질에 묶인 주착심은 결국 나 아닌 너를 탓하게 되고 그것이 확대 재생산되어 스스로를 파멸로 몰아가도 올바른 인식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이 하근기의 속성이다.

시대는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첨단과 물질만능주의로 덧칠되어져 간다. 사람들은 현대물질문명만이 삶의 질을 무한정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나 첨단의 물질은 형이하학적 요소이기에 올바른 심성을 갖추는데 그것이 완전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사고가 올바르게 성숙되는 것은 그 구성요소가 물질이 우선적일 수 없다. 형상에 의존한 육신은 형이상학적 요소인 정신을 담고 있는 집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기에 결국 바른 삶은 정신이라 일컬어지는 심성을 안정시키는데 우선을 둔 인생 설계가 있어야만 탐심이 지배하는 척박한 삶에서 자유스러워 질 수 있다.

피폐한 인성이 되어짐으로 인하여 천륜을 그르치는 대죄를 짓지 않으려면 그 해답은 인륜의 근본인 효(孝)의 존재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가치관이 성립되어져야 할 것이다.

효의 근본은 분별로 논하는 유용성이나 가치성의 개념이 아닌 무조건적이며 절대성에 귀의할 수 있는 마음이 그 주체다. 그것은 상대논리에 묶여 희·노·애·락을 논하는 지금의 미약한 내가 있기 전 나를 존재케 한 부모의 지고한 공력이 밑바탕되어 졌었기 때문이다.

모체에서 왔기에 실체인 내가 존재하는 것이며 존재하는 나는 곧 소우주요, 만물의 영장임으로 정도(正道)를 지향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나는 살면서 갈등이 불덩이처럼 다가설지라도 결코 천륜을 그르치지 않는 인간사를 엮어갈 것이기에 절대 진리의 구현과 같은 효(孝)의 당위성을 서술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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