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三法印과 四聖諦
1. 삼법인
- 제행무상(諸行無常)
- 제법무아(諸法無我)
- 일체개고(一切皆苦)
이 세상의 모든 실체는 변화의 연속선상에 있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항상 할 수 없다.[諸行無常] 이렇게 무상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를 다른 표현으로 하면 법계(法界)라고 한다.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형성된 법계의 어떠한 현상도 그것은 일시적으로 나타난 모습에 불과하다. 즉 변화 과정에 형상화된 어떠한 것에도 영원성을 지닌 자체의 고유한 특성[我 또는 自性]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모든 물체는 무아[諸法無我]이다.
인간도 법계의 연기 과정에 나타난 하나의 일시적 형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은 무명(無明)으로 인해 자아가 있다는 허구적 자각에 빠지고 그리고 욕탐으로 인해 연기하는 법계에 나타나는 일시적 형상들을 대상화하여 그것에 탐착하게 된다. 하지만 생주이멸하며 성주괴공하고 있는 삼라만상 [우주]은 자신의 욕심에 따라 취하고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무명으로 인해 형성된 자아가 연기 법계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난 형상을 허구적으로 대상화하여 그것을 자신의 욕심대로 취하고 또 버리고자 할 때 그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탐욕에 묶인 삶은 고통이다.
인간의 인식 작용에 의해 조작화된 형상들 즉, 우리의 경험과 사고에 따라 구분 지어 대상화시킨 이 세계를 유위 법계(有爲法界)라고 한다.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 낸 허구적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에 집착한다. 하지만 허구적 자각에 불과한 유위 법계에 우리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면 모든 것의 결론은 고통일 수밖에 없다. [一切皆苦]
"이 세간은 다분히 '나'라고 하는 자아 그리고 내 것이라고 하는 객관적 실체[我所] 등에 집착하여 헤아리고 사로잡히느니라. 바른 제자는 마음의 의지 처인 육근에 집착하여 헤아리는 사량 분별심에서 벗어나며, 자아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에 사로잡히지 않고 머물지 않으며,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괴로움이 멸하면 멸한다고 보아 그것에 미혹되어 끄달리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마음이 만들어 낸 유위법의 허구적 존재에 연연하는 바가 없으면 여기에서 지혜가 생긴다." (가전연경)
2. 四聖諦
苦聖諦, 集聖諦, 滅聖諦, 道聖諦
고·집·멸·도 사성제는 고통이 일어나고 또 그 고통을 없애는 길을 밝히는 성스러운 진리이다. 사성제는 윤리적 수행을 목표로 설해 놓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완벽한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
(1) 고성제와 집성제 [생사의 세계]
석가모니께서 깨달은 눈으로 바라보니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세계는 인간의 인식작용으로 만들어낸 유위의 세계이며, 그 유위의 세계에 묶어 살 경우 삶은 곧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고통이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무명으로 인해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고 욕탐으로 인해 연기하는 실체를 대상화해[유위법] 그것을 취착하려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전생의 업과 인연법으로 인해 형성된 하나의 유기체에 불과하다. 즉 자아는 연기하는 하나의 법에 불과하다. 실체가 없는 연기하는 하나의 현상[연생법]을 단지 대상화하여 만들어 낸 일시적인 상의적 존재이다. 예를 들면 촛불은 하나의 연기 현상에 불과하다. 기름, 산소, 심지, 그리고 불과 만나서 형성된 연기법이다. 만약 이 촛불이 바람이나 물과 인연을 지으면 다른 연기 현상이 일어난다. 촛불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연기의 현상이 인연에 의해 다르게 형성되고 있을 뿐이다. 인간도 이와 같이 욕심이라고 하는 심지에 오온[色受想行識]이 연기하여 벌어지고 있는 하나의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다.
욕구라고 하는 지향성을 가진 에너지[氣]와 욕구가 작동하는 과정에서 무명으로 인해 만들어진 [바라보는 나] 허구적 존재인 자아는 인식의 작용을 동원해 환경적 요소를 자기의 뜻대로 움직이고 사용하기를 바란다. 즉 자아의 존재 가능성에 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취하면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한다[적자생존]. 하지만 환경은 자신의 뜻대로 조정하고 엮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연기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다시 말해 연기하는 만상은 무상할 수밖에 없다. 무상하게 연기하는 법계를 자신의 뜻대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불가능한 일에 집착하여 살아가는 삶은 괴로움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여실한 삶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고성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고통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여 축적되는지를 설명하는 성스러운 진리가 곧 집성제이다. 집성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십이연기[무명, 행, 식, 명색, 촉, 수, 애, 취, 유, 생, 노, 사]이다.
(2) 멸성제와 도성제[열반의 세계]
자아라고 하는 무명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욕탐을 제거하게 되면 인간의 유위법에 묶인 마음도 멸진할 것이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통도 없어질 것이다[멸성제]. 그러면 어떻게 욕탐을 제거해야 할까? 연기 실상을 바르게 알고 허구적인 존재인 유위법의 세계에 끄달려 가지 않도록 바른 삶과 실천이 중요하다[도성제]. 멸·도성제는 깨달음과 실천을 요구한다. 이는 열반의 세계에서 살아가려 한다면 먼저 연기하는 법계 즉, 삼법인을 정확하게 체험적 삶을 통해 깨우쳐 알아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욕탐을 중심으로 하는 삶은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苦]하고, 그 고통이 어떻게 일어나 축적되며 삶으로 연결되는 지를 여실히 알며[集], 체험적 삶의 형태를 통해 실질적으로 마음의 평화를 실감하는 것이 중요하므로[滅] 구체적인 실천 즉 팔정도를 행해야 한다[道]. 이것이 열반의 길이다.
멸성제는 도성제 즉, 팔정도에 입각한 삶을 통해 얻어지는 체험이다. 따라서 팔정도에 입각한 삶은 그대로가 고통을 멸하고 열반을 증득하는 진리인 것이다. 이제 실상을 여실하게 알고 열반을 통해 대 자유인이 되고자 한다면 사성제를 삶의 형태로 구현하는 끝없는 노력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