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회(輪廻)를 해부한다
윤회(輪廻)의 인(因)
자동차 라디오에서 모 대학 승려 교수가 불자들을 위한 방송 대담을 하고 있었다. 어느 불자가 '스님 무엇이 윤회를 합니까'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질문에 그는 이런 저런 비유를 들어 장황한 설명을 하였지만 그 역시 무엇이 윤회를 하는 요인인지 정확히 자각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윤회의 근원을 설명하려고 육도 윤회설과 고상한 철학 용어를 인용하는 등 학자로서 잘 훈련된 어휘를 나열하면서 사람으로 오게 된 이유와 윤회의 근원을 설명해 주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설명을 한다해도 청취자들의 가슴에 윤회의 본질이 새겨질 것 같지 않았다.
불교인들에게 무엇이 윤회를 하느냐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헤맬 것이다. 무위법계를 여행한 이생의 절실한 체험이 없다면 윤회의 인자는 보고 듣고 맛본 근을 놓지 못한 전생 습인(習因)이라는데 동감하기 어렵다. 이 몸을 이루고 있는 오온(五蘊)이 생산하고 길들어진 습(習) 에너지를 다 내려놓지 못하고 저승까지 이어온 산물이 윤회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일 때 해탈되지 못한 관습적 정신인자들이 결집되어 업연(業緣)을 따라 육도를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무위법계를 윤회하던 인(因)이 몸을 받으면 자유자재하는 육근(六根)과 인식기능인 육식(六識)이라는 자아(自我)를 형성한다. 이러한 자아가 살며 익힌 습(習)을 떨어버리지 못하고 다시 무위세계로 가져가면 그놈이 바로 윤회(輪廻)의 인(因)인 것이다. 우리 삶은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도 잘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오히려 집착하지 않으므로 더 원활한 삶을 살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 간단한 이치를 깨닫지 못해 탐욕과 불신으로 자성이 가로막혀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번뇌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이러한 생각은 오감(五感)에 뿌리를 내려 스스로 자유를 속박하고 인연취산하는 무위자연의 법칙에 귀속되지 못해 늘 내·외적 충돌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업과(業果)를 받으며 생사윤회가 있는 중생으로 거듭나게 된다.
윤회(輪廻)의 길
윤회는 고속도로를 타고 봄놀이 가듯이 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육도를 헤매는 생사윤회도 괴롭지만 또다시 사람 몸 받기는 참으로 어렵다. 사람일 때 누리고 부려먹은 과업을 철저히 치른 후에야 다시 사람으로 올 수 있으며, 그때도 불연(佛緣)이 닿지 않으면 어렵게 얻은 인간목숨도 아무런 의미 없이 끝나게 될 것이다.
이생에 그것도 하루라도 더 일찍 해탈하지 못하면 내생은 반드시 염려스럽다. 열반(涅槃)을 못 이루면 김서방 집 소가 되어 논밭 일을 하면서 전생 빚을 갚든지 아니면 이서방네 돼지가 되어 통째로 보시하여 공덕을 지어야 한다. 또는 박서방 집 개가 되어 집 지키는 소임을 다 해서라도 전생 빚을 갚아야 한다. 보다 더 낮은 미물의 몸을 받으면 몇 겁을 더 생사윤회를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사람일 때 악독한 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진다면 지옥 고를 겪느라 다음에 지렁이 몸을 받는 것도 억겁의 고통을 겪은 다음의 이야기다. 인간일 때 탐하고 편히 누린 빚이 얼마이던가.
무한한 우주 시간에서 사람의 일생은 새벽이슬처럼 짧아 허망하기 이를 때 없다.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운명이면서도 용케 불연(佛緣)을 만나게 된 것이 가상치만 중생은 이 세상에 오기 전 몸 없이 보낸 아픈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때는 선업(善業)을 쌓아 지혜를 구하고 해탈 인연을 만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업이 다해지는 날까지 형언하기 어려운 고(苦)와 함께 하였다. 내생에도 해탈 법을 알지 못할 낮은 중생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면 육신을 통틀어 보시하고 업(業) 따라 전이되어질 명운(命運)밖에 없는 것도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불연(佛緣)이 먼 육도윤회는 기약 없는 무명(無明) 속의 삶이다.
불도(佛道)는 생사윤회로부터 해방되는 법(法)
불법(佛法)은 지고한 자연철학이듯 성주괴공(成住壞空)하는 자연의 섭리에 비추어 내 삶에 과부족이 없다면 윤회는 없다. 참선은 인간으로서 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이 아니라 만행에 걸리지 않는 무심법(無心法)을 깨우치는데 있다. 모든 생명체의 극점인 인간으로 왔으면서도 진실을 모른다면 속세의 권세, 명예와 부에 상관없이 인생을 헛산 것이 된다. 열반에 이르지 못한 업식은 몇 생을 돌고 돌며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윤회고를 받게 될 것인데 인생백년이 뭔 대수인가.
두 번 다시 윤회를 하지 않을 수 있는 안심법은 그 무엇에도 묶이지 않는 지고한 지혜를 갖추는 것 이상의 묘법(妙法)은 따로 없다. 여기 지혜의 화신인 석가부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여 육도윤회에서 벗어나는 가장 평범한 해탈법을 기술하니 잘 살펴 볼일이다.
'이 세상에서 믿음이 가장 으뜸가는 재산이다. 자비(慈悲)행이 두터우면 안락을 가져오고, 맛 중의 맛은 진실이며, 지혜롭게 사는 것이 최상의 생활이다.'라고 하여 참 사람다운 행이 곧 덕(德)이며 지혜임을 누누이 강조함으로서 윤회의 인(因)이 없는 해탈의 삶을 들어 보였다.
현자(賢者)는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거니와 사랑하거나 미워하지도 않는다. 슬픔도 인색함도 그를 더럽히지 않는다. 마치 연꽃잎에 물이 물들지 않듯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또 무소유(無所有)를 걱정하지도 않으며 모든 사물에 이끌리지 않는다. 나아가 진리(眞理)를 통달한 사람은 견해와 학문과 설법을 보고 각자(覺者)라 하지 않으며, 번뇌를 이겨 고뇌가 없고 무욕(無慾)인 사람만이 업(業)에 걸리지 않는 해탈자로 규정한다.
수행자가 지녀야 할 해탈(解脫)의 묘(妙)는 '죽기 전에 돋아난 번뇌의 싹을 잘라 버리고, 새로 번뇌를 심지 않고, 번뇌를 기르지 않는데 있으며, 이렇게만 한다면 미래에 대해서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정의한다. 이런 수행자는 평안의 경지에 도달한 것으로서 번뇌가 일어나는 마음의 뿌리를 살펴 알고, 아는 그것에 더 이상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열반적정(涅槃寂靜)에든 성인이다. 그리고 그는 윤회(輪廻)하는 어리석은 무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