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사람의 길
사람들은 너나없이 맑고 푸른 물을 좋아한다. 늘 푸른 청산에 기대었다가 때맞추어 골짜기를 따라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맑은 물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케 하는 원천이자 영혼을 맑히는 역할까지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혼란스러울 때 사람들은 곧잘 대 자연 속에서 아득한 날의 향수에 취하고자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너나없이 본능적으로 때 묻지 않은 자연과 보석처럼 빛나는 맑은 물에서 숭엄한 생명력을 되새겨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삶의 근원에 깊숙이 들어가 본 사람들은 순수를 표현함에 있어 그 의미를 자연철학과 종교적 사유체계로 구성하려는 경향이 있다.
순수의 세계 그 원대함과 하나 된 체험은 분명 경이로움이다. 그러나 존재의 본질에 닿은 삶은 절대고독이다. 그로 인하여 존재의 존엄성을 올바로 알게 된 순간부터 인간은 영원한 방랑자임을 확인케 되며 이러한 앎이 새로운 業이 되어 또다시 무너져야 하는 자신을 맞이하게 된다.
인간은 홀로 임을 통감할 때 만물은 성주괴공하고 생명 있는 것은 반드시 윤회하는 지금 여기 사바세계가 칠보로 장엄한 불국토임을 분명히 체감한다. 이때부터 대자연의 숭엄한 역할에 참으로 겸손해진 자신과 무위의 섭리 그 속에 함몰될 수 있었던 성숙한 자아에 스스로 경탄하는 일성(一聲)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그것은 유와 무, 그 어떠한 대상으로부터 구하고 가지며 지켜야 할 이유가 녹아 난 벌거벗어버린 참 나가 될 때 접하게 되는 환희지다. 환희의 토대는 그 어떤 인위도 개입되지 않은 대자연의 섭리 그 오묘한 의미를 올바로 깨우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경계는 숙세간 쌓아놓은 공력에 의한 응화(應化)현상이며 견성의 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저 여기 사바세계를 살다간 대각자(大覺者)께서도 지금 말하는 이 순수의 길을 재발견한 것으로부터 그의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인 것이다.
혼돈 이전 태초의 근원과 일치되는 견성(見性) 과정에서 인간이 피조 시킨 갖가지 형상이나 형이상학적 종교용어 또는 작위와 특이한 음성, 느낌 등으로 자성을 본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착각의 부산물에 놀아난 것이다.
깨달음에 있어서 그 대상이 무엇이든 앞선 상(相)에 의지하고서는 결코 성품을 볼 수 없다. 세간의 잡다한 종교논리와 구구한 체험기에 나열되어있는 갖가지 절대자나 자성을 밝히는 과정에서 무슨 부처로부터 수기를 받았다든지 아니면 모습이나 음성을 통하여 깨우침을 얻었다는 인간들의 이야기는 자성을 본 것이 아닌 에너지 전류현상인 동기감응이 일어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의 내면세계에 존재하는 환과 접속되어진 것으로서 이런 경험자들은 드러난 허상이 너무 강렬하기 때문에 놓고 비우고 버려야 하는 정도 길에 들어서기에는 장애가 너무 깊다.
옥동자를 출산하는 것은 산모이듯 정법(正法)은 불법(佛法)에 입각하여 스스로 할 수 있는데 까지 인도하는 것뿐이다. 새 생명이 탄생되듯 한 성품을 보는 경계에 무슨 부처며 보살이 개입될 여지는 추호도 없으며 수행 중에 얼핏 드러나는 제 형상은 성품을 보기 이전의 마장들이다. 성품을 본 자는 단지 존재의 원류와 교감을 이루는 그만의 의식절차가 있을 뿐이다. 그 후 미묘한 진리 체계를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 인간의 의사전달 수단인 언어가 지극히 어수룩한 것임을 깨닫고 그 안타까움에 몸부림칠 순간들이 도래케 된다.
보편적인 사람들도 참으로 맑은 물을 표현함에 있어 통속적인 언어의 빈곤감을 체감케 되듯 순수세계의 그 장엄함을 분별세계인 중생논리로 재구성함은 태산을 옮겨놓는 것만큼 힘겹고 어렵다. 그 이유는 존재의 본성을 저자거리 논리로 표현하지 않으면 중생은 참 진리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품을 본 자는 또다시 자신을 지키며 사바세계로 회귀해야 하는 역 고행을 하게 된다.
삶의 극치는 여하한 상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 됨[깨달음] 그것뿐이다. 그 마음 됨을 위하여 스스로 절대고독의 길을 선택하는 자에게 갖가지 이유와 요란스런 모습들은 구차한 넝마에 지나지 않는다.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하는 인간으로서 하늘과 땅만큼 벌어진 수승한 사유체계를 가지게 되는 깨달음 그 이후의 세계는 새로운 혼돈이다. 그 반증으로서 옛 大覺者께서는 구구한 비유와 휘황찬란한 의인상으로 순수의 세계를 장엄하였으며 그러한 열정적 언사를 기록한 것이 오늘날 수많은 가르침의 모태다.
사바세계는 그들만의 논리에 길들어진 사상을 갖추고 있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고 물속에 사는 물풀은 흐르는 물 방향으로 길게 늘어뜨려진 모습에 당연시하는 것이 중생상이다. 개시허망한 제 형상에 끌려 다니는 의식에 대항하여 자아를 찾아보려는 온당한 부정의 용기는커녕 눈앞에 벌어진 제 상황에 이끌려 다니느라 밤낮이 없다.
정법은 무소유처와 무주상보시행을 정착시키는 것까지이듯 견성은 여하한 대상에도 기대지 않는 독립체산적 의식체계가 되기 위함이다. 누가 말한 고매한 진리라고 하여 본말이 뒤집힌 논조와 대안이 없는 방편만을 익혀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데 맛들이게 되면 결국은 자기 것이 없는 낮은 식(識)의 소유자로 전락한다.
근자 본 사이버 선원에 별스런 철갑으로 무장한 착각 도인들이 발작을 한 흔적들이 난무하다. 심식(心識)이 칠흑처럼 어두운 인면수심(人面獸心)들이 터진 입으로 놓아야 할 불교 용어들을 읊조리는 가관을 접하면서 선법(禪法)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절감케 되며 그로 인하여 진한 슬픔 또한 맛보게 한다.
세상은 다종다양한 생명들로 가득하다. 개는 개소리하고 닭은 횃대를 치며 울어재끼듯 사람은 사람다운 언사(言事)를 구사할 때 비로소 참 사람의 반열에 들 수 있다.
참 사람에 이르는 길은 창공을 가르는 새의 습성과 땅을 기고 달리며 살아가는 뭇 중생과 물을 헤집고 사는 물고기의 편협한 습(習)에서 탈피하여 中心을 잡으려는 기미가 익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