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보일배와 살불살조
<불교세계/2002.9月號, 풍경소리>
서울역 앞에 구경거리가 났다. 출가 승들이 떼거리로 가사장삼하고 길바닥에 길게 엎드리며 절을 한다. 세 발자국 걷고 한번 절하는 소위 삼보일배(三步一拜) 중이다. 삼복더위를 무릅쓰고 대로에서 오체투지(五體投地)하는 모습들이 자못 진지하여 신심이 끓어 넘치는 출가승려들의 열정적인 구도행위로 믿어 의심치 않을 일이다.
절[拜]은 불교에서 인사를 나누는 예법이며 동시에 수행의 한 방법이기도 하다. 머리와 팔꿈치 무릎을 바닥에 꿇어 절하는 오체투지는 자기를 낮추고 상대를 지극히 받드는 공경과 동시에 온 몸으로 다가서는 구도 염원도 함께 담겨있다. 또한 일상에서 규칙적으로 절을 하게 되면 참회공덕은 물론이거니와 심신이 강건하여 잔병을 퇴치하고 예방하는데도 단단히 한몫하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구도(求道)는 존재의 근본을 깨닫는 대 역사다. 진리의 스승인 자연의 섭리와 동사섭(同事攝)을 이루는 대각을 위하여 신심을 다 바치는 마음공부는 해탈이전에 세상의 등불이 되려는 원이 함께 하기 때문에 가상하기 이를 때 없다. 성불(成佛)에 있어 출가자는 재가자보다 고행이라는 단절의 벽을 향하여 애써 다가가지 않으면 망념(妄念)에 휩쓸리는 수위가 높아 마음 다스리는데 있어 더 혹독해야 할 의무가 있다. 평상심(平常心)이 도(道)인 당연한 이치를 깨닫지 못하여 천륜을 저버리고 시주의 은혜에 얹혀 빈둥거리는 작금의 수행풍토에서는 무늬 승이 깨닫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기 보다 더 어렵기 때문에 집단으로 뙤약볕 아래서 절하는 것이 아무 저의가 없다면 대단히 고무적인 모습이다.
깨달음은 헌신과 인고로서 빚은 고매한 인품과 같기 때문에 한가한 구불 타령으로는 불가하다. 아직 중생인 것에 대한 뼈저린 회한과 더 넓은 베풂과 닦음을 함께 지을 때 지혜의 불꽃이 피어나는 이치로 보면 무위도식자의 삼보일배는 날마다 숨쉬듯이 하여도 감지덕지한 일이다. 특히 사찰 앞마당으로 도로가 지나가는 것에 대한 불만으로 자연과 우주관에 입각한 불교철학을 들먹인 것이라면 그것은 사기(邪氣)로서 백골이 되도록 절을 하여도 부처의 지혜를 습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초조(初祖)인 석가세존은 철저한 무소유 철학의 실천을 통하여 위없는 지혜를 구사하였으며 그 힘은 오늘날까지 유일무이한 깨달음의 근본 종지로 빛나고 있다. 허망한 세간잡사에 묶여 지내는 일생이 누추하여 천륜을 저버리고 출세간 법에 일신을 의탁하는 것이 고금을 통틀어 변치 않을 출가상이다. 이처럼 반연(攀緣)에 묶일 원인을 온 몸으로 거부한 것이 출가의 근본취지라면 깃발을 앞세운 거리의 삼보일배는 썩어 문드러질 절집에 집착한 악다구니로 비추어지는 것은 왜일까. 더구나 공익을 위한 도로건설에 사찰이 훼손될 처지면 출가사문은 솔선하여 국사에 협력하는 것이 동업중생을 위한 작은 배려이며 무소유의 실천이라 할 것이다. 자칭 불제자가 엉터리 풍수설에 얽매여 만 중생이 편리하게 살아보자는 국토건설을 반대하는 뜻으로 길바닥에서 절하는 것이라면 신성한 법의 종지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비천한 근성을 만천하에 고지하는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절 없어 부처 못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다. 여러 가지 난제를 무릅쓰고 시도하려는 도로공사는 흐름을 원활히 하여 삶의 질을 개선하자는 공익사업이 아니던가. 이러한 국사에 불교인들이 얼토당토않게 불법을 앞세워 시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몰염치다. 한정된 땅을 효율적으로 개발하여 시간과 물류비용을 줄이는 것이 궁극적인 자연 보호이고 복지국가의 초석이라는 것쯤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인데 단견과 편견, 탐욕으로 육경(六鏡)이 가로막힌 출가사문이 거리에서 법석을 떠는 것은 온전한 불자들에 대한 배신이다.
불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영원한 자유인이 되는 해탈법이 그 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부처와는 견원지간인 탕아들이 생존의 대체수단으로 출가하여 공염불 전문가가 되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이즈음 불가풍토를 직시한다면 더 늦기 전에 대오 각성하여 다 놓고 원래의 길인 무소유를 따라야 한다. 구도 행위에 사심이 엿보이는 낮은 근기로는 일보 만배를 하여도 업만 더 보태어 절을 할수록 화상은 일그러지고 심상은 찌그러져 현재의 작은 불편과 상실감이 아니라 근본이 파하는 화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제법(諸法)이 원래부터 무아(無我)인 이치는 억겁이 흘러도 변함이 없지만 무심 지혜의 종지를 가려 놓은 얄궂은 종교역사는 오래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시공(時空)이 급격히 좁혀지는 이즈음 진리와 하나되는 무심 씨앗은 길거리 개똥 구하기 보다 더 쉬운데도 불구하고 왜곡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인연이 먼 것은 애석한 일이다. 신의와 질서를 존중하는 신 문명사회의 뒤안길에 방치되어진 종교라면 비이성적이고 반 사회화의 온상이 될 소지가 농후하다. 특히 그 안에서의 구도는 닦을수록 눈과 귀가 멀어 미륵이 하생하여 손을 내밀어도 잡을 수 있는 식견조차 없게 된다. 또한 석가세존의 가르침을 철저히 위배하는 엉터리 불교인과 신(神)과 얽힌 구도는 진리에서 가장 멀어진 정신적 노예이기에 약 처방전이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할 때이다.
풍요로운 왕자의 삶을 버리고 48년 동안 탁발로 연명하면서 위없는 진리를 설하여 중생을 교화시킨 석존의 헌신적 삶의 거울에 내 어리석음을 비추려는 작은 용기만 있어도 착(着)을 벗어 던질 각성(覺性)의 계기는 지천이다. 더구나 "나는 한 마디도 설한바 없다"라고 정의하여 당신의 설법이 미래에 올 각자(覺者)의 지혜를 가리는 우(愚)가 될 것을 미연에 방지한 사려 깊은 배려는 한없는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며 내 안에 그 어떤 분별도 기생할 수 없게 만드는 명약 중의 명약으로 영속한다. 이처럼 인고하며 봉사하지 않는 해탈지견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만고 불변의 진리인데도 진실로 아는바 없는 크고 작은 중들이 부처 불(佛)자만 들먹여도 닭살이 돋는 것은 불연(佛緣)이 멀어 온갖 이름의 상(象)을 앞세우고 부처님 법이라 사칭하는 못난 이력 때문일 것이다.
세간에는 사마(邪魔)들이 조사(祖師)의 살불살조(殺佛殺祖)를 도용하여 조자룡이 헌 칼쓰듯이 분탕질을 치고 있다. 네 앞에 분별상을 두지 말라는 선가(禪家)의 사자후를 오도하여 부모를 난도질하고 자식을 태워 죽이고 남편과 아내를 쳐죽이고 자신의 오장육부를 찢어 없애느라 계룡산 골짜기가 시끌벅적거린다. 나아가 이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폄하 하면서 무념무상(無念無想)을 들먹이는 것은 무지의 소치로 돌리더라도 마음으로 지은 참상은 근원에 한(恨)을 심고 씻지 못할 인과를 쌓는 위험천만한 불장난이다. 유위상으로는 절대 깨달음에 이를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평소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영상을 마음에 떠올리는 마음공부는 흑, 백이 분명한 무심(無心)이 아니라 소중한 자아(自我)를 무기(無記)에 빠뜨리는 매우 어리석은 행위다.
집단적으로 깨달음 이후의 보람된 삶이라는 동류의식을 고양시킨 다음 마음 속에 잔인한 상을 짓게 되면 일상적인 번뇌들이 잠시 활동을 멈추게 된다. 근기에 따라 아주 짧은 시간 안에 회한의 눈물과 고요, 아름다운 생각 등 평소 느끼지 못하던 전혀 새로운 감정이 솟아나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을 맛보기도 한다. 이러한 체험은 성품(性品)을 본 것도 아니거니와 무심(無心)과는 더욱 동떨어진 감성의 촉발로서 마왕(魔王)이 집을 짓기 안성맞춤인 뜬구름 상태다. 참혹한 영상으로 말미암아 무기력해진 의지가 공방에 빠져들면 번뇌와 고통스런 병마도 잠시 활동을 멈추어 더 없을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이 경계는 헌신과 자비원력이 빚어내는 법열이 아니라 신기가 오른 무당이 작두를 타는 것과 아주 유사한 타력에 속고 있는 상태로서 선가(禪家)에서는 극히 경계하는 초보적인 상식이다.
마왕(魔王)을 부처로 믿고 따르는 사마들은 번뇌가 지혜종자이며 반연(攀緣)이 스승인 이치를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인과와 연기법칙을 이해할 수 없는 사마 외도는 마왕의 가르침대로 마음속에 드러나는 화상은 천륜마저 쳐죽이므로 우주와 하나되는 깨달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마음수련이라는 미명아래 짓이겨지고 기절초풍한 의식을 무심이고 구경각(究竟覺)이라 일러주는 주제자의 구업도 씻지 못할 죄업이지만 더욱 아연실색할 노릇은 같지도 않은 오도송(悟道頌)과 인가(認可)라는 말에 얽혀들게 되면 지혜종자인 번뇌와 그치지 않을 전쟁을 치르는 비천한 인생으로 격하된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존재의 근본인 무위법계에 전심전력을 기울여 쏟아 부은 적의와 살생의 염력(念力)은 풀기 어려운 업인(業因)을 낳고 세상을 척박하게 만드는 공사에 동참한 악업이 되어 내생에 삼악도(三惡道)는 틀림없이 보장받을 것이다.
난세에 인류를 구할 지혜가 담겨있는 불교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업보는 각처에 사마 외도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 불법을 비하하며 세상을 어지럽혀도 속수무책인 실정이다. 더구나 시주 밥에 의존하는 자칭 불제자들이 외도 문중에 문전성시를 이루는 현실과 사리사욕을 위하여 거리에서 팔을 휘두르는 악다구니가 도솔천을 들썩이는 이 딱한 세태를 어이할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