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道와 眞理에 이르는 2가지 길

 

달마가 썼다고 알려진 유일한 작품은 '道와 眞理에 이르는 2가지 길'에 대한 글입니다. 이 짤막한 글은 후세 선사들이 쓴 독특한 禪의 향기를 지닌 글들과는 사뭇 다르나, 그 안에 구체적으로 표현된 기본 사상만은 禪宗의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글을 음미하면서 참 禪의 시원점을 더듬어 보고자 합니다.

道에 들어가는 길엔 여러가지가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2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지성에 의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에 의한 길'입니다.

1. 지성에 의한 길

경전 공부를 통한 근본교리의 이해, 즉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모두 다 하나의 참된 본질, 참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 道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참 본성이 자신을 밝혀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이 본 성품이 바깥세상에 대한 관념이나 헛된 사념으로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거짓을 버리고 참으로 돌아와 마음을 맑게 하면 수행자는 애초에 '나'라는 것도 '남'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성스러운 것과 하찮은 것이 한 물건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이를 굳게 믿고 빗나가지 않으면, 수행자는 마침내 지성 자체와 은밀히 사귀고 생각의 차별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다시는 절대로 말의 노예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수행자는 충만한 고요 속에서 無爲를 누리어 '道'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일러 '지성에 의한 길'이라고 부릅니다.

2. 행위에 의한 길

'행위에 의한 길'에는 다음의 4가지 길이 있으며 다른 모든 수행방법도 대부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미움을 넘어서는 길

수행자가 만일 어떤 고통과 시련을 당하게 되면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나간 억겁의 숱한 세월 동안 나는 근본적인 것을 외면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쫓아다녔다. 인생이라는 만경창파에 흔들리며 숱한 미움과 惡意를 품고 악행의 순간들을 저질러왔다. 따라서 내가 받는 현재의 고통은 비록 이 생에서의 내 죄가 없다 해도 지나간 여러 전생에서 지은 죄의 업보이고 그 업보가 이제 결실을 맺은 것이다. 그러니 그건 神이나 다른 어떤 인간이 나에게 해를 끼치는게 아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 그러므로 다른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내 스스로 불러들인 이 쓴 열매를 달게 받아들이자."

고통스런 일들을 당해도 마음이 동요되지 말라고 경전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모든 고통의 진정한 원인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통찰력이 온전히 발휘되면 마음은 저절로 지성의 지시에 따릅니다. 그리하여 미움은 더 나아가 타인의 미움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구도 정진하는 좋은 기회로 삼을 수가 있습니다. 이 방법을 일러 '미움을 넘어서는 길'이라고 부릅니다.

나.삶에 적응하는 길

수행자는 먼저 일체 중생이 다 업보의 상호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겐 본래 '나'라는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일체의 고락은 외적인 인연의 산물이며, 영광되거나 욕되거나 화를 당하거나 복을 받거나 간에 모두가 전생에 행한 결과입니다. 따라서 업의 저울질이 다 끝나면 자신이 받은 재산이나 명예 그리고 다른 좋은 것들도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니 한때 그런 걸 얻었다고 신나해 할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따라서 삶에서 일어나는 그때 그때의 조건과 형편에 따라 얻음과 잃음이 자연적으로 자신을 거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둘 일입니다. 왜냐하면 마음 그 자체에는 얻는 게 있다고 해서 늘어날 것도, 잃는다 해서 줄어들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기 도취의 환상에 빠지지 않을 것이며, 마음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기 때문에 수행자의 마음은 '도'의 큰 흐름과 은밀한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수없이 변하는 삶의 여러 형편과 상황들에 적응하는 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 입니다.

다.집착을 버리는 길

세상 사람들은 평생동안 어리석음에 빠져 있고 탐욕과 아집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여기에서 '집착'이 생깁니다.
그러나 현명한 자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진리를 이해하며 지성을 갖고 세속의 길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들은 재물의 부귀 변천에 몸을 맡기면서도 한편으론 탐낼 것도 즐길 것도 없는 현상계의 텅빔을 항상 의식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빛과 그림자처럼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번뇌로 들끓는 속세에 오래 머무는 것은 마치 뜨거운 솥뚜껑 위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헤매는 개미와 같습니다. 육신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고통을 겪으며 평화로부터 단절됩니다.
현명한 자는 이 점을 깊이 깨달았기에 마음이 욕망과 탐욕에서 해방되어 현상계의 여러 현상으로부터 초연해 있습니다.
경전에도 있듯이, '온갖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며, 바로 이 집착을 놓는 데서 진정한 기쁨이 찾아집니다 (有求皆苦 無求乃樂)' . 따라서 더 이상 찾지 않고 구하지 않는 데서 생기는 축복을 아는 것이 참으로 '道'의 길에 접어드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집착을 버리는 길'입니다.

라.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

불법은 그 본질에 있어서 더 없이 순수한 지성입니다. 이 순수한 지성은 모든 형상 속에 깃든 무형의 형상을 말합니다. 이 순수한 지성은 밝고 순결하며 물들지 않고 모든 집착을 떠나 있으며 '나'라든가 '남'이라든가 하는 구별이 없습니다.
경전에도 있듯이 '불법에는 중생이 없나니 이는 중생의 허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며, 또한 불법에는 '나' 중심의 에고가 없나니 이것은 '나'중심의 허물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러한 이치를 바로 보고 불법과 조화된 삶을 살아갑니다.
지혜로운 자는 자선 행위, 즉 자비를 위해 언제나 자기의 신체와 생명과 재산을 너그럽고 관대하게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모든 존재 자체와 생명체들의 본질이 '空'임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있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기대지 않습니다.
일체 중생을 인도하는 가운데서도 그의 유일한 동기는 더러움을 씻어내는 데에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중생으로서 중생 가운데 살기 때문에 소유욕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몸가짐을 철저히 하며, 동시에 남에게 도움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깨달음의 이치를 장엄하게 드러냅니다.
지혜로운 자는 망상을 떨치기 위해 여섯 가지의 德(남을 돕고, 계율을 지키고, 욕됨을 참고, 정신을 더욱 깊이 가져가고, 禪이 무르녹은 생활을 하고, 지혜를 닦음)을 행하나 대단치 않은 일을 행하는 것처럼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큰 이치에 따라 행동하는 길'입니다.

3. 마음을 어디로 向할까?

중생과 보살의 차이점은 보리심을 발했는가 그렇지 못했는가에 있습니다. 중생도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만, 중생에게는 그 가능성을 실현해야 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살에게는 진리를 깨닫겠다는 굳건한 목표가 있습니다. 이것을 願力이라고 합니다.
중생은 業에 끌려 살아가지만, 보살은 나도 진리에 눈떠 成佛해야 되겠다는 願力으로 살아갑니다. 그 보살의 원력은 6바라밀(布施, 持戒, 忍辱, 精進, 禪定, 智慧)로 실천됩니다.
얼른 외형적으로만 다가가면 참선수행은 현실의 논리체계를 무시하는 듯싶어 보이지만, 오히려 올바른 수행은 익으면 익을수록 중생이 살고 있는 현실 즉 여기 이 자리로 회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수행 그 자체는 아무런 특별한 모습도 드러내 보이지 않으면서 자연과 인간 됨의 도리가 하나되어 어우르지는 참 조화로 다가옵니다.
수행은 가장 평범하고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순수한 자연 현상과 현실의 본질에 접목해 가는 과정입니다.

4. 오늘의 Key Word

道와 眞理는 지성과 실천이 함께 할 때 나타나는 동행자이지, 저 깊은 산 속에 살고 있는 神仙들의 놀이 도구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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