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수행의 원리

 

2. 수행의 원리

1) 불법(佛法)을 거울로

사람들은 흔히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몸[色]· 감정[受]· 지성[想]· 의지[行]· 의식[識] 이 다섯가지 요소[五]들이 쌓여서[蘊] 형성되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깨닫지 못하면 내 몸과 마음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일 조차 내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 사바세계다. 그렇지만 깨달음을 얻고 나면 무엇을 하든 성품을 등지지 않게 되기 때문에 자유스런 언행이 된다. 비유하면 물과 불의 성질을 잘 아는 사람은 이것을 이용하여 인류사에 크게 기여하게 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근본성품을 볼 수 있으며, 대자유인, 대 해탈인 이 될 수 있는가. 먼저, 그 동안 밖으로만 내달리던 모든 관심을 안으로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바깥의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생각하는 가운데 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좋은 것은 붙들려고 하고, 싫은 것은 거부하며, 때로는 대상에 이런 저런 것에 대해서 무관심해 진다. 여기에서 모든 번뇌와 집착과 무지는 시작된다. 모든 것은 이렇게 지각된 바탕 위에 감정과 생각과 논리와 판단이 따라 붙는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세운 하나 하나의 이미지들로 이 세계는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세계는 당연히 나의 번뇌에 의해 세워진 환이며 물거품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거다 저거다 정해놓고 쫓아가는 삶은 신기루를 쫓는 것과 같이 끊임없는 갈증만 증가시킬 뿐 영원한 휴식과 편안함은 결코 주지 못한다.

외부의 어떤 것에 얽매어 붙들고, 거부하고, 외면했던 삶을 안으로 돌려 붙들려고 하는 마음을 놓고 거부하려는 마음을 쉬고, 외면하는 마음을 알아차림으로써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깨어있을 수 있다. 외부로 향하던 관심을 안으로 돌려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 등을 알아차리고 깨어 있음으로써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의 첫 번째 원리이다.

2) 있는 것 그대로

이렇게 해서 마음이 쉬고 편안해지면 사물을 대할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신다. 그러나 과연 물맛을 재대로 느끼면서 마시는가. 아니면 그냥 마시는가. 물을 마실 때 있는 그대로 그 맛을 느껴보라. 소리가 들리면 그것이 욕하는 소리이건, 칭찬하는 소리이건 그냥 소리 그 자체로 들어라. 그리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느껴보아라.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 주어라. 이것은 '욕'하고 분별하는 순간 듣기 싫은 마음이 솟아오른다. 그러니 판단 분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껴보아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직관의 힘을 키운다. 분별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한 측면만을 보고 판단하기 쉽다. 반면 직관은 그것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지극한 객관이며 통찰력이다.

화학자에게서 물은 화학 기호로 접근할 것이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갈증을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고, 수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두렵고 원망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물을 한 측면만이 아닌 통째로 파악한다. 이러한 직관은 고정관념과 욕심과 경험 등의 장애 요소들이 사라지고 무심의 상태에서 그것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해 진다. 어떤 사물이나 감정이나 상황이 닥칠 때 일체의 판단분별을 떠난 무심의 상태에서 그대로 바라보면 그것이 되어서 그대로 느껴지기도 하고 진실이 알아지기도 하며, 모든 것을 대할 때 나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고 곧 하나가 되어버림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직관력에 의해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진실과 만나게 된다. 우주와 나의 본성은 이러한 직관에 의해서 간격이 좁혀지고 물리가 터득된다.

사람의 고통 가운데 많은 부분은 인간관계 속에서 생긴다. 또한 내 마음으로 그린 여러 가지 상(相)때문에 스스로 벽을 쌓고 나와 남을 갈라놓는다. 이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반연(絆緣)의 고리가 끝이 없다. 이때 어떤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않고 안으로 돌리며, 부분적 경험으로 판단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나와 너의 대립이 사라지고 모든 것은 조화가 이루어진다. 나를 세우지 않으면 결코 대립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조화임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 모든 것이 귀하지 않은 것이 없고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3) 알아차림

수행의 또 다른 원리는 알아차림이다. 현재 자신의 안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그것이 일어남과 유지됨과 사라짐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진실로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들뜬 의식으로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고요 속에서 여실히 아는 것이다. 우리는 한 순간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런데 이 숨쉬기에 얼마나 깨어있는가. 숨쉬고 앉고 서고 걷고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밥 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몸 가는데 마음 가도록 하여야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 중에 알아차림을 잃지 말라고 하셨다.

<유교경>은 선지식을 구하고 해탈을 구하는 것은 생각을 오롯하게 하여 알아차림이 지속되게 하는 것만 못하다. 만약 알아차리는 상태가 흩어지지 않고 지속하면 모든 번뇌의 도적이 능히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염(念)을 거두어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잘 살펴야 한다. 만일 알아차려 각찰(覺察)하는 힘을 잃어버리면 모든 공덕을 잃어버릴 것이며, 만일 알아차리는 힘이 굳고 강하면 비록 오욕의 도적 속에 들어가더라도 해침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유컨대 갑옷으로 무장하고 적진에 나아가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과 같다.

4) 지금 여기

알아차림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음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라고 하는 것도 한 순간도 머무르는 바가 없으니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나는 여기에 있다. 따라서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도록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모음으로써 언제나 깨어있을 수 있다. 상념과 온갖 환상에 속지 않고 진실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찰나다"라고 말한다.

5) 일심으로

어떤 일이든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의 과(果)를 증득하는 해법은 열심히 하는데 있다. 그것은 일심이 됐음을 의미한다. 일심으로 해서 안돼는 일이 없다. 일심은 원력이 구현되고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하며 어떤 하나에 집중되어 다른 생각이 없음을 말한다. 오로지 일심은 그 자체가 생활이 되어질 때 무지가 자리를 비껴 나고 본성광명이 드러나는 것이다.

일심을 방해하는 탐심, 진심, 치심, 의심, 산란심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면 일심이 될 수 없다. 특히 진심(塵心)은 마음을 격동시키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잘 경계해야 한다. 또한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나를 가르치는 사람은 진짜 깨달음을 얻었을까? 등의 의심, 수행을 해서 뭘 어떻게 해봐야 하겠다든지 빨리 이루고자 한다거나 결과에 연연하는 것, 등의 욕심[수면욕, 식욕, 성욕], 습관적 욕구[본능적 욕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실은 욕망이라는 습관적 의식작용이 결부될 때가 많음] 그리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면서 일심을 방해한다. 이럴 때에는 적절하게 그것들에 대해 대처할 필요가 있다.

6) 계·정·혜의 통일

계·정·혜 삼학(三學)은 불교수행자들이 갖추어야 할 수행의 세가지 요소다. 먼저 계는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여 수행자들이 마음에 안정을 유지하며 생활할 수 있는 지침이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안정되면 선정을 통해 더욱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맑게 한다. 그리고 고요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정진하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드러난다. 이렇게 계는 정의 바탕이 되고 정은 혜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선적으로 끝나지 않고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혜가 생기면 어떤 것은 해야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할지 스스로 알게 된다. 또 정이 깊어지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계를 지키게 된다. 또한 정과 혜는 통나무의 양끝과 같아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고 가르기도 힘들고 어느 한쪽만 취하기도 어렵다. 늘 함께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사람도 정혜쌍수라 하였으며, 등과 빛으로 비유하기도 하였다.

<익진기(翼眞記)>에 의하면,
"선정(禪定)과 지혜(智慧) 두 말은 바로 삼학의 준말로서 갖추어 말하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다. 계율이란 잘못을 막고 악을 고친다는 뜻으로서 삼악도에 떨어짐을 면하게 하는 것이요, 선정이란 이치에 맞추어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 잡는다는 뜻으로서 여섯 욕심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며, 지혜란 법을 가지고 공을 관(觀)한다는 뜻으로서 묘(妙)하게 생사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성인이 처음에 수행할 때에는 다 이것을 배웠기 때문에 삼학이라 하는 것이다. 또 삼학에는 상을 따르는 것과 성에 맞추는 것의 구별이 있다. 상을 따르는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고, 성에 맞음이란 이른바 이치에 본래 <나>가 없는 것은 계율이요, 이치에 본래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선정이며, 이치에 본래 헷갈림이 없는 것은 지혜다. 이 이치만 깨달으면 그것이 곧 진정한 삼학이다."
그러므로 6조 혜능스님이 "본마음에 잘못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율이요, 본마음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선정이며, 본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지혜다."한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선정과 지혜의 그 이름은 다르나 요는 그 당사자의 신심이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데 있다.
<지도론>에 "세상의 보통 일에 있어서도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으면 그 일을 이루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위없는 도를 배움에 있어서 선정과 지혜에 힘쓰지 않아서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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