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우주와 인간 그리고 존재
지금으로부터 약2,500여년 전에 북인도의 건강한 청년,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리수 나무 밑에서 선정삼매에 들어가 直觀을 해 보니,
宇宙의 실상 관찰(3법인)
제행무상(諸行無常) : 현실세계를 시간개념으로 바라보니, 나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緣起 흐름만 하염없이 이어질 뿐, 고정불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제법무아(諸法無我) : 현실세계를 공간개념으로 바라보니, 나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生住異滅하는 연기 흐름이 빚어낸 지금 여기 이 순간에서의 緣起 모습일 뿐, 꼬집어 이것이 나(我)라고 내세울 개체적인 실체는 아무것도 없구나!!!
열반적정(涅槃寂靜) : 현실세계가 탐진치 3毒의 無明이 빚어낸 虛像의 불꽃이었음을 확연히 깨닫고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니 해와 달이 교차하고 생성소멸이 如如한 寂靜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델포이(Delphoi) 신전(神殿)에는 “너 자신을 알라”고 하는 신탁(神託)이 걸려있다. 이 신탁은 소크라테스의 심혼을 움직여, 오랜 기간동안 서양철학의 중심 테마가 되어 왔다. 여기 3법인은 고타마 싯다르타가 선정삼매에서 바라다 본 우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불법의 중심 테마다. 이를 델포이의 신탁에 견주어 말한다면, 자기 자신을 안다는 일이 무한하게 확대되어, “이 우주가 우주 자신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 포용하여, 한없는 우주가, 한없는 광명에 의해 비쳐지고, 또 구명되어, 한없는 우주의 실상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현실세계와 실상세계는 그 근거로 삼고 있는 입장이 서로 반대라고 할 수 있다. 현실세계는 자아를 좋아하고, 자아를 즐기고 있다 즉 무엇을 行하고, 무엇을 생각하든, 거기에는 언제나 자아관념이 가로 놓여 있으며, 자아가 모든 사유 행동의 근본기반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세계는 이러한 자아관념이 초극된 세계이다. 즉 자아라는 마지막 둑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한 없는 목숨, 한 없는 빛이 그대로 드러나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이다.
우리들이 자아관념을 근거로 하여 살고 있는 한, 실상세계는
우리들과 인연이 없다.
따라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깨달은 진리는, 매우 깊어서 이해하기 어렵다. 적정(寂靜), 미묘하여서, 분별의 세계를 초월하고 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아를 좋아하고, 자아를 즐기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연기(緣起)의 도리는 이해되지 않는다. 번뇌가 소멸한 열반(涅槃)의 세계도 이해되지 않는다. 비록 내가 설법을 한다해도 나는 오직 지쳐 버리는 것뿐이니라.”(律藏, 大品)
A라는 개구리가 어떤 우물 속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평생을 한 우물 속에서 살아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큰 강에 살던 개구리 B가 땅으로 기어올라 왔다가 그만 그 우물에 빠졌다.
A : 너 어디서 왔니?
B : 큰 강에서
A : 강은 얼마나 크니? 이 우물만큼 크니?
B : 이런 좁은 우물과 어떻게 비교한단 말이냐.
A : 이 우물보다 더 큰 데가 어디 있어! 이 거짓말쟁이야, 어서 썩 못 나가!
이 자아라는 현실세계를 유일한 세계라 여기고 있는 사람에게는, 실상세계의 망망대해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경지이다. 그러나 그가 알고 있든, 모르고 있든, 바람이 그쳐서 해면이 고요해지면, 우주의 삼라만상은 빠짐 없이 그 해면에 그림자를 비친다. 이것이 곧 바다에 비쳐지는 해인(海印)이며, 태고로부터 이어온 이 절대고요의 세계, 실상세계의 모습이다.
人間의 실상 관찰 (4성제)
고(苦聖諦) : 인간은 삼라만상과 자기자신을 변하지 않는 고정불변의 실체로 착각하여, 만나는 모든 것들을 “내 꺼”로 묶어 두려는 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삶은 우주의 실상과 자기와의 끊임없는 충돌로 이어지고, 이 충돌을 인간은 고통이라 하소연하며, 이를 숙명으로 받아 들이면서 살아가고 있다.(一切皆苦)
집(集聖諦) : 고통은 우주의 실상에 대한 무지가 빚어낸 “내 꺼”를 向한 집착 때문이다. 자석이 종이 위에 놓인 모든 쇳가루를 자기를 中心으로 배열하듯이 모든 것들을 인위적으로 나를 中心으로 하여 묶어 두려는 그 집착 때문이다.(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멸(滅聖諦) : 나를 中心으로 하여 묶어 두려는 그 집착심을 놓을 수만 있다면, 절대고요 그 자체와 있는 그대로 그냥 어울리는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涅槃寂靜)
도(道聖諦) : 집착심은 그릇된 훈습 때문이다. 탐진치 3毒을 계정혜 3學으로 바로 잡을 수만 있다면, 번뇌가 곧 열반이 된다.(8正道)
고통이라는 것은 어떤 사실적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혹의 갈애에 가득 찬 인간이 스스로 지어낸 것일 뿐이다. 인간의 마음으로 살아가면, 그의 삶은 고통 그 자체다. 그러나 우주의 마음으로 살아가면, 그의 삶은 열반 그 자체다. 올바른 수행은, 새삼스럽게 고통이라는 것을 들어내고 그 자리에 열반이라는 새로운 것을 집어 넣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시작과 끝을 여실히 관찰함으로써 고통이 바로 열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고통과 열반은 同體이다.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바라보면 열반이고, 잘못 바라보면 고통이다.
存在의 실상 관찰(12연기)
[順觀으로 바라보기]
(보이지 않는 절반의 세계)
無明 : 緣起의 고리가 빚어낸 이 모습을 “내 꺼”로 착각한 한 순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청명하고 잔잔하던 절대고요의 해면에 작용의 파장이 일어난다.
無明한 行 : 이 “내 꺼”라는 無明은 “내 꺼”를 더 키우려는 無明한 行, 즉 불합리한 훈습으로 발전하고…
無明한 識 : 이 불합리한 훈습은 “내 꺼”와 “네 꺼”를 구별하는 無明한 識, 즉 자아의식으로 발전하고…
無明한 6入, 名色, 觸, 受 : 자아의식에 젖은 안,이,비,설,신,의 즉 감각기관(6入)이 색,성,향,미,촉,법 즉 인식의 대상(名色)을 만나면(觸) 느낌이 일어나고(受), 이는 즉시 제7식으로 전달된다.
“눈(眼)”이 “색(色)”을 만나 “봄(見)”이 되고, “봄”은
곧 “느낌(마음이 動함)”을 일으킨다. 이렇게 보는 데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
“안식”이다. 듣는 데서 “느낌”이 일어나는 것이 “이식”이고, 비식, 설식, 신식,
의식과 함께 이들은 “前6識”이 된다. 여기에 자아의식인 제7식과 잠재의식인 제8식이
함께 어우러져 “총체적 삶의 흐름”은 이루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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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흘러갔고 오늘도 흘러가고 삶의 흐름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간다. 이 흐름을 나누면 “8識”이고, 줄이면 “앎” 즉 한 마음이다. 이것을 형상으로 나누면 온 세계이고, 줄이면 한 티끌이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業種子”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無始無終) 총체적 흐름의 한 토막일 뿐이다.
無明한 愛 : 無明한 전6식이 받아 들인 “느낌”은 제7식이 이미 보유하고 있던 Database 인자들과 비교되어 좋다, 싫다, 마음에 든다, 안든다 등 애욕의 마음으로 제7식에 다시 갈무리된다.
無明한 取 : 無明한 애욕의 마음은 “내 꺼”로 취하려는 집착심으로 더욱 더 증폭된다.
無明한 有 : “내 꺼”로 向하는 자아중심적 가치기준에 따라 더 증폭된 無明한 집착심은 녹음기에 소리가 저장되듯 제8식에 고스란히 業種子로 저장된다.
(보이는 절반의 세계)
無明한 生 : 제8식에 저장되어 있던 無明한 業種子 즉 業識이 시절인연을 만나면 有爲 世界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無明한 老, 死 : 태어난 모든 것들은 생명에너지가 떨어지면서 서서히 노쇠해 간다. 삶을 지탱하는 생명력이 소멸해 가면서 “내 꺼”라고 주장하고 있던 無明한 “業 에너지”는 有爲 世界와 다시 이별을 하게 된다.
무명(無明)은 학식이 없어 무식하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실상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어지면 저것이 없어진다”는 연기의 흐름에 대한 무지를 말한다. 연기를 모르면 고정불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空”을 모르고, 삼라만상은 이 마음 안에 있다는 “一切唯心造”의 이치도 알지 못한다. 이렇게 “空”과 “一切唯心造”의 도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삼라만상의 본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나타날 수 없다. 즉 이러한 사람들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허상 속에서 헤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이다.
[逆觀으로 바라보기]
(보이는 절반의 세계)
無明한 死, 老 : 병들어, 늙고, 죽어가는 과정에서 격렬한 고통과 고뇌가 일어난다. 모든 근심과 슬픔, 괴로움은 모두 이 생노병사에 집중되어 있다.
無明한 生 → 明한 生 : 이 생노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즉 윤회의 고리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보이지 않는 절반의 세계)
無明한 有 → 明한 有 : 윤회의 고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業種子를 없애야 한다. 즉 제8식, 業識을 맑히고 밝혀야 한다.
無明한 取 → 明한 取 : 業識을 맑히고 밝히려면, 모든 것을 “내 꺼”로 묶어 두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즉4상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無明한 愛 → 明한 愛 : 4상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분별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즉 兩邊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中道成立)
無明한 受, 觸, 名色, 6入 → 明한 受, 觸, 名色, 6入 : 兩邊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는, 전6식(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과 제7식(자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걸림없는 行 즉 멸진정(滅盡定)으로 들어가야 한다.
無明한 識 → 明한 識 :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자아의식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無心으로 들어가야 한다.
無明한 行 → 明한 行 : 無心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항상 一念으로 살아야 한다 즉 그때 그 자리에 꼭꼭 맞는 行으로 이어져야 한다.
無明 → 明 : 一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삼라만상과 언제나 通해지는 마음이어야 한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열자마자, 그의 마음은 이 우주, 삼라만상과 일체가 되었다. 그 때의 광경을 경전은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깨달음을 여셨을 때, 대지는 청정해져서 온갖 보배와 꽃으로 장식되었으며, 꽃 향기는 그 위에 가득 넘쳤다. 그리고 그 화만이 부처님 주위를 에워쌌으며, 그 위에 금, 은, 유리, 파리, 산화, 마노 따위의 진귀한 보석이 아로새겨져 있었으며, 많은 수목은 가지와 잎에서 빛을 발산하여 서로 비치고 있었다. 이런 정경은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부처님은 이 사자좌에 앉아, 최고의 깨달음을 완성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과거, 현재, 미래의 진리가 모두 평등함을 깨달으셨으며, 그 지혜의 광명은, 모든 사람의 몸 속까지 비치고, 그 맑은 깨달음의 음성은 세계의 구석구석까지도 퍼졌다.”(華嚴經 世界淨眼品)
부처님이 깨달음을 연다는 것은, 그의 마음이 근본적으로 전환됐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간에, 영겁의 옛날부터 지금까지 대삼매에 들어가 있든 존재실상이 그의 삼매를 통해 있는 그대로 인식된 것이다. 스스로의 삼매를 통해 일단 존재실상의 대삼매와 접하고 나면, 삼매란 결코 결가부좌하여 심신을 통일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산천초목과 자연 현상들 모두가 삼매 아님이 없다. 즉 자기 혼자가 삼매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그 자체가 대삼매에 든 것이며, 삼라만상이 선정삼매에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경전에도 표현되었듯이, 이 우주 자체가 청정해지고 장식되는 것이다. 즉 대지는 청정해져서 온갖 보배와 꽃으로 꾸며지고, 꽃 향기가 메워지고, 무수한 보석이 아로새겨지며, 수목은 빛을 발산하며 눈부시게 빛나고 있다. 이런 국토 장엄이, 사실은 부처님의 깨달음, 대삼매에 의해 나타난 것이다. 더욱 또 그것만이 아니다. 부처님의 지혜의 광명은 모든 중생의 체내까지 꿰뚫어 비치고, 그 깨달음의 음성은,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울려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부처님의 깨달음은, 부처님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전 세계를 비치고 있다는 점에, 그 진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의 세계가 우리들의 현실세계를 떠난 어떤 특별한 경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 현실세계의 새로운 장엄일 뿐이며, 현실세계의 존재 실상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