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공부가 잘 되는 修行者를 위한 助言

 

 1. 無記空과 禪定三昧는 구별하여야 합니다.

스스로 그려놓은 환상의 세계 속에서 虛像의 나래를 펼치며 결가부좌하고 두 눈 지그시 내려 감고 흔들흔들 앉아 있는 모습, 눈뜨면 귀찮고 짜증나고 역겹게 느껴져 다시금 가부좌하고 앉아 환상의 극락세계로 회귀해야 하는 수행자 즉 현실과 부닥치면 즉시 허물만 벗어 놓고 實體는 도망을 쳐버리는 수행자의 모습은 無記空의 모습입니다.

禪定三昧는 생각을 일으켜 氣의 파장을 일으키지 않으니 몸과 마음이 새나 산짐승 등 주위의 순수 자연과 함께 어울려 하나되어 있는 모습 즉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니 수행자의 몸과 마음은 自然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微細妄念이 그려내는 환상의 세계가 아니고, 몸과 마음이 완전한 휴식을 취하면서도 정신과 의식은 활짝 깨어 있는 실제의 세계입니다.

이 세상을 허망하고 부질없는 공망의 장소로 생각하며, 관념만 如如해지고 할 일을 잃어버린 수행자, 즉 잠시 맛본 기억에 대한 주의주장만 앞세우며, '내가 확실히 높고 아는 것이 많다'고 큰 소리치며 지나가 버린 작은 체험(超感覺的知覺)에 대한 향수와 추억에 사로 잡혀 있는 수행자의 모습은 無記空의 모습입니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도 中心이 흔들리지 않으면서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인간된 도리를 해 나가는 日常三昧, 一行三昧야말로 靜中動의 진실한 본체이며 禪定三昧의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참선 수행과정에서 수용하게 되는 경계는 무수히 많기 때문에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요하고 편안한 三昧를 탐하여 거기에 머물러 있고자 하면 이미 그것은 탐심의 발로이며 靜 속의 순간삼매 자체도 체험, 유지할 수 없으며 行住坐臥 語默動靜간의 動 속의 삼매는 더욱 더 맛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만 수행자가 그것에 집착하지만 않는다면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부처님이 오셔서 수행자에게 마정수기(摩頂授記)를 주실지라도 상관하지도 기뻐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이 부분을 이렇게 경책하여 주셨습니다.

'거룩하다는 마음을 짖지 아니하는 것을 善境界라 한다. 만약에 거룩하다는 알음알이를 지으면 곧 모든 邪道에 빠지게 된다.' (능엄경)

2. 禪知識에게 도움을 청하여야 합니다.

당나라 때 구지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스님이 계신 암자에 한 비구니 스님이 나타났습니다. 비구니 스님은 방갓을 쓴 채로 구지스님이 계신 방으로 들어가더니 주위를 세 바퀴 돌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마디하면 방갓을 벗겠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도전인데, 구지스님은 뭐라고 해야 할지를 몰라 대답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비구니 스님이 발길을 돌려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이 때 구지스님이,

'날이 저물었으니 하룻밤 쉬어가시게.'

하고 붙잡았습니다. 그러자 비구니 스님이 다시 한마디 더하면 묵어가겠다고 말했습니다. 즉 眞理를 보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구지스님은 말문을 못 열고, 비구니 스님은 그대로 떠나가 버렸습니다.

구지스님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명색이 남자가 돼가지고 이래서야 되겠는가?' 하고, 그는 분발하여 더욱 열심히 정진하였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 암자에 도인이 나타났는데, 天龍和尙이란 별호를 가진 유명한 禪師였습니다.

구지스님이 큰 禮를 올리고 비구니 스님과의 대화를 소상히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무엇이 한마디입니까?'하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천룡화상이 손가락 하나를 딱 세워 보였습니다. 그 순간 구지스님이 깨쳤습니다.

그 후로 구지스님은 누가 와서 道를 묻기만 하면 손가락 하나를 딱 세워 보일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禪을 一指禪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루는 구지스님이 외출을 했는데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스님이 안계시므로 사미승에게 평소 구지스님이 어떻게 지도를 하시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사미승은 손가락 하나를 딱 세워 보이면서 '이렇게 지도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 하였습니다.

스님이 돌아오자 사미승이 재미있다는 듯이 조금 전에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구지스님은 물었습니다.

'그럼 넌 손가락을 어떻게 세웠느냐?'

'이렇게 세웠습니다.'

하고 사미승이 손가락을 세우는 순간, 구지스님의 칼이 사미승의 손가락을 쳐버렸습니다. 사미승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을 가는데 뒤에서 구지스님이 사미승을 불렀습니다.

사미승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구지스님이 손가락을 딱 세워 보였습니다. 그 순간 사미승은 큰 깨침을 얻었다고 합니다.

올바른 수행 그리고 그 깨침의 과정에서 눈뜬 선지식의 역할은 아주 결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수행자의 내면적인 성숙이 무르익어야 하지만 적기에 일러주는 스승의 한마디(방법이야 어찌 되었든지) 그 역할이 필수적입니다.

제 눈뜨고 보면 두두물물, 일상사 그대로가 道 아님이 없습니다. 그러니 때로는 말로, 때로는 행동으로, 침묵으로 상황에 따라 드러나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럴만한 적기에 틔워 주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스승에게는 제자의 내적 성숙이 어는 정도인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혜안이 필요하게 됩니다.

안쪽에서 쪼고 바깥 쪽에서 쪼아주는 시간이 정확하게 들어 맞을 때 계란의 벽은 깨지고 새 생명이 탄생합니다. 이를 '줄탁동시'라고 말하며 時節因緣이라고도 합니다. 물론 그 時間이 되기까지 알을 품고 앉아서 온도를 조절해 주고 때를 기다리는 어미닭의 인내와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 어미닭의 역할이 참선수행에서는 스승의 역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그 역할이 결여된 상황에서는 새로운 생명(깨달음)의 탄생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미닭의 도움과 더불어 안쪽에서 쪼는 작업, 즉 내면적인 자각과 주체적인 수행자의 정진 또한 필수적인 전제조건입니다.

3. 모든 수행은 現實 生活로 모아져야 합니다.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는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계가 다 않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행이 익어가면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닙니다. 산과 물이 空이요 하나의 성품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무르면 또 진리에 집착하는 병이 생기고 맙니다. 다음에 공부가 제대로 되고 보면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그대로 물일뿐입니다. 두두물물, 눈 앞에 전개되고 있는 산하대지가 그대로 진리를 현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곡산의 보철선사가 어느 날 부채를 부치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어떤 스님이 와서 물었습니다. '바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두루 作用하지 않는 곳이 없거늘 선사님께서는 어째서 부채를 부치고 계십니까?'

그러자 선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님은 바람의 본질이 變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이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는 말의 올바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군요.'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선사는 묵묵히 부채를 부치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스님은 깊이 감격하여 예배하였습니다.

수행이란 존재의 실상을 알기 위해 잠시 기웃거려 본 삶의 한 과정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실상을 확연히 본 수행자는 선사처럼 논리적 이해는 미련없이 던져버리고 더우면 부채를 부칠 따름입니다. 즉 지금 이 순간의 여기로 돌아와 자기의 역할을 걸림없이 이어갈 뿐입니다.

깨달음의 성품은 생각이나 문자에 있지 않고 作用하는데 있으며, 현재의 이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에서 作用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마음을 어디로 향할까?

이것 저것 다 수용하고 이해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無이며 공망입니다.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닌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관념적으로 그려내는 無相은 결국 허상입니다.

無念無着이라는 것은 알음알이로 이해하고 두루뭉실하고 얼렁뚱땅한 면면들과 타협이나 하고 위안을 얻으면서 살 수 있는 마음이 아닙니다.

無相이란 中心과 같고 삶의 지고한 기준점이 되는 목적과 같으며 내공이 약한 상태에서는 결코 수용될 수 없는 힘의 결정체입니다.

깨달음이란 다생간에 쌓아 둔 공덕이 원력이 되고 깨끗이 청소된 빈 그릇에 時節因緣이 닿으면 三神佛의 작용에 따라 칠보탑이 쌓아지듯 무위로 이루어지는 경계입니다. 그 다음 도래하는 無相心은 경계를 거치고 뛰어 넘은 이후에 다가서는 영원한 자유의 세계입니다.

道는 구해서 얻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무엇이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착각에서 온 환상일 뿐입니다. 온 몸과 정신이 현실에 몰입된 것이 正道이며 如如한 깨달음의 모습입니다.

因緣의 도움 없이는 어떠한 경우에도 깨달음의 자리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주변의 氣運을 빌려쓰고 놓을 수 있으면 그것이 正覺이고 正道이며, 놓을 수 없으면 곧 邪道입니다.

도움 받고 빌려쓰고 놓고 버리고 비우는 것도 자기 의지로는 今生에 전부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설프게 뭐 하겠다고 길이 잘 못들면 놓고 비우고 버리겠다는 생각을 일으킨 그것 자체가 집착의 因이 되어 더욱 가능성이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善知識의 도움을 받아 確信을 가져야 하고 내면의 정신세계 속에 드리워져 있을 부정적 사고방식인 어둠을 지워야 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게 됩니다.

5. 오늘의 Key Word

좌선도 참선도 수행의 한 방편입니다. 그 속에 마음이 머물면 그 또한 아상이고 집착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마저도 제 자리에 돌려놓고 허허롭게 떠날 수 있을 때 참으로 걸림 없는 대자유의 길로 접어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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