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으로 살기
<불교세계/2002.8月號, 풍경소리>
불교는 바로 무심(無心)이다. 무심은 언제 어디서나 두려움이 없고 비굴하지 않아 있는 그대로 주인공이며 나아가 삼계(三界)의 왕(王)이 되는 묘약(妙藥)이다. 속진 세상은 온갖 이해관계로 얽혀 반연(攀緣)에서 놓여나기 어렵다. 더구나 무심의 본가인 정(靜)적인 역량이 부족하여 항상하지 않을 속세를 헤아리느라 허둥거리고 허망한 것에 홀려 중심을 잡을 수 없다면 백년의 서글픔이다.
그러나 무심자에게는 번뇌망상으로 인한 업(業)이 그를 어쩌지 못한다. 우리는 무심하여 걸림없는 일상이 되어지기를 간절이 바라지만 원만하지 못한 지혜로 반연에 가로막혀 내 의지대로 사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결국 이러한 장애는 무심의 근원인 맑고 고요한 소양이 부족한 것에서 비롯되며 올바로 깨우쳐 알 수 있는 인연 복이 멀기 때문이다. 풍진 세간잡사는 말할 것도 없고 영원한 자산을 갈무리하는 부처공부에 있어서도 복력(福力)이 미약하면 진리를 쫓아 다리 품을 팔아야 할 일만 더 늘어나 눈과 귀, 입이 수고롭고 그러므로 의식(意識)은 더 어두워진다.
정신이 주체인 인간은 더불어 사는 지구 생명체 중에 가장 존엄한 존재로 등극하였지만 개인의 소양과 능력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양태의 삶을 엮어간다. 개체의 정신에너지 즉, 심상의 질과 함량에 따라 흔히 말하는 좋고 나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반하여 넉넉한 복상은 잘 가꾸어 놓은 정신력으로서 온전한 인간성을 정립할 수 있는 밑천이라 말할 수 있다. 다사다난한 인간사에서 가장 당면한 문제는 완전한 정신력인 무심을 어떻게 갖추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승패가 판가름된다. 그것은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순 기능적 요소를 겸비하는 길이며 더 나아가 섭리에 순응하는 덕성이기에 더욱 그렇다.
만물의 근원이자 온 우주의 근본자리인 심법(心法)으로 보면 불법(佛法)에 입각하여 심성을 잘 가다듬은 덕인(德人)은 난세에 세상을 구하는 소임을 도맡은 현인과 같다. 만인에게 올바른 삶의 가치관을 심어줄 성인이 되는 길은 어렵거나 힘든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에서 해방되어진 단순 사고로 거듭나는 그야말로 밥숟가락 드는 것 보다 더 쉬운 몰록 내려놓은 그 마음이면 된다. 이것과 저것을 헤아려보는 분별심에서 그냥 만상과 통하면 되는 그 마음만을 요구한다. 이처럼 구세제민할 현인이 되는 법도 무심이 근본이고 만복을 누리는 왕의 삶도 오로지 무심뿐인데도 사람들은 그 마음이 잘 안된다고 여기 저기서 아우성들이다.
첨단시대는 편리한 물질적 소양에만 온 정신력을 쏟아 붓는 풍조가 삶의 절대적 가치관으로 자리 매김 되어진다. 잘 가공된 물질은 인류문명을 발전시키는 소중한 요소이기에 빈곤의 시대를 거쳐온 지난 역사는 물질 제일주의가 정신세계를 앞질렀다. 그로부터 골 깊은 모순이 잉태되었지만 다행스럽게 첨단 과학은 빈곤을 퇴치시키고 좋은 시운을 불러들여 나날이 생활의 질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앞에는 물질적으로 과부족 없는 시절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물질만으로는 완전한 삶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광신적으로 물질에 이끌리던 인성들이 그 이면에 도사린 허망함을 해결하지 않고는 온전한 인간으로 살수 없다는데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주 다행스런 일이다. 더구나 그 동안 정신계를 대변하던 종교가 대다수 타락하여 진정한 마음의 구심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은 참다운 인간성의 복원을 예고하는 것으로서 미래 인류사는 비이성 비 능률이 제거될 개연성이 농후하다.
인간의 의지는 상대에 비추어보기 이전에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며 그만의 절대 세계다. 고귀한 절대 자아를 건전하고 성실히 유지 관리할 수 있는 요소는 집착의 산물인 중생의 훈습(薰習)에서 벗어나 정적인 사고가 생성되어져야 한다. 무심(無心)이라 할 정(靜)은 완전한 인간조건이며 그치지 않을 지혜의 원천이다. 이러한 무심은 세상을 위하여 헌사하는 자비심이 여여할 때 가(可)하다. 따라서 세속적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는 무심은 덕성이며 참다운 정신력으로서 자기자신에게는 평화가 항상하는 것이며 타에게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갈등과 투쟁을 유발하는 세간법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지는 진리를 생명으로 삼는 구도심과 우주를 집으로 하는 용맹심이 충만한 무소유(無所有)가 근본이다. 방편을 통해서 나타나는 진리의 대의를 스스로 깨달아 알지 못하고 진리라는 주의주장에 함몰된 넋 나간 종교인이나 환에 사로잡힌 맹신론자는 왕(王)의 삶 조건에서 부적격이다.
인간은 생명이 있는 한 사유가 그치지 않는다. 더불어 중생은 이유가 무엇이든 오감의 테두리 안에서 사유하는 습인에 묶이어 인연 없이는 내 안의 극락인 절대세계를 재발견할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슬픈 운명에서 벗어나고자 물질적 사고를 초월한 삶을 추구하지만 지금의 타락한 종교나 정신계에서 말하는 진리는 아니 먹은 것만도 더 못한 불량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앞 그림에 세뇌된 질 낮은 사유로 조립되고 잡식에 오염된 얕은 머리로 주워들은 진리라는 궤변으로는 오랜 윤회동안 약육강식의 생존 질서에 노출되었던 중생의 훈습(薰習)을 지울 수 없으며, 감각적 욕구를 초월한 진리 본연에 입각한 마음으로 회귀시킬 수 있는 정당한 힘이 나오지 않는다.
할 것 많은 세상에 꿈 많고 이유 많은 아(我)라고 하는 이 물건을 통찰해보면 전생에 놓지 못했던 집착의 인(因)이 우주에서 잠시 빌려온 지수화풍의 덩어리에 얹혀 지내는 인연취산의 화합물이다. 전생에 해탈할 수 없어 수없이 몸을 바꾸어 온 전력으로 익힌 질긴 밑천과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는 이생에 알음알이로 쌓은 피고름 덩어리를 애지중지 먹이고 가꾸는 것이 깨닫지 못한 자아(自我)의 실상이다. 왕(王)으로 거듭나는 초월의식은 무심의 씨앗을 받아 가꾸는 시절인연이 주어져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무명에 사로잡힌 나[我]는 고귀한 존재의 본래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빚쟁이라는 사실을 통감할 필요가 있다.
중생의 밑천은 삼계(三界)를 윤회하다가 인연따라 잠시 이 모습을 한 것의 영속이며 전생 업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생사 윤회를 거듭하는 우주의 떠돌이인 셈이다. 이러한 떠돌이가 참 인연을 만나면 탐착으로 인한 어두운 정신 인자가 차츰 소멸되고 대 자유라 일컫는 정제된 정신인자로 변모될 수 있는 혁신적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빈약하고 치우친 인성으로 스스로 고뇌할 수 없는 인생관은 이 삶이 오히려 업을 두껍게 하는 동기가 된다. 또, 윤회를 거듭할수록 낮은 생명에 묶이어 고통이 떠나지 않는 고달픈 영혼이 되기 마련이다.
이치를 깨달은 무심으로 윤회의 고에서 벗어날 기회는 허공처럼 가득하나 한번 잘못 빠져든 정신력은 참회하고 정도로 들어서기가 간단치 않다. 이전에 겪어보지 못한 대가를 지불하면서 무심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설 용기 있는 중생은 그리 흔치않다. 특히 하근기는 허구와 잡식으로 빚은 입에 맞는 기법에 의지하여 심신의 평정을 기하려 하지만 그것은 질 낮은 중생의 감각에 영합하는 것일 뿐 깨달아 스스로 심신을 치유하고 정제시키는 성현과는 거리가 멀다. 한 생각 놓으면 누구나 가능한 해탈인의 정신력 되기를 범보다 더 두려워하는 것이 외도들이다. 그들은 잘 아는 알음알이로 잠시 살고 영원히 죽는 절대자라는 허상을 섬기며, 그에게 영혼을 의탁시켜 난관을 극복하고 욕망을 채우려는 이력이 일상화 되어있는 것은 상으로 진리를 이해하려는 질 낮은 인식의 결과다.
극락은 걸림 없는 무심의 땅이다. 무심은 중생심이 가 닿지 못했던 분별의 벽 너머이기에 절대 믿음과 물러서지 않는 용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완전한 열반의 삶인 무심을 확립하는데는 색(色)에 묶여 소아로 남은 이 모습에서 벗어나 동업중생 모두를 위한 더 넓은 마음을 낼 때 비로소 가(可)하다. 또한 길 모르고 헤매는 중생을 쓸어 안고 함께 가려는 자비원력과 그러므로 깨닫게 되는 진실함이 익어야 한다. 더불어 지금은 열린 세상이기에 기회는 균등하다. 세금도 붙지 않는 자비원력만 충만하면 누구나 업(業)으로부터 해방된 왕(王)으로 살수 있는 좋은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제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